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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퀴어를 위한 베를린 섹스문화살롱을 찾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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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사정’ 교과서의 집필자를 찾아서

베를린 섹스문화살롱 라우라 메릿 인터뷰(상)


[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고 있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성-긍정주의(sex-positive) 페미니즘과의 만남


디아나(내 친구):여성의 생식기를 가리키는 힘 있고 긍정적인 단어가 중요하대. 여자들이 성을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으로 발전시키려면. 예를 들어서 ‘처녀막’(hymen)은 순결과 명예를 연결시키는 억압의 의미로 쓰여 왔으니 대신에 ‘융선’(crest)이나 ‘왕관’(crown)이라는 용어를 쓰자고 하네. 그리고 ‘지스팟’(G-Spot)은 그걸 처음 이론화한 남성과학자 이름의 머리글자를 딴 거고, 그 이론에 잘못된 부분도 있으니까 이 책의 저자는 ‘기쁨의 평면’(Pleasure Plane, P-Plane)을 제안했어.


나:책이 전반적으로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해. ‘Viva la vida’(인생 만세)를 패러디한 ‘Viva la vulva’(보지 만세)가 슬로건이야. 그리고 여성 사정을 ‘황홀한 분출’(Gush of Ecstasy), ‘기쁨의 물줄기’(Stream of Joy)라고 당당히 써놓은 것도 기분 좋아. 40쪽에 보면 워크숍 안내가 나와 있네. 우리도 이걸 가지고 다음 시간에 실습을 해보자! 물론 프라이빗한 분위기를 만들어야지. 소수정예로 편안하게. 제목은 ‘우리가 되돌려 쏜다’(We Squirt Back!)래. 보지를 자세히 관찰하는 걸로 시작하는데, 준비물은 손거울, 라텍스 장갑, 윤활제야. (…)


작년에 우리 지역 페미니스트 모임에서 친구들과 2회에 걸쳐 ‘여성 사정 워크숍’을 함께 꾸린 적이 있다. 한 모임 멤버가 잔뜩 설레는 얼굴로 들고 온 책자가 발단이 되었다. 제목은 <황홀한 솟구침 - 여성 사정>이다. 여성 사정에 대한 대안적인 성교육 세미나를 듣고 거기서 교재로 썼던 홍보물을 들고 온 것이다. 우리 모임의 원래 목적은 페미니즘 텍스트 읽기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영화도 보고 축제나 집회에도 나가는 ‘행동파’들의 모임이었기에 여성 사정은 거부할 수 없는 ‘공부 거리’였다. 워크숍은 아주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고 이를 온 세상에 자랑하는 글도 발표했다. (관련기사: 페미니스트, 오르가슴을 말하다 http://ildaro.com/7683포르노그래피 말고 섹슈얼 판타지! http://ildaro.com/7702)


청소년기 내내 섹스는커녕 몇 달 연애해 본 게 전부인 모범생, 뭐든 글로 먼저 배우는 책벌레, 독실한 가톨릭 신자 어머니와 점잖은 공무원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발랑 까졌을까?’ 이 질문을 하면서도 나는 민망하기는커녕 짓궂은 미소가 입가에 번진다. 실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저마다 고유하고 역동적인 성감과 성욕, 성애, 성적 감수성과 지향을 갖고 있지만 이를 부정하고 억누르도록 사회화되었고, 이는 다른 삶의 영역에서 경험하는 부자유, 불만족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그러므로 자신의 섹슈얼리티 잠재력을 알고 표현할 수 있게 될 때 삶 전체가 더 자유로워지리라고.


이처럼 나는 섹스를 유달리 좋아하고 많이 해서라기 보다는, 그동안 내게 박탈되었던 것을 되찾는 탐험의 하나로 야해지기 시작했다. 안 되는 것인 줄, 나쁜 것인 줄 알고 살았던 세월이 아까워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글로 배우는 습관이 어디 가겠는가. 부지런히 읽고 듣고 말한다. 이번에는 우리가 보던 여성 사정 교과서의 집필자를 직접 찾아갔다.


언어학 박사이자 성교육자이고, 성 카운셀링과 페미니스트 포르노 문화기획도 겸하는 성-긍정주의(sex-positive) 페미니스트, 라우라 메릿 박사(Dr. Laura Meritt)를 만났다.


▶ 젊은 시절의 라우라 메릿. ⓒ출처: Polly Fannlaf


맑시스트에서 페미니스트로: 80년대 학생운동가의 전환


메릿 박사의 명함에는 이름 옆에 타이틀 세 개가 나란히 적혀 있다. 바로 성 전문가(Sexpertin), 커뮤니케이션 학자(Kommunikationswissenschaftlerin), 웃음 연구자(Lachforscherin). 분야를 넘나드는 활동력과 유머감각이 느껴진다.


메릿은 1960년생으로, 칼 마르크스의 고향으로 유명한 독일 트리어(Trier)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그곳 대학에서 독일학과 정치학을 전공했다. 1980년대 급진 좌파 대학생들이 으레 그랬듯, 라우라도 맑시즘에 열광했으며 항구 혁명을 외치는 트로츠키주의에 자기 사상을 동일시했다. 그러나 그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온갖 사회 혁명을 부르짖으면서 운동권 내 성차별에는 둔감한 남학생들이 활개치는 분위기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으니까. 앗,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긴데. 한국의 ‘운동권 출신 페미니스트’들의 사연과 흡사하다. 심지어 07학번인 나도 공감한다.


하리타: 어릴 때는 어떤 성향이었나요? 어떤 아이가 나중에 이런 카리스마 있는 퀴어 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라우라: 음, 호기심이 많았고… 허락되지 않은 것, 닫혀있는 문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남자형제에게 허용되는 게 나한테 안 될 때 불공평하다고 느끼고 바꾸고 싶어 했죠. 다른 도시를 여행하면서 우리 고향보다 여건이 나은지 의식적으로 살펴보기도 했어요. 청소년기에도 이미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을 이끌어갈 힘이 나한테 있다고 믿고 실험할 줄 알았던 것 같아요.


하리타: 그런 마음가짐이 밖으로도 표출이 됐나요? 담벼락에 그래피티로 “bitch”(나쁜 년)같은 걸 써서 10대 문화를 풍자한다든지.


라우라:십대 때는 겉보기에 잠잠했어요. 그래피티 시즌은 나중에 왔어요.(웃음) 십대 때는 구기 종목 스포츠를 많이 했고, 정치 활동은 대학 때 시작했어요. 고향에는 대놓고 마르크스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어른들이 많아서, 나도 대놓고 그 사람들과 대립했죠. 전공 수업의 일환으로 배웠던 경제학, 정치경제학 같은 것들도 다 좋아했어요. 이런 이론들을 통해서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네요. (옛날 생각을 떠올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온갖 급진적인 정치 활동을 하면서 남자애들이랑 사사건건 부딪쳤는데도 트로츠키는 한동안 굳게 믿었네요. 운동권 내에 성평등은 물론 없었어요. 여자로서 불이익이 컸기 때문에 거길 나와서 여성 그룹을 만들고, 녹색당에 가서 어울리거나, 정치 비판적 카바레(연극의 한 장르)를 무대에 올리면서 점점 더 페미니즘 쪽에서 활동을 하게 됐어요. 30년 전 이야기네요.


하리타:당시 지침이 됐던 여성운동가, 페미니스트 롤모델을 누구였나요?


라우라: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lexandtra Kollentai)가 영감을 많이 줬어요.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도 물론. 아니타 아우스푸르그(Anita Augsprug)와 리다 구스타바 헤이만(Lida Gustava Heyman)도 독일의 멋진 투사들이었어요.


▶ 아니타 아우스푸르그와 리다 구스타바 헤이만의 초상. 페미니스트, 코스모폴리탄, 생태주의자, 반-나치,제국주의자들로 알려진 유럽의 운동가들이다. 두 사람은 20세기 초반에 거의 반세기를 함께한 커플이기도 하다. 제2의 페미니즘 물결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다가 1970년대 후반에 재발견되었다. (사진 출처: https://monaliesa.wordpress.com)


라우라는 옛날 이야기하는 것을 어색해 했다. 수십 년 전이니 까마득하기도 하고 언제나 오늘, 지금 사회에서 파격적인 논쟁과 프로젝트를 이끌던 사람이라 그런가. 내게는 그녀의 과거가 궁금증을 일으켰다. 여기서 라우라가 언급한 녹색당은 초기 독일 녹색당이다. 좌우 막론하고 경제성장과 개발이 중요 가치였던 당시에는 진보적인 청년들에게 녹색당이 반전, 반개발, 반핵, 반가부장제를 아우르는 드문 정당 선택지였다. 1980년에 창당한 독일 녹색당은 환경, 젠더, 평화 이슈에서 모두 급진적인 노선이었고 여성들의 활약도 눈에 띄었다. 지금은 더 이상 마이너리티 정당이 아니며, 보수화되었다는 비판을 안팎에서 받는다. 독동에서 1990년에 결성된 ‘연합 90’(Bundes 90)과 기존 녹색당이 합쳐진 ‘Bundnis 90/Die Grunen’와, 녹색당원 일부가 갈라져 나와 만든 ‘대안 녹색’(Grune Alternative)으로 분리되어 있다.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들끓지만 마초적인 문화가 팽배하는 집단에는 있고 싶지 않았던 1980년대 청년 라우라가 녹색당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스치듯 잠깐 나왔지만, 내게는 절절히 공감 가는 대목이었다. 2000년대 청년 운동가였던 나의 경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대학 새내기 때 한국에서 모 진보 정당과 학생운동조직에 가입했던 나는 거기서 ‘귀여운 새내기’, ‘아직 어린데 참 똘똘한 친구’로 호명되고 회자되었다. 권위적인 언행과 술자리 개근 그리고 ‘나이’가 리더십의 기준인 듯한 그 곳에 금방 질려버렸다. 마침 당이 요란하게 분열되었고, ‘열심히 할 자신만 있으면 당의 인재가 되도록 키워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선배들은 ‘좌절감이 크다’며 뿔뿔이 흩어져 한동안 잠수를 탔다.


‘진보적이라는 정치 집단이 이러면 다른 곳은 대체 어떨까, 나랑은 정말 맞지 않는 곳이구나’ 하는 심정으로 소규모 학술모임을 하며 대학을 졸업했다. 비영리 부문 노동자로 일하던 중 녹색당이 출범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홍보물에 손으로 그린 귀여운 동물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고, 예전 독일 녹색당이 그랬듯 대표자 남녀동수제를 채택한다는 것에 마음이 동해 창당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환경 가치에 공감한 것은 물론이다. 당 모임에 나가 보니, 예전 자칭 진보정당이나 관련 조직에서 알던 인물들 중 ‘마초’ ‘꼰대’와 가장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이 다시 보였다. 그들도 나처럼 대안적인 선택지를 찾은 거였다.


한편, 라우라가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여성운동가라고 신중하게 추려낸 이름들을 추적해보면 그녀의 정치적 번민과 삶의 선택들을 조금은 알 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독일에서 주로 활동했던 마르크스주의 운동가다. 군대를 모아 문자 그대로 혁명을 일으켰고, 전투 중 물리적 폭력으로 인해 죽었다. 유럽 사회주의 운동판에서 이름이 크게 남은 인물로는 유일무이한 여성 지도자다. 마르크스에 이성적 설득을 넘어 정서적 애착까지 가졌던 라우라로서는 맑시즘을 쉽게 버릴 수 없었고, 다만 그 중 여성 롤모델은 꼭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콜론타이는 역시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 활동했던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가로, 정계에서 지도자 자리까지 오른, 드문 여성 롤모델이다. 소비에트 연방 행정부에 여성부를 세우고, 혁명을 통해 여성들의 결혼, 교육, 노동 현실도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체제는 남녀불평등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여전히 억압되고 착취당한다고 했다. 남성 운동가들이 그냥 ‘노동자 해방’을 외칠 때 ‘여성노동자’, ‘가사노동하는 여성’, ‘여성 지식인’ 층을 혁명의 주체로 논한 것이다. 또한, 기존 섹슈얼리티와 가족 개념을 해체해야 진정한 혁명이라고 믿었다. 사유재산 기반의 전통적 가족을 사회 기본 단위로 하지 말고, 남녀 모두 독립적인 주체로 결혼 없이 연애하고 섹스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를 돌보는 노동은 국가가 책임지고 부모는 양육에서 즐거움과 애착만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까지 했다.


이러한 주장은 비단 철학적 사유의 결과만이 아니라 콜론타이의 실제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녀는 배우자가 싫어서가 아니라 결혼생활 자체가 덫처럼 느껴져 이혼을 했고, 양육을 떠 앉은 상황에서 고민하다가 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스위스 취리히로 홀로 유학을 떠났다고 한다. 다른 남성 운동가들과 견주어 지지 않는 지성, 열정, 야심에도 불구하고 여자라서 번번이 걸려 넘어진 현실이 한 둘이었겠는가. 콜론타이가 자기 삶의 목소리를 글을 남긴 덕분에 나의 인터뷰이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 아닌지. 라우라는 결혼 없이 수십 년 간 독립된 레즈비언 여성으로서 비독점적 다자연애를 해왔고, 여성과 사회의 섹슈얼리티 해방을 위해 활동했다.


여성과 퀴어를 위한 유쾌한 공간, 베를린의 섹스문화살롱


학부 졸업 이후 라우라는 페미니스트 언어학에 매료되어 공부를 이어갔고, 고향 트리어에 있는 외국어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베를린 자유대학과 훔볼트대학 독일학, 문화학, 교육학을 강의했다. 2005년 ‘여성의 웃음’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전형적인 학자의 길을 가지 않고, 서브컬쳐 성향이 강한 섹스문화살롱 ‘섹스클루티비테튼’(Sexclutivitaten)을 열었다. 살롱의 이름은 ‘고급스러움’, ‘독점적인’, ‘유일무이한’과 같은 의미의 ‘Exclutivitat’과 ‘Sex’를 결합해 새로 만든 단어다. 이곳에선 다양한 섹스토이와 대안적인 문화콘텐츠를 구할 수 있다. 주기적으로 ‘여성 사정’, ‘페미니스트 포르노’, ‘애널 섹스를 위한 입 마사지’ 등을 주제로 한, 야하고 발칙하고 유머러스한 워크숍이 열린다. 학계의 경직된 형식과 언어만으로 섹슈얼리티 전복이 가능하겠는가. 솔직하고 유쾌한 실천을 통해서 성문화가 바뀐다. 라우라의 ‘다업종 커리어’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 섹스클루티비테튼(Sexclutivitaten) 홈페이지 메인 화면. 보지(vulva) 심볼이 아무렇지 않게 화면을 도배한 모습이 경쾌하다. ⓒ출처: https://sexclusivitaeten.de


인터뷰를 위해 직접 살롱을 찾았다. 대중교통에서 멀지 않은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표지판이 없고 초인종에는 살짝 다른 이름이 적혀있어 주소를 미리 알아야만 올 수 있다. 알고 보니 라우라 메릿의 살림집이기도 했다.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니 훈훈한 공기에 아늑한 집 냄새가 조금 난다. 현관 옆 거치대에 행사 리플릿과 포스터가 있다. 방 하나가 영구적으로 사무실 겸 섹스토이샵으로 꾸며져 있다. 구식 유리 장식장 안에 갖가지 섹스토이가 빼곡히 들어차있고, 옆 책장에는 섹슈얼리티 관련 단행본, 사진집, 그래픽 노블과 DVD가 꽂혀 있다. 보지 모양을 한 쿠션과 다양한 섹스 체위를 보여주는 꼭두각시 인형 같은 소품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큰 사무용 책상에 라우라와 아르바이트생 율라(Ulla)가 나란히 앉아서 일하고 있다. 길게 뻗은 부엌을 통해 거실에 가보니 벽에 큰 사진이 몇 점 걸려있다. 타투와 피어싱을 내보인 퀴어 커플이 섹스하는 장면들이다. 한 쪽 벽에 붙박이 책장이 있고 그 가운데 40인치 가량의 TV가 걸려있다. 인터뷰 이후에 정기 포르노 상영회가 있는데, 여기서 행사를 하나보다. 카펫 깔린 바닥에 여러 가지 소파와 쿠션, 의자가 방을 빙 둘러 놓여있다.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차를 내오고 일찍 온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두 사람이 다소 산만한 가운데 나는 질문을 건넸다.


하리타: 살림집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편안하네요. 이 공간은 얼마나 됐나요?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율라: (라우라가 대신 답해달라고 했다) 사무실이 아니라 집이라서 상담 받으러 온 사람들이 편안하게 느껴요. 이 공간을 처음 연 건 한 30년 쯤? 초기엔 일반적인 여성센터(Frauenzentrum; 동네마다 있는 복지센터)에 가까웠고, 라우라가 섹스토이를 담은 복대를 차고 독일 전역을 다니며 ‘모바일 샵’(mobile shop)을 할 때였대요. 그 때 여기서 Tapaware(가정에서 많이 쓰는 락앤락 용기)를 패러디한 ‘Fuckerware’ 라는 이름으로 기혼여성들을 초대하는 파티를 많이 열었대요.


하리타: 무엇을 하는 파티였나요?


라우라: 섹스토이를 소개하는 모임이에요. 남자들의 욕구에만 맞춘 섹스토이 산업의 역사를 설명하고, 토이의 모습과 재질을 살펴보면서 어디서 유래하고 어떻게 쓰였는지 논하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종교적 도구도 있었죠. 섹스토이에 대한 정보를 주면서 ‘더럽다’는 편견을 없애는 목적이 있었던, 일종의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 행사였어요. 그런 역사적 맥락을 먼저 보고 나서야 사용법이나 각각의 장단점을 알려줬죠. 참가한 여성분들 손에 토이를 건네면서요. 어떨 때는 실제로 사용해보는 시간도 마련했는데, ‘섹스 파티’라고 광고가 되니까 인기가 아주 많았어요.


▶ 금요일 저녁 살롱에서 행사 중인 모습. ‘Fuckerware’ 파티가 열리던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같은 자리를 지켜왔다. ⓒ라우라 메릿


하리타: 섹스토이를 들이는데 기준이 까다롭고, 웬만하면 독일에서 생산된 제품을 택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수십 년 이 일을 해왔으니 아는 사람도 많고, 이 업계에서 네트워크가 탄탄할 것 같은데요?


라우라: 그렇죠. 생산자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갖고 협력하는 걸 아주 중시해요. 제조업체에 직접 찾아가 봐요. 노동환경이 어떤지, 제작 과정이 어떤지 다 눈으로 직접 보는 거죠. 그렇게 출장다니는 게 언제나 즐거웠어요. 독일에 있는 생산자들과는 특히 네트워크가 잘 되어있으니까 서로 아이디어를 주고받기도 하고요. 윤리적인 제품, 여성들이 만든 제품을 지지하는 게 나한테 정말 중요해요.


“여성들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특별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다른 수많은 소수 젠더, 인터섹스와 트랜스섹슈얼 그리고 신체적 제한이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성적 즐거움을 탐구할 수 있어야 하죠. (…) 개인의 취향과 상황에 따라 섹스토이에 대한 선호가 다르므로 저는 베스트셀러 리스트를 만들거나 일방적인 추천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양한 섹스 실험을 해보고 자신감을 높일 수 있게 충분한 시간을 들여 상담합니다. 섹스토이를 구비하는 데는 질적, 미적, 윤리적 기준을 적용합니다. 노동자를 착취하는 환경에서 만들어졌거나 유해한 성분으로 된 제품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 건강 문제에 있어서는 지역 내과의사들과 협업합니다. 윤활제의 경우 특히 친환경, 유기농 성분인지, 피부에 편안한지 반드시 확인합니다. 포르노 컨텐츠 역시 미국 성전문가들과 논의해 교육적인 가치가 있는 것을 엄선합니다. (…)” - 섹스클루티비테튼 소개문 중


하리타: 살롱을 운영하면서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요?


라우라: 별로 없었어요. 항상 즐겁게 했으니까. 음, 유일하게 어려웠던 점은, 고객 층인 여성들이 내가 들여놓은 페니스(남자 성기) 모양 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 1980년대 시작 당시에 섹스토이는 주로 딜도였고 그 중에서도 페니스가 많았는데, 여성분들이 다른 형태를 보고 싶어했어요. 페니스는 예나 지금이나 문화적 상징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잖아요? 꼭 성적이지 않더라도 다양하게 변형되어서요. 말 그대로 페니스 사회에 살고 있는데 섹스토이로까지 봐야 되냐는 반응이었어요. 아주 공감 가는 얘기였죠.


그래서 딜도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오도록 생산자들과 얘기를 했어요. 그 중 한 가지가 돌고래 딜도예요. 돌고래(Dolphin, 어원은 Delphi)는 레즈비언들의 상징이고, 고래(whale) 역시 여성을 상징하죠. 배가 좀 나오고 둥글둥글 풍만한 몸매잖아요. 아무튼, 딜도 모양이 우리한테 항상 토론거리였어요. 우리 가게 진열장을 페니스 모양이 온통 점령하는 시기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페니스가 아예 안 보이기도 했죠. 지금은 페니스가 여러 가지 모양 중 하나가 됐어요.


▶ 섹스문화살롱 진열장에 놓인 각종 섹스토이들. ⓒ하리타


하리타: 페니스가 기본 값인 상징의 서열이 무너지고 나니, 비로소 여러 상징 중의 하나로서 다른 것들과 공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네요. 돌고래가 왜 레즈비언의 상징인지 더 설명해주세요.


라우라: 돌고래의 돌핀, 델피는 자궁을 상징해요.(Delphi; 유명한 예언자의 고향이었던 그리스의 마을 이름이었다. 그리스인들은 그 마을이 지구의 자궁이라고 믿었다 한다.) ‘내면의 지혜’라는 뜻도 있어요. 거기다 자궁이 여성의 성적 에너지 원천이라고 보면 긍정적인 의미가 되죠. 그래서 레즈비언들이 돌고래를 상징으로 써왔어요. 그리고 돌고래는 가령, 도끼 같이 공격적인 모습이 아니에요. 무척 영리한 동물이고, 떼를 지어 잘 다니고 장난기도 많아요. 돌고래는 누구나 좋아하는 대상이죠.


하리타: 저 역시 성폭력 피해 경험과 연관된 페니스 혐오증이 심했고, 지금도 페니스가 별로 달갑지 않아요. 저와 섹스하는 남성 파트너는 성기 삽입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되죠. 삽입섹스를 여러 가지 가능한 섹스 중 한 가지로 둘 때만이 즐거운 섹스가 가능하다고 믿어요. 그럼, 탄트라(tantra; 밀교 수행법)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라우라: 괜찮죠. 어떤 섹슈얼리티도 사실 다 괜찮아요. 그게 내 모토예요. 스스로를 섹스보다 중요한 존재로 여길 수만 있다면, SM(사도 마조히즘)이든 탄트라든 무성애든 뭐 어떤가. 행위자 간에 동의가 전제된 것이라면 다 좋아요.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도시에서 자급자족 실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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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화공방, 그 어려운 이름

[이민영의 도시에서 자급자족 실험기] ‘거긴 뭐하는 곳이야?’


※ 필자 이민영님이 목공을 배우고 적정기술을 익히며, 동료들과 함께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도시를 꿈꾸면서 일상을 제작해나가는 과정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명함은 가면 같다. 명함을 내밀면 만화영화 속 주인공이 의상을 갈아입고 변신하듯 명함에 적혀 있는 소속과 직함에 빙의돼 역할놀이에 빠진다. 내 안의 수많은 나 중 하나를 꺼내는 일이니 그 가면을 쓴 사람이 나인 건 분명하지만, 어떨 때는 늘 쓰고 있는 가면만 꺼내게 되는 상황이 답답하기도 하다. 오롯이 한 명의 인격체가 아닌 한 역할의 수행자로만 인식될 수밖에 없는 실상이 서글플 때도 있다. 하지만 가장 빠르면서도 편하게 타인과의 대화에 물꼬를 트는 방법 중 하나가 명함이기에, 사람들은 명함을 애용하나 보다.


나 역시 나의 지난 한 해를 소개할 때면, 작년의 나를 수월하게 설명해 줄 명함을 꺼내게 된다. 그 명함에는 ‘비전화공방’이라는 단어가 빠질 수 없고, 비전화공방을 설명하려면 ‘후지무라 야스유키’라는 사람에 대해 말해야 한다.


▶ 후지무라 야스유키. 그를 비전화제작자들은 센세라 부른다. ⓒ비전화공방서울


후지무라 야스유키는 오사카 대학에서 기초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고마쓰(KOMATSU)라는 중장비 회사에서 십여 년 간 개발직으로 일한 공학도였다. 천식을 앓는 자녀를 위해 공기청정기를 개발한 일을 계기로 미래 세대의 건강과 환경을 고려한 수백여 개의 제품을 개발하게 되었다. 이후 이를 집대성하고 전환적 삶을 알리며 유사한 지향을 바라는 사람들을 초대하는 곳이 바로 비전화공방(非電化工房)이다. 비전화공방은 그가 거주하는 집이자 실험실이자 작업장이자 접대실로, 현재 일본 도치키현 나스에 위치하고 있다. (관련 기사: ‘전기 없는 공방’을 찾아 http://ildaro.com/5038)


‘삶을 전환하는 손과 머리와 동료를 구해요’


비전화공방을 한자어로 풀면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공방’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데, 실상 비전화공방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일을 살펴보면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중요한 걸 빠트렸다는 아쉬움이 강하게 남는다. 물론 비전화공방에서는 전기와 화학물질을 제대로 알고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것들 없이도 풍요롭고 아름답게 살 수 있는 대안을 찾는 방법을 익힌다. 하지만 이런 기술을 습득하는 까닭은 단순히 기술의 필요나 효용 때문이 아니다.


간단하게는 전기나 화학물질 없이도 살 수 있는 또 다른 삶의 선택지를 만들기 위해서이고, 구체적으로는 지역이라는 삶의 터전에서 지속적으로 순환하는 삶의 방식을 만들려면 적정 수준의 기술에 대한 이해와 실력을 갖춰야하기 때문이다. 자립할 수 있는 삶으로 전환하기 위해 가치와 철학을 배우고 동료를 만드는 것처럼 기술 또한 자급에 다가가는 방식 중 하나다.


▶ 일본 도치키현 나스에 위치한 비전화공방(非電化工房) 전경  ⓒ비전화공방서울


오랜 불황과 정체를 겪은 일본에서 후지무라 야스유키가 문명의 전환기를 맞이한 현대 사회에 제안하는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은 많은 호응을 얻었다.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한국에서 그의 가치를 눈여겨 본 박원순 서울시장의 요청으로 비전화공방서울은 2017년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 있는 서울혁신파크에 자리 잡게 된다.


비전화제작자 양성 과정은 비전화공방서울의 주요 사업 중 하나다. 바라는 삶을 살아내고자 하는 청년들이 1년 간 후지무라 야스유키(이하 센세. 일본어로 선생님이라는 뜻으로 비전화제작자들은 그를 센세라 부른다)의 지도하에 그의 철학과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이다. 자급자족 역량을 높이고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데 그 폭이 농사부터 목공, 요리, 건축, 에너지, 철학까지 방대하다. 내가 비전화공방과 만난 방식이 바로 이 비전화제작자 양성 과정이다.


그 동안 농사를 배울 수 있는 곳도 많고, 건축을 해볼 수 있는 곳도 많은데 왜 굳이 비전화공방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물론 그 전에 나 역시 이런저런 삶을 꾸릴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주는 기관이나 단체, 프로그램을 제법 알고 있었다. 하지만 취직을 하거나 여가를 즐기는 것이 아닌, 일상을 만드는 방편으로서 기술을 종합적으로 주5일 꼬박 1년 동안 동일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체화할 수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당장 귀촌할 것도, 전직할 것도 그렇다고 취미로 즐기는 것도 아닌, 어떻게 삶을 바꿔나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중심에 두고 그 방편으로 기술에 접근하는 관점이 마음에 들었다.


▶ 센세의 강의. 그는 자상하고 친절하며 단호한 스승이다. ⓒ비전화공방서울


일상을 전환하는 방법을 ‘몸으로 궁리’한 1년


입에 잘 붙지 않는 일본식 단어인 ‘비전화’제작자로서 사는 한 달은, 한 주간 센세와 집중적으로 수행을 하고 다른 3주는 센세가 내준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센세와 함께 하는 일주일은 강의를 듣거나 3주간 해놓은 과제를 검토하고 그 결과물을 보며 수정할 점을 점검하고, 다음 과제를 어떻게 설정할지를 협의한다. 나머지 주차의 일주일은 ‘한 주 열기’로 시작하고 ‘한 주 닫기’로 문을 닫는다. 한 주 열기에서는 이번 주는 어떤 일을 함께 할지 협의하고, 한 주 닫기에는 이번 주 무엇을 수행하고 배웠으며 느꼈는지 소회를 나눈다. 제작자들이 서로의 상태를 파악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이 시간 외에도 수시로 사안들을 논의하는 자리를 갖는다. 센세의 과제에 따라 매주 주로 하는 일이 달라지는데, 농사, 목공, 건축 등 각 분야 별 세세하게 방법을 알려주는 선생님들이 따로 계신다. 농사의 경우 절기에 따라 하는 일이 바뀌고, 목공이나 건축은 과업 진행 정도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다. 큰 방향은 센세가 정하되, 분야별 선생님 나름대로의 과정과 가르침에 따라 비전화제작자가 협동 학습하는 방식을 취한다. 매달 보고서와 에세이를 써서 각자의 진도를 점검한다.


▶ 1년간의 비전화공방서울 수행 일정표 ⓒ비전화공방서울


19세부터 38세까지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지만 경험도 기대도 각기 다른 12명의 비전화제작자 중 한 명으로 비전화공방서울에서 매일을 한 해 살았다. 정식 학위가 주어지는 것도 아닌데 비전화제작자로의 1년이 불안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제법 받았다. 겨우 1년을 살았는데, 비전화공방은 어떤 곳이냐고 내게 묻는 이도 많았다. 고약한 심보겠지만 난 그 질문이 ‘너 요새 뭐하니’처럼 추상적이고 무성의하단 생각이 든다. 나의 안부와 상황을 신경 쓰고 궁금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간편한 인사치레거나 갑작스레 떠오른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혹은 자신의 넓고 얕은 지식을 뽐내기 위한 수단이랄까. 


정말 나의 지난 1년 간 비전화공방서울에서의 생활을 듣고 싶어 하는 이가 있다면 먼저 찻물을 끓이고 숨을 고른 뒤 차분히 전하고 싶다. 1년 간 시시때때로 바뀌었던 나와 나의 상념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단어를 가려 집어본다면 조금은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쑥스럽지만 나 역시 아직은 비전화공방이 무엇이고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는 밑밥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종전 약속

코첼라 페스티벌 최초의 ‘흑인 여성’ 헤드라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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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욘세 앞세운 코첼라 페스티벌에서도 성추행 사건이…

[블럭의 팝 페미니즘] 코첼라 최초의 ‘흑인 여성’ 헤드라이너


※ 메인스트림 팝 음악과 페미니즘 사이의 관계를 얘기하면서, 우리가 일상에서, 대중문화 사이에서 페미니즘을 드러내고 실천으로 이을 가능성까지 찾아보고자 합니다. [필자 블럭]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얼마 전, 세계 최대 음악축제 중 하나인 코첼라 페스티벌(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이 열렸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코첼라 밸리에서 열리는 대형 음악 페스티벌로, 1999년에 처음 열렸으며 지금까지 꾸준히 규모를 늘려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았다. 해마다 20만 명에 육박하는 이들이 축제에 몰려든다. 지금까지 뛰어난 라인업 구성은 물론 투팍(2Pac)의 홀로그램 무대까지 다양한 시도와 무대 연출을 보여줬다.


코첼라는 처음에는 록 페스티벌이었다. 백인, 밴드 위주의 록 음악에서 변화를 가져온 건, 2008년 프린스(Prince)와 2010년 제이지(JAY-Z)가 헤드라이너로 등장하면서부터다. 페스티벌에서 인종의 벽을 먼저 깬 것은 장르의 벽을 무너뜨린 전설 프린스였고, 래퍼가 솔로로 헤드라이너를 맡게 된 것은 제이지가 처음이었다.


이후 라인업의 음악이 조금씩 바뀌었고, 장르의 벽은 빠르게 허물어졌다. 세계적인 디제이 중에서도 높은 음악성과 흥행의 성격 모두 갖추고 있다면, 코첼라 페스티벌 무대에 서는 것은 물론 헤드라이너로서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유명한 디제이 중에는 캘빈 해리스(Calvin Harris)가 헤드라이너로 선 바 있다.


▲ 올해 4월 열린 코첼라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 명단. (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달랐다. 헤드라이너 명단에 밴드가 없는 첫 번째 해가 되었다. 위켄드(The Weeknd), 비욘세(Beyonce), 에미넴(Eminem) 모두 랩, 알앤비 범주에 있는 음악가다. 특히 비욘세는 흑인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코첼라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이너로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지난 20년 가까이 여성 헤드라이너는 뷰욕(Bjork)과 레이디 가가(Lady Gaga) 단 두 명에 불과했다. 그만큼 비욘세의 등장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컸다.


코첼라 첫 ‘흑인 여성’ 헤드라이너로 공연한 비욘세


비욘세는 이날 자신의 에너지와 음악가로서의 역사와 맥락, 그리고 예술적 역량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각종 매체의 찬사를 받았다. 이번 비욘세 무대에서 가장 토대가 된 것은 흑인 대학 문화다. 에너지 넘치는 단체 군무, 화려한 응원 문화와 고고, 가스펠 등 문화적 자산이 되는 넘버를 일종의 응원가나 앤썸(anthem)처럼 사용하는 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러한 성격은 대학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의상에서도 잘 드러났다.


여기에 비욘세는 자신의 고향인 휴스턴 특유의 ‘찹드 앤 스크류드’(chopped & screwed, 기존의 곡을 느리게 늘리고 피치를 낮추는 방식) 스타일을 기존 음악 곳곳에 새롭게 녹여냈다. 동시에 다양한 아프로(Afro) 리듬과 최근의 경향인 자메이카의 댄스홀 음악까지 담아서 최근 흑인 문화의 정수를 보여줬다.


여기에 자신의 남편이자 먼저 코첼라 헤드라이너를 경험한 바 있는 래퍼 제이지, 그리고 동생이자 멋진 인디 뮤지션인 솔란지(Solange)는 물론, 이전에 함께 그룹을 했던 데스티니스 차일드(Destiny’s Child)가 오랜만에 재결합하여 무대 위에 섰다. 데스티니스 차일드는 지금의 비욘세가 있기까지 바탕이 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3인조 걸그룹이다. 비욘세는 데스티니스 차일드의 등장 전, 시스터후드(자매애)에 관한 테드 강연 중 일부를 들려주기도 했다.


게다가 곳곳에 급진적 흑인 민권운동가였던 말콤 엑스(Malcom X),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재즈 보컬 중 한 명이자 흑인 민권운동에 힘썼던 니나 시몬(Nina Simone)의 목소리를 더하여 무대의 의미를 완전하게 채웠다. 두 시간 가까이 선보인 공연의 의상은 하이엔드 브랜드인 발망(Balmain)의 디자이너 올리비에 루스테잉(Olivier Rousteing)이 맡았다는 점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비욘세의 무대는 이처럼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완성도를 보였으며, 소셜네트워크에서는 #Beychella(Beyonce의 Coachella라는 의미)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했고, 많은 언론이 이 무대를 따로 보도할 정도로 특별했다.

▲ 소셜네트워크에서는 #Beychella(Beyonce의 Coachella라는 의미)라는 해시태그가 등장했다.


비욘세 무대 아래도 성폭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나 비욘세가 헤드라이너로 섰음에도, 무대 아래에서는 고질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비욘세가 코첼라 무대를 통해 전 세계 수많은 유색인종과 여성들에게 감동의 메시지를 주는 동안, 그 현장에서도 성추행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여전히 대형 페스티벌 내에서 성폭력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구조적인 차원에서 개선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부분이다. 여전히 여성들은 페스티벌을 즐기기 위해 친구들과 같이 움직여야 한다. 설령 친구들과 같이 있더라도 사람이 많은, 밝은 곳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 아니, 사실 그렇지도 않다. 수많은 인파 속 사람과 사람이 가까운 틈을 타 뒤에서 엉덩이를 만진다거나 가슴을 만지는 등 성추행을 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행복할 것 같은 음악축제에 와서도 여성들은 끊임없이 불편을 겪는다.


시카고 트리뷴(Chicago Tribune)은 2017년에 미국 주요 페스티벌에 다녀온 5백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기사로 실은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페스티벌에 가본 미국여성 중 92%가 성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애초에 성추행이 가능한 환경이라는 것. 즐겁고 행복해지기 위해 티켓을 사서 들어온 곳에서 성추행을 겪는다는 것은 몹시 화가 나는 일이다. 틴 보그(Teen Vogue)는 피해자 증언 다수를 기록하여 공개하기도 했다.


영국 레딩 페스티벌에서는 즐거운 축제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강간범 두 명이 현행범으로 체포되기도 했다. 스웨덴 최대 음악 축제인 브라발라 페스티벌에서는 네 건의 성폭행, 스무 건에 달하는 성추행 사건이 신고되어 결국 행사를 취소하기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해를 거듭할수록 페스티벌의 수는 많아지고 그 규모도 커지지만, 늘어나는 수익만 고려할 뿐 안전한 페스티벌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는 축제 측의 문제도 남아 있다. 축제의 무대 위를 의미 있게 만들어가는 만큼, 무대 아래 현실도 정면으로 직시하고 여성들의 경험과 요구를 경청해야 한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여자/남자다운 행실’도 업무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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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들의 ‘젠더 노동’

[성소수자, 나도 취준生이다]③ 성별 역할이 능력?


성소수자 청년들의 취업과 노동을 이야기하려 한다. 소위 ‘일반’ 청년들의 노동에 있어 접점과 간극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모두 헬조선이라 불리는 사회를 살아가는 20~30대지만, ‘청년’이라는 이름으로만 묶일 수는 없다. 취업 키워드를 통해 성소수자들과 비성소수자들의 삶을 살폈다. 그렇게 찾아낸 공통분모들이 우리 시대의 청년노동에 대해 말해줄 것이라 믿는다. [기록노동자 희정]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직무에서 기대되는 목소리


콜센터 직원 마늘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마늘에게는 주민등록번호 ‘1’이 꼬리표처럼 붙는다. 자신을 남자로도 여자로도 규정하지 않지만(젠더 퀴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남자다. 국가가 정하고 법이 정했다. 주민등록상의 성별과 본인의 성별이 일치하지 않은 까닭에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다가 콜센터에 취직하게 됐다.


“콜센터 교육 때 사람들이 저를 여성으로 알고 있었는데, 강사가 와서 숫자를 세니까 남성이 하나 비는 거예요. 숫자를 계속 세시는데. 나중에 남자들 다 포기하고, 하나 남아 있다고 기록에 나와 있는데. 아무리 봐도 남자는 없고 ㅎㅎ” (마늘, 20대, 비수도권 거주, 젠더퀴어, 퀘스쳐너리, 현재 학생)


마늘은 취업 후 자유로이 치마를 입고 화장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남자화장실을 사용해야 하고, 콜센터 기록에는 ‘남자 직원’으로 표시됐다. 그럼에도 마늘은 마늘로 출근했다.


마늘은 제 자신으로 출근했으나, 그곳에도 남자/여자는 있었다.


“저는 ‘1’로 등록되어 있으니까. 너는 남자니까 콜 받을 때 중저음 신뢰감 있는 목소리로 해야 한다고 하는데. 저는 그게 되게 어렵거든요. 전화 받을 때는 목소리가 한 톤 더 올라가요. 고객들도 다 여자인줄 알고 아가씨, 하고요. 그런데 교육 때 매번 평가에서 ‘목소리에 신뢰감이 묻어나지 않는다’ 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마늘의 외양을 문제 삼지 않았던 회사는 목소리에는 성별을 부여했다. 수화기 너머 외모는 보이지 않으나, 목소리에는 기대되는 성별이 있다.


“여자는 친절하고 상냥하게 웃어주는 목소리. 남자는 단호하면서도 신뢰감 있는 목소리. 그런 음성의 톤이 정해져 있어요.”


신뢰감의 근원


‘남성=신뢰, 여성=친절’이라는 고정된 성별 역할(분업)은 회사의 욕심만은 아니었다.


“특정(진상) 고객들이 있어요. 콜 받는 직원들은 다 알 정도로 특이한 고객들. 그런 분들이 전화 오면 일부러 목소리 깔고 받죠. 상담원이 남성 목소리면 고객들이 클레임을 못 거는 경우가 많아요. 클레임을 걸더라도 수위가 낮아진다던지.”


‘신뢰감’은 연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듣는 사람이 신뢰를 수용해야 한다. 30년을 남성 역할을 수행하다가 트랜지션(성전환)한 케이트 본스타인은 말했다. “남자와 여자가 받는 취급의 차이는 분명 있다.” 남녀 위치에 모두 있어 본 사람의 이야기다.


<나는 꽤 여러 가지 세일즈 일을 해 봐서 어떻게 설득해야 구매하게 되는지 안다. 물론 남자로 일할 때 얘기다. 여성이 되어 일했을 때 고객들은 나의 ‘전문가 의견’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어머나 저보다 훨씬 더 잘 아시네요, 존슨 씨.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라고 묻는 수밖에 없었다.>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


“취급의 차이는 전혀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취급의 차이는 ‘능력’으로 분류된다. 콜센터 대부분 남성 직원들은 업무 평가가 좋다. 회사 또한 마늘이 주민등록번호와 동일한 ‘남성’으로 있어주길 바랐다. “남자가 귀하거든요.” 입사동기 중 교육을 수료한 ‘남자’는 마늘 하나다.


앨리 러셀 혹실드는 『감정노동』에서 감정노동 일터에 여성이 몰리는 이유를 남성에 비해 낮은 지위 때문이라 지적한다. 콜센터에 남성이 드문 이유이기도 하다. 콜센터의 낮은 임금과 사회적 지위(“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두려울 것 없이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고객 불만 접수처”로 존재)는 남성이 감당할 종류가 아니다. 감당해야 한다고 배워온 일이 다르다. 남녀 평균 임금이 다르다. 결국 남성들은 교육을 이수하지 못하고(않고) 떠난다.


미국과 유럽 국가에서도 감정노동 일자리는 여성의 것이었다. ‘글로벌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집어삼키며 서구의 감정노동 일터는 여성 이주노동자로 빠르게 대체됐다. 이후 전지구화는 유럽과 미국의 콜센터를 인도나 필리핀 등 제3세계 국가로 아웃소싱하는 방식으로 ‘진화’해버린다. 낯선 억양과 발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들에겐 더 큰 장점이 있었다. 저렴한 노동값.

▲ 노동시장에서 성별에 기대되는 역할도, 비용도 다르다


후려치기 당하는 여성노동


비용과 성별은 언제나 같이 간다. “값싼 노동력의 거대 저장소”(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로 인식되는 제3세계. 이들 국가로 진출할 때 국제기업이 고려하는 것 중 하나가 ‘여성차별 정도’라는 얘기가 있다. 여성차별이 심하다는 것은 ‘여자 있을 자리는 가정’이라는 논리가 더 강하다는 것. 집밖 여성노동은 부차적으로 여겨지기 쉽다. 그럴 경우 가격 ‘후려치기’가 가능하다.


게다가 노동 자체는 무성(無性)이라는 환상과는 다르게, 섹슈얼리티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국제 자본 진출이 시작된 제3세계 공장의 노동력은 (한국이 그러했듯) 대부분 ‘나이 어린 하층 계층 여성’이다. 이는 “외국 자본을 끌어오기 위한 유인 전략”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에게 덮어씌워진 수동적인 이미지는 고분고분한 노동자로 이어진다. 거기에 더해 (외국 투자자님들 보시기에) “이국적 섹슈얼리티까지 지닌 모습으로 선전된다.”(김현미 외, 「성별화된 시공간적 노동 개념과 한국 여성노동의 유연화」)


간혹 자본이 성별 고정을 극복해내는 순간도 있다. 정확한 정보 전달이 생명인 콜센터가 ‘비용’을 이유로 불명확한 이국 발음을 수용하듯 말이다. 콜센터의 메카라는 필리핀에서는 트랜스젠더 고용을 환영한다고 한다. 발달한 인권의식 때문이 아니다. 여/남 목소리를 모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노동력으로 여러 효과를 노리는 비용절감. 노동 유연화의 최고봉적 선택이다.


성별에 요구되는 것들


마늘도 때론 여/남 성별 목소리를 모두 활용한다. 신뢰감이 있다고 믿어지는 ‘남성’ 목소리로 나타나 진상 고객들을 무찌른다. 콜센터 회사는 마늘의 외모에 관심 없다. 다만 마늘이 남성으로 있길 바란다. 남자가 귀하다. 손자 사랑은 할머니 치마폭에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마늘은 콜센터 업무평가가 나름 공정하다고 말해왔다. 고객들이 외양을 보고 편견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정하다는 평가에도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이 녹아들어 있다. 마늘도 안다. 객관적으로 보려 한다. 때론 활용한다.

 

“저는 저 나름대로 삶을 살 거고. 상황에 맞게 저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제가 성소수자라서 그렇게 산다기보다,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갈 거라 생각해요. 다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꿔 나가지 않나요?”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이유는 “각각의 성별에 기대되는 것이 너무 명확하게 나눠져 있기” 때문이라 했다. 반을 딱 쪼개 남자, 여자가 있다. 마늘만이 아니다. 우리 또한 각각의 성별에 요구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다. 여자아이는 분홍. 남자아이는 파랑으로 자라왔다. 남자아이는 탑에서 공주를 구하고, 여자아이는 구두를 신고 왕자랑 춤춰야 한다.


▲ 성별 질서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은 점수가 깎인다. (출처: 전국퀴어모여라 클레이카드)


‘여자/남자다운 행실’도 업무능력


이토록 명확한 성별 질서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은 초조해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0년에 조사한 「성소수자 차별 사례집」을 보면 이런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인터뷰이 한 명은 승진에서 탈락하는 자신을 이렇게 납득시켰다. “여성스럽지 않은 태도나 말투, 외양들이 상사에게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하지 않아도, 이미 ‘여성다움’ 상실에서 점수가 깎인다.


게이라고 정체성을 밝힌 이는 승진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리 말했다. “결혼하지 않으면 책임감이 있다고 인정받지 못 한다.” 우리가 살면서 눈치 챈 것처럼 ‘결혼 여부’와 ‘여자/남자다운 행실’도 업무능력 평가에 들어간다.


어느 일터든 직원들이 업무를 하며 성별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길 요구한다. 그것이 능력이라 치부된다. 무성(無性)이든 멀티젠더이든 상관없다. 지정성별(태어남과 동시에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지정받은 생물학적 성별)에 따른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에이섹슈얼(타인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거나 현저하게 낮은 경우)이라고 말하는 지연은 2차 하청 부품공장에 다닌다. 거기서 ‘그녀’는 그저 여자다. “여자도 완전 여자죠.” 그리고 짧게 덧붙인다. “그렇지 않으면 일이 안 돼요.” 원청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는 2차업체에서 지연의 능력은 ‘여자’였다.


“일하다 보면 라인(컨베이어 벨트)이 서요. 우리 (하청업체) 잘못 때문에 설 때도 있죠. 라인이 잠시만 멈춰도 업체가 배상해야 하는 손해가 몇 백 만원이에요. 원청에 보고가 올라가면. 그런데 보고를 올리는 게 정규직(관리자)이니까. 그 사람이 말만 잘 하면 멈춘 게 또 없어지는 거예요.”


라인이 멈추면, 정규직 관리자랑 친하게 지내던 하청직원들이 움직인다. 이들은 여자다. 업체에서 가장 어린 지연도 (표현대로라면) “끌고 간다”. 웃어주고 비위 맞춰주고, 그러고 나면 라인 멈춘 것이 없던 일이 된다. 하청업체 여성들은 능력을 그렇게 인정받는다고 했다. 커밍아웃도 하지 않았지만, 해봤자 지연은 자신이 여자일 뿐일 거라 했다. “누가 이해하겠어요? 제 정체성을.” 여자가 활용해야 하는 능력을 선배들로부터 강제 학습 중이다.


그런데 그 능력을 인정받아봤자, 불안한 하청업체 인생에 달라지는 것도 없다. 경기가 어렵다 싶으면 폐업(동시에 해고)이다. 새로운 직장을 구할 때 여성들은 ‘그 능력’을 가지고 누구와 경쟁할 수도 없다. 남성 노동자와 대적할 것은 더욱 아니다. 지연의 표현을 또 빌리자면 “지게차 운전하는 게 차라리 스펙이다.”


여자냄새 지우기


입사 7년차, 조나단은 대리 직책쯤 달았다. 그 연차 동료들처럼 회사 내에서 요구받는 역할이 많다. 그래서 여자를 사랑하기에 “(법 테두리 안) 결혼을 하지 못하고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점이 업무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경력단절이 없다.(달리 말해, 회사가 언제든 일을 시킬 수 있는 단절 없는 ‘노동력’이 된다.) 가정과 회사 이중노동에 갈등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여성들. 조나단은 혼란을 겪을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다. 그 박탈이 연봉협상을 이롭게 한다.


초등학교 교사인 준현은 결혼이라는 안전지대가 없기에 더욱 승진에 목매는 동료 게이들을 언급했다. 정작 본인은 승진 욕심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남교사’는 사십 줄이 넘으면 환영받지 못한다. 이것이 걱정이다. 젊을 때는 선호되지만, 나이가 들면 학교도 학부모도 원하지 않는다. ‘왜 아직도 평교사나 하고 있어?’ 여자교사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평가 잣대가 남성교사에게 가해진다.


남자교사들이 인생 자체를 저평가 당하지 않기 위해 취할 방법 중 하나. 그 나이가 되도록 평교사로 머물지 않는 것. 승진에 연연하게 된다. 알다시피 여성은 그런 평가를 받지도 못한다. 여성에게 승진, 능력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는 사회분위기는 ‘유리천장’으로 이어진다.


‘여성성’을 내려놓고(전희경은 『오빠는 필요 없다』에서 ‘여자 냄새 지우기’라 표현했다.) 남성들의 질서에 들어가야만 능력을 인정받는다. 여성성은 우위의 자산이 되지 못한다. 남성은 여성의 일이라 통념화된 노동(돌봄/감정 노동 등)에 종사할 경우 가혹한 평가를 받는다. 그것을 뒤집을 방법은 ‘남자들의 방식으로’ 경쟁하는 것이다. 경쟁과 성취를 통해 ‘사회적 남성성’을 확인시켜야 한다.


▲ 2015년 5월 16일 서울역 광장.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공동행동’ 문화제.  (사진: 김예지)


해와 달의 순서


‘여자냄새가 나는’ 마늘의 여자동료들은 교육장에서 배운 대로 고객에게 ‘친절’하지만, 결국은 “높은 사람 바꿔” 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쯤 되면 한탄이 나온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 역사가 몇 년인데, 이토록 저평가 당해야 하는가. 취업문 통과를 앞둔 20대는 더 격한 비명을 지른다. “남자인 게 스펙이죠.”


<남자가 4명이고 여자가 1명 뽑히는 이런 구조였어요. (…) 남성은 남성인 게 스펙이죠. 그거는 만고불변의 진리인 듯. 진짜 면접 다른 데를 가도 뭔가 여자는 생색 구색 맞추기용으로. 만약에 백 명을 면접 보면 남자는 구십에, 여자는 열 명밖에 안되고 사실 여자는 거의 뽑지 않는 그런 데가 많았고.> -정책토론회 「청년노동, 말하는 대로- 여성들의 일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여성민우회, 2015년 10월 29일


취업 후도 마찬가지다. 승진에서 뒤쳐진다. 성별 임금격차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육아가 시작되면 고난의 행군이다. 월급 36.7% 더 받고, 앞서 승진하고, 육아노동을 피할 기회가 많은 남성들의 인생도 그리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헬조선의 노동기계들이다. 일주일에 반 이상 야근을 하고, OECD 국가 중 멕시코 노동자들과 노동시간 1, 2위를 다툰다. 어쩌면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가 맞는지 모르겠다. 아담에게는 땀 흘려 노동하는 고통을 주고 이브에게는 임신하는 고통을 주었다고 했다. 여기서 공감 가는 부분은 ‘고통’이다.


아담과 이브가 받은 고통은 땀 흘리거나 피 흘려야 하는 데 있지 않다. 세상을 아담과 이브로 나누고, ‘아담은’ ‘이브는’ 하며 성별에 따른 역할을 나눠 고정시켜버린 그때, 고통이 탄생했다. 성차별은 세상에 아담(남)과 이브(여)밖에 없다는 성별 이분법과 같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성차별은 성별 간의 권력이 달라서 벌어지는 일이다. 남과 여, 우리는 이 단어가 동전의 앞뒤 면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흔히 동전의 양면 같다고 여겨지는 단어들. 앞과 뒤, 해와 달, 빛과 어둠, 희망과 절망, 부자와 거지, 왕과 왕비, 그리고 남자와 여자. 우리는 이 대칭 단어들 중 어느 것을 앞에 놓아야 하는지 바로 판단할 수 있다. ‘뒤와 앞’은 어색하다. ‘남자와 여자’ 순서는 현실에서 남자 초등학생 ㄱ씨가 1번을 배정받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자학생은 15번부터다. 그게 승진 순서가 되고, 사회적 지위가 된다.


세상이 둘로 나누어졌다는 이분법은 a와 b의 만남이 아니다. a와 a 아닌 것의 조합일 뿐이다. a는 앞에 온다. 정확히는 a가 a 아닌 것을 뒤로 보낼 수 있다. “a가 아닌 것을 사용하고 배치하고 규정할 수 있는 a의 권력”(정희진, 『양성평등을 반대한다』)이 존재한다.


그러나 수십 종의 크레파스는 어느 색을 맨 앞에 놓아야 하는가. 서가에 수없이 꽂힌 서적 중 어느 책을 앞에 두아야 하는가. 앞선 경우처럼 손쉽게 정할 수 없다. 앞에 있을 권력도, 뒤에 놓을 권력도 없다. 권력이 차이를 만들 필요도 없다.


두 가지 선택과 수많은 배제


세상이 남과 여, 그것도 남자가 자동으로 앞에 오는 이분법에 푹 빠진 탓에 뒤에 오는 ‘여자’의 노동은 중심에 설 수 없다. 이 사회는 남자가 ‘스펙’인 게 맞다. “여자가 어디 감히”라는 말은 여자 있을 곳을 알려준다.


그러나 노동시장은 여자들을 아예 내몰 지도 않는다. 여성노동의 역할 중 하나는 대규모 ‘산업예비군’(실업군이자 예비노동력)으로의 기능이다. 이는 전체 노동값을 하락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다. “너 말고 일할 사람 많아” 같은 것 말이다.


동시에 국가에게는 여성이 가정에 머무는 일은 중요하다. 여성의 몸은 출산율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 여겨져 왔다.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드는 일을 정부기관(행정자치부)이 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게 없다.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시절부터 국가는 출산 통제에 들어갔다. 여자는 가정에도, 일터에도 어디에나 존재해야 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 가정 내 여성의 재생산(돌봄, 출산, 양육)은 공짜 노동이다.


여자들은 애 낳는 틈틈이 노동값 36.7%가 사라지는 마술을 부리는 직장으로 간다. 그곳에는 여자와 남자가 있다. 아니 여자와 남자만 있다. 다른 크레파스 색들은 보이지 않는다. 다채로운 선택지들은 취업조차 허락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존재를 숨겨 당신의 옆자리에 있을 수도. ‘퀴어’로서 가지고 있는 주황, 보라, 노랑의 언어를 버리고 세상이 가진 언어를 쓰며 존재를 지웠다 썼다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자가 어디에서도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행성, 그 같은 자리에서 성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지우고 지워지는 경험을 한다. (※ 기사에 등장하는 이름 중 일부는 가명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자행되는 여성성기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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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성성기훼손(FGM) 피해자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빈투 보장①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에서 제작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이며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나는 여성성기훼손 피해자다”(I am a victim of Female Genital Mutilation) 편의 주인공은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독일로 망명한 20대 초반의 여성입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자행되는 여성성기훼손


내 이름은 빈투 보장(Bintou Bojang)이다. 나는 17살의 나이에 감비아에서 독일로 망명을 왔다. 여기 온지는 3년째다. 내게는 독일에서 태어난 두 살짜리 아들이 있다. 내가 감비아에서 피난을 온 것은 가족 문제 때문이었다.


나는 FGM이라고 알려진 여성성기훼손(Female Genital Mutilation) 피해자다. 아프리카에는 가정폭력을 비롯해 여성을 향한 다양한 폭력이 있지만, 나는 여성성기훼손이 그 중 최악이라고 본다. 다른 여자들이 딸 몸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을 부모가 그냥 보고만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야만적인 행위, 여성폭력의 야만적인 형태라고 본다. 나는 이에 대해 입 다물고 있을 수 없다. 나는 온 세상을 향해 언제고 내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그리고 신께 감사하게도 독일에서 나를 지지해줄 많은 여성연합과 조직들을 찾았다. 나처럼 여성성기훼손의 피해자인 다른 여성들을 많이 만나온 것도 행운이다.


※여성성기훼손(Female Genital Mutilation; FGM)은 여성의 성기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로, 성기 자극을 통한 쾌감을 경험할 기회를 일찌감치 차단시키는 풍습이다.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2억 명 이상의 여성들이 이 수술을 받았다. 또 매년 3백만 명의 사춘기 이전 여아들이 수술 당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알려져 있다.(유니세프 2013년 조사) 아프리카 중동과 아시아 30여 개국에서 주로 행해져 왔지만, 영미권과 유럽 등에 정착한 이주민 가정에서도 민족 전통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어린 딸들에게 불법 수술을 강제한다.


‘여성 할례’라는 지칭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적 종교적 의식으로 행해지고, 집단의 신뢰를 받는 나이든 여성, 산파, 간호사가 마취 절차도 없이 불결한 칼, 가위, 깨진 유리조각, 면도날로 성기 절제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술을 당하는 여성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감염과 과다출혈, 쇼크로 인한 사망 위험도 매우 높다.


▶ 여성성기훼손(FGM)이 가장 광범위하게 행해지는 아프리카 지역에서 각 국가별로 15-49세 여성 중 피해자 비율을 나타낸 도표. 80% 이상이라는 높은 비율을 보인 나라 가운데 이집트, 기니아, 수단에서는 법으로 이미 금지한 뒤에도 이 같은 수치를 보였다. 점점 더 많은 국가들이 법적으로 여성성기훼손 수술을 금지하고 있다.(출처: UNICEF 2012)


여성성기훼손 행위는 우리 사회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성 할례 전통이다. 이에 반하는 어떤 말이라도 하면 부모님은 ‘이건 전통이다, 선조 때부터 해오던 것’이라 한다. 부모 세대는 이를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긴다. 우리 사회에서 할례를 거치지 않은 여자는 부정하고 더러운 사람으로 비춰진다. 자기 몸에 할례를 거부한 여자아이는 우리 민족, 내가 속한 만딘카 (Mandinka) 남자와 결혼할 자격이 없다.


올로프(Wolof)와 같이 할례를 행하지 않는 민족도 일부 있다. 올로프 여성은 할례 때문에 만딘카 남성과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만딘카 족 남성과 사랑하는 사이가 된 올로프 여성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 그 여성은 사람들이 자기 성기 일부를 도려내게 해야 한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나는 여성 할례 전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뭐라 설명도 못하겠다. 어떻게 딸의 몸의 일부를 잘라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짓을 하고도 어떻게 계속 춤을 출 수가 있나?


어른들은 악어사냥을 가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할례를 당했을 때 11살에서 12살 중간쯤 되었던 것 같다. 사람들은 나와 다른 여자애들에게 우리가 악어사냥을 가는 것이라고 했다. 돈이랑, 바나나 사과 같은 과일이 많을 거라고 했다. 우리는 굉장히 신이 났다. 할례 의식이 만약 내일이라고 하면, 모든 여자들이 전날 밤새도록 춤을 춘다. 아침까지 춤을 추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의식의 일부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갑자기 하는 것이라 아니라 다 사전에 계획을 한다. 여자들은 밭에서 채소를 가꾸고 우기에는 쌀농사를 짓는다. 농작물 내다 팔아서 아이들의 할례 비용을 모은다. 그들 전통에 따르면 할례는 새로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마치 여자애 둘 셋을 악어에게 보내듯이.


만약 이 아이들이 의식 도중에 죽어도 부모는 모르게 되어있다. 사람들은 죽은 아이들한테서 옷을 벗겨내 긴 막대기에 올리고, 한밤중에 누군가가 그걸 슬쩍 가져다가 아이 부모들 집 문에 걸어둔다. 아침이 되어 아버지 어머니가 일어나서 그 옷가지를 보면 무슨 뜻인지 알아챈다. 아이가 죽었으니 그리 알라는 뜻이다. 부모들은 그제야 울기 시작한다.


※이 글의 화자는 할례 풍습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시종일관 FGM이라는 용어를 썼으나, 번역문에서는 화자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할례를 당했다’는 의미를 살리고자 기억 묘사에 한해 ‘할례’라고 표기했다.


▶ 어른들은 악어사냥 가는 것이라 했다. 덤불숲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일다 (일러스트: 두나)


사람들은 우리를 덤불숲으로 데려갔다. 할례를 할 때 남자는 들어올 수 없다. 또한 할례를 받는 자 누구도 이에 대해 어느 남자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우리 문화에서 금지된 것이다. 남자는 거기 갈 수 없고 정확히 무엇이 행해졌는지, 잘 되었는지 잘못 되었는지 알 권리도 없다.


그 때 사람들은 서른 명이 넘는 여자아이들을 데려갔다. 내가 살던 카빌로(Cabilo) 마을은 네 곳으로 나누어져있다. 챔(Cham)과 나의 출신인 보장(Bojang)을 비롯한 네 군데다. 함께 간 아이들 중 몇몇은 5살도 채 안 되었고, 10살짜리들도 있었다. 의식이 아무 때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심지어 15살 된 아이들도 있었다. 부모가 돈을 충분히 모으고 딸에게 예쁜 옷과 머리도 해주고, 음식도 많이 사주는 등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할례 도중에 나는 많은 여자애들이 피 흘리는 것을 보았고, 믿을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할머니한테 물어보려고 하니 울고 계셨다. 할머니는 무슨 일인지 아셨던 것이다. 나는 몰랐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왜 뻔히 알면서도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그냥 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그런 고통을 겪는 동안 어떻게 계속 춤을 출 수 있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덤불숲에서 일어난 일, 상상할 수 없는 고통


나를 거기 데려간 건 우리 할머니와 이모들 그리고 몇몇 친척들, 사촌 언니들과 배다른 언니들이었다. 나는 애초에 엄마가 누군지 모르는 아이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 엄마가 없었다. 나는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주 큰 덤불로 끌려갔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 목소리나 새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북을 치려고 커다란 드럼통도 가져왔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오직 여자들 뿐. 남자들은 옆을 지나가서도 안 되었다. 여자들은 나뭇가지와 천을 잔뜩 가져다가 덤불 안에 또 숨을 곳을 만들었다. 거기로 아이들을 하나씩 데려가 수술했는데, 아이들을 앉혀 놓아서 무엇을 하는지 전혀 볼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은 아이 손을 붙들고, 얼굴에는 아주 크고 무거운 짙은 천을 덮어씌운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안에 들어갈 차례가 되면 덩치 큰 여자 둘이 와서 붙잡아 간다. 아무리 고집이 세고 아무리 무거운 애라도 그들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 그들이 아이를 붙잡고 그 안으로 데려가 버린다. 곧 몸에 둘렀던 천과 속옷이 다 벗겨진다. 두 사람이 아이 다리를 하나씩 붙든다. 그러고 나서 양 다리를 벌리고 그걸 잘라낸다.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 누구도 볼 수 없다. 그들이 준비될 때까지 보이는 건 암흑뿐이다.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도와 달라 소리치는 것, 그러나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행히도. 당신이 그 아이들이라면 마치 …처럼(화자는 묘사할 단어를 찾지 못하고 말줄임표로 대신했다) 울게 될 것이다.


이제 다리를 가운데로 오므리게 된다. 다리를 벌리지 말라고 한다. 허리를 펴고 바닥에 똑바로 앉아야 된다. 심지어 파라세타몰(해열 진통제)도 주지 않는다. 나는 그 사람들 손에 축 늘어져있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다고 했다. 그 때 갖다 준 게 뭔 줄 아는가? 아타야(Attaya)차였다. 중국 녹차를 아시는지? 우리 지역말로는 그걸 아타야라고 한다. 봉지에는 그냥 중국 녹차라고 써 있다. 그들은 그걸 가져와서 잔뜩 마시게 한다.


맙소사! 정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너무나 아팠다. 나는 나중에 주사 한 대 맞지 않고 자연분만으로 아이를 낳았다. 할례 때 칼질이 출산보다 더 아팠다. 아이를 낳아본 여자라면 누구나 출산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안다. 내겐 할례의 고통이 출산보다 더 끔찍했다. 지금까지도 이 기억을 멈출 수가 없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 있다. 가끔 할례 기억을 떠올리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우울해진다.


칼질을 하고나서도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토마토 소스를 가져와서 질에다 집어넣고 다리를 오므려서 묶는다. 처녀성을 봉인하는 거라고 말한다. 처녀인 여자애들의 순결을 지키겠다고. 매일 아침 사람들이 토마토 소스를 가져와서 내 상처에 피를 씻어냈다. 토마토 소스가 상처를 빨리 마르게 한다면서. 그것도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그 때 수술 받은 우리들이 회복하기까지 3주가 걸렸다.


▶ 여성성기훼손 풍습 철폐 캠페인에 참여한 여성의 모습. (출처: UNICEF)


“난 말할 거예요,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를”


그 와중에 사람들은 아이들을 때리기도 했다. 지나가는 과정이라면서, 어른을 어떻게 공경해야 되는지 보여주겠다면서, 어른에게 말할 때 눈을 보이지 말라면서. 우리 민족 문화에서는 어른의 눈을 쳐다보면 안 된다. 머리를 숙여야 된다. 어른에게 말대꾸 한마디도 해선 안 되고 언제나 공경해야 한다. 큰언니를 대하듯이. 우리는 여자 어른을 ‘나의 언니’라는 뜻의 코토(Coto)라고 불러야한다. 아버지의 형제는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 규칙이 있는 건 학교와 마찬가지지만, 나는 끔찍한 학교라고 부른다. 어떻게 입을 다무는지, 어떻게 비밀을 지키는지 가르치는 학교다. 다른 이의 비밀을 알게 되면 결코 발설해선 안 된다. 어떻게 어른을 공경하고, 우울감은 어떻게 감추고, 스트레스를 보이지 않고 어떻게 없애는지 그런 걸 배우게 한다.


할례 도중과 이후에 사람들은 아이들을 위협한다. “집에 가서 아버지나 오빠, 남동생, 삼촌이 물으면 여기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해. 그냥 악어를 죽이고 왔다고 해. 어디 갔었는지 말하면, 누구에게라도 말하면 넌 죽는다.” 그러니까 이게 트라우마의 내력이다. 같은 일을 겪은 여자아이들은 모두 같은 트라우마를 갖게 된다. 두려워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혼자 앓고 있지 못했다. 그들이 내게 왜 이런 짓을 했는지 계속 의문을 가졌다. 우리 할머니에게 물었더니, 할머니는 내가 계속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이 두렵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내게 조심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하셨다. 이게 바로 아무도 감히 전통에 맞서지 못하고 그저 미쳐버리는 내력이다. 하지만 나는 말했다. “난 말할 거예요. 내가 여기서 그 기록을 깨버릴 거예요.” 그리고 정말 그렇게 했다.


과다출혈로 죽는 아이들이 많다. 나와 같이 수술 당한 아이들 중에는, 우리 친구이도 했던 세 아이가 그랬다.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그 애들에 대해 물었다. 우리는 걔들이 할례 장소에서 죽었다는 것을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나는 당시에도 말할 거라고 했다. 사람들은 재차 누구라도 그렇게 했다간 즉시 죽는다고 했다. 하지만 신께 감사하게도 나는 사실을 폭로하고도 죽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지마니(Jeemani)라는 아이에 대해 물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우리가 할례식에 갔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애가 피를 엄청 흘리는 것을 봤고, 그 다음에 사람들이 그 애가 죽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뭐라고?” 라고 되물었고 나는 “맞아요” 라고 답했다.


지금은 안타깝게도 돌아가셨지만 그 선생님이 지금도 기억난다. 잼(Jam) 선생님이었다. 선생님들은 할례에 반대한다. 하지만 법이, 법 만드는 사람들은 전통을 따르는 쪽이다. 그래서 전통을 거스르는 일을 하기 두려워한다. 심지어 대통령도 텔레비전에서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할례 전통을 이어가기 원치 않는 이들은 그냥 떠나게 둡시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 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한 짓은 클리토리스 전체를 잘라내고 처녀성을 봉인한다는 명목으로 주변 피부를 봉합하는 것이었다. ‘처녀성 봉인’이라는 게 뭔지 나는 정확히 몰랐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떤 남자와 억지로 결혼시켰을 때야 깨달았다. 그들이 그걸 내게 했다는 걸 그때 가서야 알았다. 봉인을 없애지 않고서는 남자와 잘 수가 없었다. 또 다른 형태의 할례였다.


어떤 여자애들은 할례를 세 번까지 당하기도 한다. 할례 이후에 여자애가 크게 웃는 것을 누가 듣기라도 하면, 할례가 제대로 안 됐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데려가서 다시 해버린다. 우리 문화에서 아이든 어른이든 여자가 여기 사람들처럼 맘껏 웃는 모습을 보기 드문 것은 그래서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박장대소할 때 사람은 행복감을 느낀다. 우리는 아니다. 그렇게 웃으면 버릇이 없다고 하고 할례를 똑바로 못 받았다는 말을 듣는다.


※여성성기훼손 수술은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1)클리토리스 표피 및 일부 제거 2)클리토리스와 소음순 일부 제거 3)클리토리스와 음순을 제거하고 제거한 조직을 사용해 대음순 바깥을 덮어 꿰매는 형태. 월경혈과 소변이 배출되는 작은 구멍만 남긴다. 성행위나 출산 시 봉합 부위의 절제가 필요하므로 또 다른 고통을 일으킨다. 화자 빈투가 당한 수술이 바로 이 유형이다 4)그 밖에 다른 형태의 성기 훼손. 클리토리스와 음순에 피어싱, 절제, 확장, 화상 입히기, 약물 주입 등.


▶ 유형 3의 여성성기훼손을 나타내는 도표. 전체 수술 중 약 15%가 이러한 형태로 행해진다고 알려졌다. 본 도표의 출처는 소말리아 유목민 집단에서 할례를 당하고 유럽으로 피난 와 세계적인 패션 모델이 된 와리스 디리(Waris Dirie)가 자신의 이름을 따 세운 FGM반대운동 재단 ‘사막의 꽃’(Desert Flower Foundation)이다. 동명의 영화와 책도 널리 알려져 있다.(desertflowerfoundation.org)


전 세계에 많은 인권단체들이 이에 맞서 싸우고 있다. 감비아에도 현재 여성성기훼손 전통에 맞서 싸우는 여성이 둘 있다. 이 여성들은 여자애들을 타락시키고, 급진적으로 만들고, 부모에게 버르장머리 없이 만든다는 비난을 들었다. 감옥에도 끌려갔었다. 석방되고 나서는 실업자가 되었고, 싸움을 계속하기 겁냈다. 이 야만적인 전통에 맞서는데 관심이 있는 여성들이나 국제기구에게 내가 같이 손을 잡자고, 다 같이 다음 세대를 위해 싸우자고 하게 된 이유다. (※빈투 보장의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계속됩니다.)


<번역자 노트> 매년 2월 6일은 세계 ‘여성할례’ 철폐의날


잔혹한 ‘여성 할례’ 풍습이 하루빨리 없어져야 한다는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전혀 없다. 클리토리스를 통한 멀티플 오르가슴에 찬사를 보내는 글을 발표하고 친구들과 여성 사정(ejaculation) 워크숍을 열었던 나는, 빈투가 호소하는 트라우마 앞에서 한없이 미안하고 슬플 뿐이다. ‘어린 세대가 고통당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울분에 찬 결의에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이번 번역 작업은 어느 때보다 길고 무거웠다. 다음 주 월경 출혈을 앞둔 나의 자궁과 골반은 활자를 통해 재현되는 할례의식의 섬뜩한 북소리와 절규를 느끼듯, 벌써부터 붓고 쑤시고 아리다.


할례 철폐가 당연한 싸움이라면, 한편으로 우리 사회에 마치 당연한 듯 존재하는 여성성기변형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내 것으로 느낄 수는 없다. 다만 각자의 삶 속에서, 몸 담은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최대한 가까운 연결고리를 찾아내 이해하고 지지하려 노력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묻는다. 산부인과마다 버젓이 걸려있는 ‘이쁜이 수술’, ‘처녀막 복원 기법’, ‘소음순 쁘띠 성형’ 광고들은 과연 아프리카의 여성 할례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행위인가? 온전히 자발적인 선택이었는가? 마취제와 진통제가 충분히 제공된다 해서 수술 받는 몸이 이를 편히 받아들일까? 지난 기사 중에서 젠더 박해를 망명사유로 인정하라 외쳤던 난민여성의 말도 떠오른다. 할례에 치를 떠는 독일여성들을 보며 그녀는, 그들이 즐겨 하는 지방흡입시술도 여성억압에 뿌리를 둔 욕망의 착시라고 했었다.


잦은 야근과 사무실 냉방 때문에 질염을 달고 살던 내게, 가부장적 서구의학을 탑재한 여성의사는 나의 질에 과장된 아로마 향수를 뿌리며 ‘이건 원래 남자친구 만나러 가기 전에 받는 1만원짜리 아로마 케어인데 소독하는 김에 같이 해 준다’고 했었다. 아파서 냄새나는 질, 아프지 않을 때도 저만의 냄새로 여성 개인의 고유성과 몸 상태를 드러내는 질이 언제부터 ‘향기로워야’ 했나?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최근 들어 이혼율이 높아졌는데, 이혼한 여성들 중 일부는 모여서 ‘인생에 도움 안 되는 남자들’을 성토하면서 처녀막 복원시술 정보도 같이 주고 받는다고 한다. 처녀막을 복원해서 이혼여성이 받는 비난과 낙인을 한풀 꺾고, 혹시라도 좀 괜찮은 남자와 재혼할 가능성도 남겨두는 것이다. 언뜻 자기 뜻대로 지갑을 여는 듯한 이들과, 딸자식의 신음에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어렵게 돈 모아 할례식과 조혼식을 치러주는 엄마들은 깨진 거울이 비추는 이지러진 상처럼 서로를 이상하게 비추고 있다. 우리의 보지는 언제쯤에야 있는 그대로의 생김으로 생의 찬가를 부를 수 있을까?


올해 나는 3월 8일 ‘여성의 날’을 꼭 짚어 기념했다. 그런데 그보다 전에 기억해야 할 날이 있었다. 바로 2월 6일 ‘세계여성할례 철폐의 날.’ 이 날을 소개하며 UN은 자못 희망적인 어투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2014년까지 15개국에 있는 1만2천여 개 지역사회의 총 1천만 명의 사람들이 할례의 악습을 철폐했습니다. 지난 30년간의 노력으로 이제 할례를 경험하는 사춘기 소녀들의 비율이 30% 감소하였습니다. 이러한 감소율이 유지된다면 2050년까지 6천3백만 명의 소녀들이 할례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6천3백만 명은 우리에게 익숙한 ‘남한 인구’보다 훨씬 큰 숫자이긴 하지만, 2억 명이 넘는다는 억울한 생존여성들을 떠올리면 마음이 조급하기만 하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여성학과 북한학의 만남: ‘분단체제 안과 밖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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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와 북한여성의 삶에 주목하는 페미니즘 시각

여성학과 북한학의 만남 ‘여성과 분단체제의 안과 밖’을 논하다



4월 27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악수를 나누던 순간은 전 세계에 보도되었고 올해 내에 ‘종전 선언’ 및 ‘한반도 비핵화’를 합의하겠다는 소식은 한반도뿐 아니라 세계를 들썩였다. 판문점 선언의 장밋빛 미래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전망이 쏟아지던 날, 이화여자대학교 포스코관에선 ‘여성과 분단체제의 안과 밖’이라는 주제의 학술포럼이 열렸다. 한국여성학회와 이화여자대학교 통일학연구원이 공동으로 주최한 자리다.


여성학과 북한학이 만나 함께 ‘여성과 분단체제’를 이야기하는 장이 남북정상회담과 같은 날 열린 게 우연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이 날 학술포럼에서는 왜 페미니즘이 북한과 분단 그리고 종전 이후의 이슈에 주목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석이 나왔다. 또 북한여성과 북한이탈여성의 현황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이어졌다.


▶ 4월 27일 한국여성학회와 이화여자대학교 통일학연구원이 공동 주최한 ‘여성과 분단체제의 안과 밖’ 학술포럼이 이화여대 포스코관에서 열렸다. (출처: 한국여성학회)


분단체제의 ‘가부장성’, 남과 북의 ‘남성성’


페미니즘이 북한과 분단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일까. 라운드테이블 사회를 맡은 이화여자대학교 통일학연구원 김석향 원장은 패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첫째는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주의적 시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여성주의 시각이라는 건, 보편을 해체하는 질문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 덕성여자대학교 이수정 교수는 “‘이게 보편이다, 이게 정상이다’라고 이야기 될 때 새로운 답을 구한다기보다 질문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것이 여성주의의 시작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문을 연 이화여자대학교 조영주 교수는 “그 여성이라는 존재는 생물학적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고 또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수많은 일들을 했던 존재”이며, “그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닐까 싶다”고 했다. “결국 비가시화된 문제, 비가시화된 폭력과 차별을 가시화하고, 그런 비가시화의 매커니즘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여성주의 시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이어 김석향 원장은 “여성주의적 시각을 적용하면, 우리의 분단은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연세대학교 김현미 교수는 “우리가 분단체제에서 합리화하고 정당화했던 게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 같다”며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분단체제는 남북 양쪽 체제의 경쟁과 경합 또는 적대 관계를 통하여 초남성주의적 군사문화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면서 그 논리와 체제 안에 많은 다른 가치를 종속시키고 위계화시켜 낸 구조”라는 것이다.


김현미 교수는 “분단체제가 가지고 있는 동질성과 맹목성 그리고 위계 구조가 한국사회에서 다른 가치를 바라보거나 인정하게 하는데 있어서 여유와 실천을 전혀 가지지 못하게 했고, 문화적으로 매우 척박하고 빈곤한 사회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현재 남북의 ‘남성성’에는 차이가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우리가 분단체제라고 했을 때 국적, 순혈, 민족을 상상하지만 사실은 가부장성도 있다.”고 말한 연세대학교 이지연 박사는 “실제 우리의 삶에는 굉장히 다양한 권력의 축이 있고, 그 중에 하나가 젠더화된 구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지연 박사는 “통일이나 통합이 되는 사회가 도래해도, 우리에게 여전히 분단체제가 지속될 수 있는 잔재들이 남아있을 수 있다. 그런 권력의 축들을 상상해 볼 때 여성주의적 시각이 굉장히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북한과 분단 문제를 이야기할 때 왜 페미니즘이 함께 논의되어야 하는지 상기시켰다.


①시장 출현 이후, 현재 북한 내 여성들의 지위는?


“우리가 쉽게 북한여성이라 부르지만, 북한여성이라는 범주는 사실 굉장히 크다.” ‘시장으로 간 혁명의 수레바퀴: 북한여성의 동원과 주변화’에 대해 발제를 시작한 조영주 교수는 “북한이 북한여성을 어떻게 호명해 왔으며, 현재 북한여성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물음을 던진다”고 말했다.


발제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 사회의 큰 변화로 논의되는 건 시장의 출현”이며, 여성이 주요 행위자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당국이 허가한 공식 시장의 수가 총 404개, 시장에 종사하는 인구는 총 1백9만9천52명으로 대부분이 여성이라고 추정하고 있다.(2016년 통일연구원, 북한 전국 시장 정보)”


“여성들의 시장 참여는 시장을 통한 정보의 유통과 주변인들과의 네트워크 구축 등을 통한 ‘의식의 변화’를 야기”하기도 했으며 “이런 변화는 여성들의 능력과 권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도 야기하였다.”


조영주 교수는 “북한 사회에서 남성들이 가지던 ‘노동자’의 위치와 여성들이 가지던 ‘가족의 책임자’ 위치가, 여성들이 가족의 생계 부양을 위해 시장으로 진출함으로써 가족을 넘어 국가의 생계를 부양하는 것으로 역할이 확대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북한 사회의 젠더 위계와 질서에 상당한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 공식화의 이면으로 비공식화된 시장과 공식화된 시장 사이의 위계가 발생”했고, “시장을 관리하는 이들은 주로 남성이며 출신성분이나 집안 배경이 좋은 이들”이라는 점을 짚으며 “기존 북한 사회의 젠더 질서를 균열시키는데 제약을 주는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실질적으로 여성들의 경제활동이 국가경제에 기여하는 측면이 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경제활동과 노동력이 국가적 동원에 그치는 것은 문제적”이라고 지적하며, “전체 경제구조 속에서 여전히 성별 분업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이 적극적인 경제활동을 시작했을 때, 과연 여성들의 위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필요하다”고 시사했다.


또한 “북한이 최근 ‘정상국가’로써의 행보를 보이기 위해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에 가입하고 보고서를 제출하고 북한이 국제적 규범에 맞게 여성인권을 보장하고 있음을 주장”하며, “2010년 ‘조선인민주의인민공화국 녀성권리보장법’을 제정하고 발표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지만, 이는 “실질적인 북한여성의 모습을 비가시화하는 효과가 있다”고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한편 조영주 교수는 “최근 북한이 북한여성(김여정, 현송월, 리설주)를 보여주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남북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려는 현재 시점에서 이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그 방식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며, 그런 여성 재현방식 또한 남북한 관계 설정에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②조선족 자치구의 북한여성들, ‘대안가족’의 가능성


북한대학원대학교 김성경 교수는 자신이 조중접경지역에서 만난 북한여성들과 조선족 여성들 간의 ‘연대’의 성격과 ‘대안가족’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이야기했다.


남한에 살고 있는 ‘보통’의 남한여성들에게 북한여성이라는 존재는 ‘여성’이라는 점 외에 공통점을 찾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조중접경지역에서 ‘이동하는 여성의 자매애와 대안가족’에 대한 김성경 교수의 연구는 흥미로운 논의였다.


“글로벌 경제체제와 이주 네트워크는 남한 내 돌봄노동이나 서비스 영역으로 ‘조선족 여성’이 대거 이주할 수 있게 하였고, 그 빈자리(조선족 사회 내부의 돌봄 영역)를 전통적으로 조선족과 협력 관계에 있었던 북한여성이 채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성경 교수에 따르면, 북한에서 여성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는 현상은 “조선족 여성에게도 일어나고 있으며, (여성들은) 무너진 가족을 위해 노동착취의 구조로 뛰어드는 상황”이다. 그러나 “착취로 시작되긴 하지만 그런 경험이 때때로 임파워링으로 연결되기도 해서, 남한에 와서 일하다가 (불평등한 관계를 깨닫고) 남편과 이혼하는 경우도 있다”는 얘기도 전했다.


“돌봄노동이 그나마의 삶을 계속할 수 있는 유일한 자원이기도 하지만 착취의 현장이기도 한 이런 상황은 이중적이며, 그 안에서 여성들의 행위 또한 수동적 피해자와 능동적 행위자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층적으로 구축된다. 그런 환경 속에서 여성들은 여성들만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거나, 피난처를 제공하는 간병대상자 혹은 그들의 가족과 또 다른 가족을 구성하기도 한다.”


김성경 교수는 이들을 “안과 밖, 경계를 횡단하는 여성들”이라고 칭하며, 자신의 연구 대상자 사례를 공유했다. 북한에서 이탈한 후 중국과의 접경 지역인 조선족 자치구에서 지내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주로 어느 가정에 들어가서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방식으로 삶을 유지하면서도, 한국에서는 불법이지만 중국에서 쓸 수 있는 의료시술을 배워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사례. 한국은 답답하고 제한이 많아서 불편하다며 불법적인 신분이더라도 중국에서의 삶을 선택한 사례도 전했다.


경계를 횡단하는 북한이탈여성과 조선족 여성들 사이에는 “그런 과정에서 서로 돕고 의지하는 여성들의 연대가 눈에 띄기도 한다”고 말했다.


김성경 교수는 “글로벌 자본주의로 해체된 조선족 가정이 북한여성의 돌봄노동과 결합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필요하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방식이 근대사회의 ‘가족’ 이데올로기를 흔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③남한여성보다 ‘경제활동 의지’ 강한 북한이탈여성


남한에서 살고 있는 북한이탈여성의 삶에 대해 발표한 남북하나재단의 장인숙 선임연구원은 “언론에서 주로 보여주는 북한이탈여성에 대한 선정적 보도와 달리, 쉽게 일반화할 수 없는 다양한 북한이탈여성의 삶이 있다”고 언급했다. “평균적인 북한이탈여성의 모습을 전하고 싶다”고 말하며, ‘통계로 보는 북한이탈여성의 삶’에 대한 분석을 시작했다.


“최근 3년간 북한이탈주민 중 약 80%가 여성”이며, “40대가 34.1%, 30대가 26.1%, 20대가 15.9%”로, “경제활동이 왕성한 시기인 핵심 노동인구인 20~40대가 76.1%”이다. “이들의 고용률은 52.6%로, 일반여성(한국에 거주하는 전체여성을 의미)의 51.3%에 비해 높은 수준”이다.


▶ 북한이탈여성의 경제활동 관련 자료 중에서 (출처: ‘북한이탈주민 인포그래픽스 제13호’, 남북하나재단)


“여성이 직업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답한 비율이 93.2%로 일반여성 90.2%보다 높았으며, 가정과 관계없이 계속 취업해야 한다고 답한 비율도 67.9%로 일반여성 58.9% 보다 높았다.” 또한 “가정과 직장 우선도에서 ‘직장 우선’이라고 답한 비율이 45.2%(일반여성 33.7%), 둘 다 비슷하다가 35.5%(일반여성 48.4%), ‘가정 우선’ 16.2%(일반여성 17.9%)의 결과”를 보였다. “전반적으로 일과 경제활동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고용 환경은 제한적이다. “단순노무 종사자가 26.4%로 가장 높았고, 서비스 종사자가 23.3%로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이탈남성의 26.7%가 장치/기계조작 및 조립종사자, 25.7%가 기능원 및 관련기능 종사자”라는 점과 크게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장인숙 선임연구원은 “이렇듯 직업군이 다르기 때문에 성별 임금격차는 상당한 수준”인데, “직업군에서 차이가 나는 이유도, 아이가 있는 북한이탈여성의 경우에는 무언가를 배울 시간이 없이 급히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일용직을 전전”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이탈여성이 경제활동에 의지를 보이고 있음에도, 이들 또한 가사노동과 육아의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취업 장애요인 중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인 건 ‘육아부담’이 40%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 및 차별적 관행’ 16.3%, ‘불평등한 근로여건’ 11.3%보다 높았다.”


분단체제를 살아가는 남과 북 여성들과 페미니즘


한국 사회를 늘 불안케 하고 군사주의 시스템을 구축하게 했던 전쟁과 분단의 상황이 곧 사라질지 모른다는 희망찬 이야기가 들려오는 시점이다. ‘만약에 종전이 된다면’이라는 가정에서 만약은 이제 버리고, ‘종전이 된다면 우리는~’으로 시작하는 수많은 이야기를 해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페미니스트에게 과연 종전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이번 학술포럼은 그 고민의 시작으로 현재 분단체제를 살아가고 있는 북한여성과 북한이탈여성, 그들이 놓인 위치와 환경을 살펴보는 뜻깊은 자리였다.


포럼 참여자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분단체제와 북한 문제, 그리고 종전 논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새로운 질문과 이슈를 발굴해주길 바란다는 메시지도 전했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나에게 성적 쾌락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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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영원한 타자와의 대화

[Let's Talk about Sexuality] 나에게 쾌락은 무엇인가


※ <일다>는 여성들의 새로운 성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20인의 여성이 몸과 성과 관계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과 경험을 담은 “Let's Talk about Sexuality”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입도 벌릴 줄 알고, 혀도 내밀 줄 알고


첫 키스는 열일곱, 같은 반 A였다. A는 인기가 많았다. 추종자도 여럿이었다. A는 내가 좋다고 했다. 세실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명동에 가서 돈가스를 먹고, 그렇다. 우리는 데이트를 했다. 단, A에게는 조건이 있었다. 데이트 사실을, A와 내가 사귄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거였다.


A의 키스는 돌연했다. 야자 시간, 나란히 앉아있던 운동장 벤치에서였다. 나는 벤치 끄트머리를 잡고 상체가 뒤로 젖혀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키스를 마치고 A는 이렇게 말했다.


입도 벌릴 줄 알고, 혀도 내밀 줄 알고, 참


그렇다. 내 첫 키스는 A에게 품평 당했다. 나는 A에게 그런 권한을 준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섹스는 줄곧 평가 당했다. 나에게든 타인에게든 줄곧.


-왜 피가 안 나와?


첫 섹스는 열아홉, 소개팅으로 만난 B였다. 그 섹스를 하자고 월미도씩이나 갔다. 놀이기구는 하나도 안 타고 소주병만 깠다. 참이슬 몇 병에 바이킹 열 번쯤 탄 기분이 되어 방을 잡았다. 퀸 사이즈 베드 왼쪽에 킹 사이즈 거울이 붙어 있었다.


한 달 전에 합의하고 실행한 일정이건만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아니 인천행 전철을 잡아탄 순간부터 아니 전날 두 손을 꼭 잡고 내일 만나, 하며 헤어진 순간부터 아니 한달 전 섹스하자고 약속한 순간부터 이 순간을 지연시키고 싶었다.


싫은데, 싫은데, 입 속 말은 혀끝으로 나오지 못했고 옷을 벗었고 침대에 누었고 사타구니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에 B를 팔로 밀어냈다. 그런데도 B는 제 물건을 어찌어찌 내 몸 속에 쑤셔 넣었는지 짧은 탄식 후 침대위로 몸을 부렸다. 그러고는 침대 시트, 하얀 그 시트를 이리저리 들추며 말했다.


피, 안 묻었네. 왜 피가 안 나와? 응?


사람이 아니라 개새끼랑 첫 섹스를 했다.


-우리 사랑하던 사이야


스물 셋, 다른 여자의 남자 C와 사랑에 빠졌다. 상황을 눈치 챈 다른 여자는 나를 카페로 불러내 이것저것 물었다. 다른 여자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이 찾아오자 C가 찾아왔다. 그날 알았다. C가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고 자신의 테크닉이라는 걸. 화려한 신기술을 적용하고 그것을 감탄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C와 헤어지고 5년이 지나 대학로 무대에서 다시 만났다. 마지막 공연을 하루 앞 둔 뒤풀이 자리, C는 나를 가리키며 어린 후배들에게 말했다.


우리 사랑하던 사이인데, 어쩔 수 없이 헤어졌어.


개새끼들의 착각은 한결같다. 그에겐 추억이 나에겐 악몽이다. 그 새끼를 사랑했다고 믿었던 시간에 황산을 뿌리고 싶다.


-니가 너무 착하고 거절을 못해서 그래


D는 C의 후배였다. 정말 엿 같은 얘기지만 C는 D에게 나를 양도한 모양이었다. D는 나를 정중히 승계하였으나 C에 대한 경계심을 어쩌지 못했다. 개새끼들이 권력을 양도하는 과정 속에서 당사자인 나는 철저히 배제되었다.


D는 자기 선배들이 내게 찝쩍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E의 집에서 옷을 말끔히 벗고 E와 나란히 누워있던 장면을 목격한 순간, D는 달랐다. E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꽃병을 집어든 D는 부정의 근간을 잘라내겠다는 듯 화장대 거울을 향해 그것을 던졌다. E의 비명이 꽃잎과 함께 부서졌다. D는 누워있던 내 손목을 부여잡고 잠금장치를 설치하듯 손수 옷을 입혔다. D는 E를 비난하며 말했다.


저 마녀 같은… 니가 너무 착하고, 거절을 못해서 그래.


D는 틀렸다. 나는 E와 나란히 누워있는 것이 싫지 않았다. 물론 E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E는 나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 얼마 전 틀어진 자신의 연애를 만회하기 위해 대체물로 나를 선택한 것일지도 몰랐다. E는 나보다 스무 살 나이가 많았다. 스무 살 차이의 힘은 셌다. 그러나 나는 E의 혀를 받는 것이 불쾌하지 않았다. E의 입술이 내 젖꼭지를 무는 것이 싫지 않았다.


내 잘못이라면 내 욕망에 이름을 붙여주지 못했다는 거였다. 내 욕망은 소유주 D의 것이었다. 내 욕망이란 애시 당초 없는 거였다. 나는 내 욕망이 부정 당하는 줄도 모르고 동의 절차를 무시한 E를 뒤늦게 책망하며 D와 함께 그 자리를 떴다.


▶ 글, 그림: 가운뎃손가락_ 가운뎃손가락을 쭉 뻗으면 힘이 솟는다.


섹스, 영원한 타자와의 대화


F가 있었다. 그리고 G가 있었다. F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어느 새 G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렇다. 사랑은 움직이는 거였다. 아니 사랑은 움직이는 동시에 머물기도 하는 거였다. ‘폴리아모리’라는 언어를 몰랐던 스무 해 전 나는 두 번 양다리를 경험했다. 한 번은 발각됐고, 한 번은 내 쪽에서 스스로 포기했다. 발각이 아닌 포기의 경우, 내 행동 기준이 도덕이거나 윤리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섹슈얼한 관계에서 자발적 주도권을 누려본 적 없는 나는, 권력의 맛을 누리기는커녕 그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는 나는, 양다리라는 고도의 균형 감각이 요구되는 긴장감을 감당하지 못했다.


첫 키스 상대 A에게 돌아가자. 국사시간이다. 나와 A는 책상서랍 아래 손을 맞잡고 있다. A의 왼쪽에 앉은 나는 오른손에 펜을 들고 왼손으로 엑스 자를 그리듯 A의 손을 잡는다. 내 손과 A의 손이 축축해진다. 손바닥 사이로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만 같다. 아, 하는 낮은 탄식이 오고 간다. 그렇다. 내가 A를 기억하는 방식은 첫 키스가 아니라 수업 시간 책상 아래로 부여잡았던, 평평하게 맞잡았던 나와 A의 손과 손이다. 그러나 A는 그 평평함을 견디지 못했다. 나를 관리했고, 자신의 추종자를 잃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고, 종국에는 나와 A만의 키스까지 평가했다. A는 대체 어디서 그런 태도를, 몸짓을, 눈빛을 배운 것일까.


첫 섹스는 또 어떤가. 그 날 나와 B는 모텔로 들어가 씻는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집에서 각자 씻고 오자는 약속을 했다. 어쩌면 상대방이 욕실에 들어가 샤워하는 동안 객실에 앉아 있는 시간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일부러 씻지 않고 B를 만났다. B에게 반발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씻지 않는 것’이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마치 내가 씻지 않고 가면,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권리를 내가 행사하기만 하면, 약속 자체를 파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의 권리는 간단히 무시되었다. 애초에 권력이 나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여자의 남자 C를 사랑한 일은 여러모로 악질적인 행위였다. 꽃뱀은 있는데 꽃뱀에게 물린 사람이 사라졌다. 꽃뱀에게 물렸다고 일컬어지는 자, C의 대리인으로 다른 여자가 등장했고 나를 심판할 권력은 다른 여자의 것이 되었다. 수많은 구경꾼이 다른 여자의 편에 서서 나에게 돌을 던졌다. C는 겁먹은 얼굴을 한 채 사라졌다가 5년 후 다시 나타나 나에 대한 소유권이 여전히 자신에게 있음을 후배들 앞에서 천명했다.


D는 이중 잣대를 어쩌지 못했다. 나를 승계함으로서 선배와의 호모소셜을 공고히 하는 한편, 나와 E에 대한 호모포비아를 구축하는 것으로 호모소셜에 쐐기를 박았다. 어쩌면 그를 압도했던 것은 C에게 나를 다시 상납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긴장감과 경계심이었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런 경우가 발생했다면 D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E에 대해 덧붙이자면, 나는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 스스로 선취한 E의 위계에 굴복한 면이 없지 않다. E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십분 발휘했고 그 순간 나를 전유했다.


자유롭지도 평등하지도 않은


첫 키스를 나눈 A도, 첫 섹스를 한 B도, 테크닉 시연에 안달이 난 C도, C와 바통 터치한 D도, 새로운 성적 지향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었던 E도, 그리고 F와 G사이에서 처음으로 섹슈얼 파워게임을 맛본 나까지, 우리는 모두 주고받은 게 있었다. 사랑은 아니었다. 손아귀에 딱 들어맞는, 그래서 좀처럼 놓아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의 이름은 ‘권력’이었다.


나를 제외한 그들은 각자의 역량만큼 그 권력을 부렸다. 여성이었지만 남성으로 자신을 정체화했던 A나, 여성성을 포기하지 않았으나 위계에서 우위를 차지한 E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상대적으로 늘 하위에 있던 나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도 감당하질 못했다. 손아귀에 쏙 들어온 권력이라는 공을 F와 G에게 몇 번 던지다가 바닥에 스르르 놓아버렸다. 테니스공이 가질만한 경쾌함과 밀도가 나에겐 점점 버겁고 무겁게만 느껴졌다.


나는 자위를 즐긴다. 클리토리스를 자극하는 가벼운 마찰로도 충분히 자극되고 흥분한다. 그러나 남편과 섹스할 때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그의 허벅지에 내 사타구니를 문질러 이미 아랫도리가 축축해졌음에도 나는 결국, 그의 페니스가 내 몸에 들어오길 간절히 원하고야 만다. 팽팽한 긴장감이 유발한 다른 세계로 인도되지 못하고 익숙한 피학의 세계로 길을 트고야 만다.


정작 나는 이때마다 길을 잃는다. 나에게 쾌락은 무엇인가. 내가 주체적으로 원한다는 것은 영원한 환상인가. 혹은 피학의 이 순간은 영영 굴욕인가. 나는 언제쯤 권력이라는 공을 편안하게 주고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정말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내가 아닌 다른 이와의 섹스는 영원히 평등할 수 없는 것일까. 타자성을 기본 값으로 삼지 않는 섹스란 정녕 자위뿐일까. 평등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은 영원한 타자와의 대화, 그 대화 속에서 나는 조금씩 더 외로워진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인도의 ‘여성 레슬러’ 자매들의 실화 “당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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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갈”을 보니 운동하고 싶어지죠?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우리의 움직임 욕망


※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 지도자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인도의 ‘여성 레슬러’ 자매의 실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은 나라이며 인구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나라. 고대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이자 힌두교와 불교의 발상지. 헌법으로 인정한 공용어만 22개이고,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다 합치면 1천6백여 개의 언어를 사용하는 다인종, 다문화 국가. 한편 뿌리 깊은 성차별로 심각한 남녀 성비불균형과 성범죄, 조혼 등의 문제를 겪고 있는 나라, 바로 인도다.


힌디어로 레슬링 경기라는 뜻의 제목을 단 영화〈당갈>(Dangal, 니테쉬 티와리 감독 2016년작, 현재 극장 상영 중)은 인도 역사상 최초로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여성 레슬러 기타와 바비타 포갓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훌륭한 레슬러였으나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운동을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 든 아버지 마하바르 싱 포갓은 자신이 못 이룬 금메달의 꿈을 아들을 낳아 이루고자 했지만, 딸만 넷을 낳고 실망한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 딸 기타와 둘째 딸 바비타의 재능을 발견하고, 아들이 따는 금메달이든 딸이 따는 금메달이든 모두 같은 금메달이라며 딸들에게 레슬링을 훈련시킨다.


▶ 여성 레슬러 영화 <당갈>(Dangal, 니테쉬 티와리, 2016년작) 포스터


영화의 흥행으로 기타와 바비타는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했는데, 영화와 달리 실제 그들은 파흘바니(인도식 흙바닥 레슬링 선수)들의 전통 그대로 새벽 3시30분부터 훈련을 개시했다고 한다.


게다가 영화가 보여주는 동네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은 자신들이 운동을 하던 어린 시절 겪었던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2011년 인도 인구센서스의 발표에 따르면, 인도는 남성 1천 명당 여성이 933명이다. 그중에서도 기타와 바비타가 살고 있는 곳은 남녀 성비차가 가장 큰 하리야나(남성 1천 명당 여성 861명) 주다. 하리야나 주에는 “딸을 키우는 것은 이웃집 식물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여자는 키워봤자 결혼해서 남의 집 재산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태아의 성별을 감별해 낙태를 하고, 많은 여성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집안일만 배우다가 처음 본 사람과 어린 나이게 결혼하는 것이 흔하다.


발리우드의 흥행요소를 따르는 이 영화는 몇몇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러나 여자를 레슬링 대회에 참가시키는 것은 수치라고 반대했던 대회관계자들 앞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남자 레슬러들을 던지고 조이고 꺾는 모습은 매우 통쾌하다. 국가대표가 돼 경기에서 멋지게 레슬링 기술을 펼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름답다는 감정이 밀려들고, 자랑스럽고, 혈관이 펄떡 거리며 강렬하게 운동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움직임은 욕망이다


인간에게 움직이는 것은 욕망이고, 즐거움이다. 때로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쉬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필요한 휴식이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고 한 곳에 그대로 있으면 우리는 실제로 무기력해지고 우울해진다. 땀이 나고 심장박동이 빨라질 정도로 움직이고 나면 개운함을 느낀다. 비로소 살아있다는 느낌이 행복감을 준다.


운동의 사전적 의미는 몸을 단련하거나 건강을 위하여 몸을 움직이는 일이다. 핵심은 움직임이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느새 운동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고되거나 지루함을 떠올리게 되었다. 왜 그럴까


어린 아이를 보자. 한국 사회에서는 미취학 아동을 봐야 한다.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뛰고, 내달리고, 높은 곳에서 점프하고, 쫓고 쫓기고, 깡총 뛰는 것을 사랑한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어른들은 매번 “가만히 있어”, “뛰어내리지 좀 마. 아랫집에서 올라와”, “뛰지 마”, “위험해”, “다쳐”, “천천히 걸어 가”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깔깔 거리며 뛰어다닌다. 처음 만나 서로 쭈뼛거리다가도 한 명이 달리면 다른 한 명이 따라 달린다.


▶ 움직임은 욕망이고, 즐거움이다. ⓒ출처 Flickr. Loren Kerns (CC BY2.0)


그러던 아이들이 유치원 때부터 오래 앉아 있기를 훈련하고,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오래 앉아있기 경기를 하는 선수들처럼 하루 여덟 시간을 기본으로 열네 시간씩 앉아 지낸다. 시험을 위한 공부를 제외한 모든 시간은 쓸모없는 시간이 된다.


움직임을 사랑한 아이는 이제 체육시간의 기록이나 순위로 점수 매겨진다. 즐거움은 사라지고 점수만 남는다. 움직임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고 다수가 ‘나는 운동을 못 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으로 자신을 기억한다.


운동을 잘 하는 소수는 선수가 된다. 운동 감각이 좋고 기록이나 순위가 동기부여와 즐거움이 되는 승부욕 강한 아이는 고된 운동을 감내하며 다행히 심각한 부상을 겪지 않고 운이 따른다면, 극소수의 성공한 사람이 된다.


꾸준히 운동하려면?


인간은 동물, 움직이는 생명체다. 살면서 꾸준히 운동하는 것은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다.


운동을 꾸준히 하려면, 기본과 균형이 매우 중요하다. 기본을 무시하면 쉽게 부상을 입고 중도에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일상생활과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역시 쉽게 부상을 입고 중도에 포기하게 될 것이다


부상이나 질병이 있다면, 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의료전문가에게 하고자 하는 운동을 해도 되는지 문의해야 한다.


어떤 운동을 선택하든 기본은 체력과 좋은 움직임이다. 기초적인 가동성(mobility)과 안정성(stability)을 확보해야 하다. 가동성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고, 안정성은 움직임 속에서 몸의 중심이 잘 작동해 안정감을 갖는 능력이다.


뻣뻣하거나 잘 움직여지지 않는 곳이 없고 몸통이 탄탄하게 힘을 잘 써야 한다. 예를 들면, 무릎을 펴고 서서 손끝이 바닥에 닿고, 두 팔을 등 뒤로 보내서 팔꿈치를 펴고 깍지 낄 수 있고, 달리기와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 되지 않더라도 목표로 삼으면 좋다. 꾸준히 하면 할 수 있다.


▶ 꾸준히 운동하려면 기본이 중요하다. ⓒ스쿨오브무브먼트


운동의 균형이란 ‘잘 쉬는 것’이다. 쉬는 것은 잠처럼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쉬는 휴식도 있고, 가벼운 정도로 움직여서 쉬는 휴식도 있다. 전문적인 용어로 전자를 수동적 혹은 소극적 휴식이라고 하고, 후자를 능동적 또는 적극적 휴식이라고 한다.


영화 <당갈>의 앞부분에 보면, 마하바르 싱 포갓이 흙바닥 레슬링 체육관에 가는 장면이 나온다. 남자 레슬러들이 레슬링하고, 투박한 운동 도구를 돌리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고, 팔굽혀 엎드렸다 일어났다 하는 장면과 함께 기름을 발라서 서로 마사지하는 장면도 나온다. 기타와 바비타도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동네를 달리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고, 팔굽혀 엎드렸다 일어났다 하고, 레슬링 기술을 습득하고 스파링을 한다. 마하바르는 한밤에 곤히 잠든 자매의 다리를 주무른다.


이들이 선택한 운동은 레슬링이고, 레슬링을 잘 하기 위해 달리기, 힌두푸쉬업, 힌두스쿼트, 조리와 가다를 돌리면서 체력과 좋은 움직임을 만들고, 마사지로 적극적 휴식을 하면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체력과 좋은 움직임 그리고 균형에 관심이 있다면 이전에 쓴 칼럼 “우리 운동할까요” 세 편의 연재와 초간단 공마사지, 손쉬운 셀프마사지, 다섯 가지 요가 자세 편을 보면 좋다.


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영화에서는 기타가 금메달을 따는 모습까지만 나왔지만 동생 바비타, 또 다른 동생 리투, 사촌 동생 비네쉬도 커먼웰스 게임(Commonwealth Games)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막내 동생 상이타도 역시 레슬러다.


▶ 인도 역사상 최초로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2010년 기타의 경기 모습 ⓒ출처: 유튜브 캡처


여자가 레슬링 하다가 시집도 못가면 어떻게 하냐는 우려에 “우리 딸들은 성공한 여자가 되어서 결혼할 남자를 직접 고르게 될 거야” 라고 답한 마하바르의 얘기처럼, 기타는 2016년에 남자 레슬러와 결혼했고 함께 선수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고향에서 레슬링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이자 구루인 마하바르 싱 포갓은 금메달 결승전에서 기타에게 말한다.

“너의 승리는 너만의 것이 아니야. 너는 여자를 하찮게 보는 모든 사람들과 싸우는 거야.”


삶에 즐거움을 주는 운동 하나 정도 꾸준히 해보는 것은 어떤가. 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여자가 이런 걸 한다고?’ 하는 운동이면 더 좋겠다. 꾸준한 실천은 자존감을 강화할 것이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기쁨이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차를 마시는 시간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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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는 시간 II

[기묘나의 나름 빅뉴스] 산책


※ 기묘나: 친구와 수다 떨듯 그림을 그립니다. 부산에 살고 있는 초보 만화가입니다. <내 방구같은 만화>, <즐거운 산책> 등을 쓰고 그렸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페미니즘 콘텐츠로서의 포르노그래피를 연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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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긍정주의’ 페미니즘에 날개를 달다

베를린 섹스문화살롱 라우라 메릿 인터뷰(하)


[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고 있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페미니즘 콘텐츠로서의 포르노그래피를 연구하다


소수자 젠더인 여성과 퀴어가 사회적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섹슈얼리티를 누리는 문제에 천착해온 라우라 메릿 박사는 ‘Sex-positive’(성 긍정 혹은 친 섹스) 페미니스트라고 스스로를 소개한다. 나는 성 긍정주의 페미니즘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거나 스스로를 그렇게 정의 내리지는 않지만 상당히 고맙게 생각한다. 나를 포함한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받아들이는 많은 섹슈얼리티 지식과 실천이 그 운동의 성과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스무 살 무렵에 홀로 즐겁게 알몸 사진을 찍었던 것, 성판매자에 대한 편견에 의문을 갖고 ‘성노동’이라는 용어를 고민해 볼 수 있었던 것, 최근에 클리토리스 오르가슴과 자위, 여성 사정을 예찬하는 글을 발표할 수 있었던 것, 지금 이 순간에도 윤리적으로 생산된 페미니즘적 포르노 콘텐츠가 세상에 나오고 있는 것이 우리 여성들에게 더 좋은 일이며 사회의 진보라고 여긴다.


▶라우라 메릿이 쓴 <황홀한 솟구침 - 여성 사정>(The Gush of Ecstasy - Female Ejaculation) 책자. ⓒ하리타


하리타: 성 긍정주의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입장은 언제 굳히게 되었나요? 또,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라우라: 젊은 시절 미국을 여행하면서 일찌감치 자기 섹슈얼리티를 확립하고 덕분에 자유를 누리는 미국 페미니스트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 때 배운 것을 바탕으로 유럽에서도 그런 페미니스트들을 찾고자 했죠. 저보다 앞서 활동한 여성들 중에 이미 포르노그래피 컨텐츠와 담론, 그리고 여성 보건 문제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만든 이들이 있었어요. 친 포르노 운동(PorYes)과 성교육 작업에 있어서 저는 선구자들을 중요하게 기억합니다. 여성운동에서 성 긍정주의라는 날개는 예전부터 언론의 조명을 덜 받아왔어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차별에 맞서는 놀라운 투쟁을 보여줬는데도 말이죠.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이잖아요? 제게는 성 긍정주의 관점의 섹슈얼리티 문제가 여성해방의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예요.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대한) 앎이 우리를 더 섹시하게 합니다!


라우라는 나의 질문에 한 시간 동안이라도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간결하고 정제된 발언만이 나왔다. 성긍정주의를 페미니즘의 갈래이며 예전부터 있어온 흐름이라고 정리하는 데에서 이 문제에 대한 라우라의 신중하고 겸손한 입장이 느껴진다. 성 긍정주의는 결국 섹슈얼리티에 대해 탐구하고 더 다양한 지식을 추구할 수 있게 하자는, ‘성을 더 잘 알자’는 것이고, 나는 알아들었다.


포르노그래피와 성매매를 둘러싼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논쟁은 ‘여성주의자들의 성(性) 대결’이라는 자극적인 이름으로 역사에 남았고,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결국 수세대에 걸친 페미니스트들의 협동작업, 어떤 여성이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자유롭게 살아갈 미래로 더 크고 튼튼한 ‘새’를 함께 날려 보내는 과정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검열법 논쟁이 있었던 1970년대에 ‘PorYes’(친 포르노) 운동 진영이 생겨났다. 1980년대에는 대중적으로도 유명한 페미니스트 알리스 슈바르처가 독일에서 포르노 반대법을 제정하기 위한 ‘PorNo’(포르노 반대) 캠페인을 벌였다. 이때 ‘PorYes’ 진영의 반응은 어떠했냐는 질문에 대해, 라우라는 이 둘이 대립 관계가 아니라 ‘자매 관계’라고 강조한다. 반대 측의 분석에 찬성 측도 사실 동의했다. 주류 포르노 콘텐츠의 95%가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도 담고 있다는 분석 말이다.


입장이 갈리는 부분은 다만 해결 방안에 대한 것이다. 친-포르노주의자들은 기존에 왜곡된 섹슈얼리티 묘사를 바꿀 대안적, 페미니스트적 콘텐츠로 대응하자고 했다. 그런 콘텐츠로 성교육을 하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자는 것. 여기에는 문화콘텐츠 검열에 반대하는 사람들, BDSM(성 기호 중 가학 성향) 향유자들, 성노동자와 퀴어 액티비스트들의 목소리도 함께 있었다.


▶ 페미니스트 포르노를 표방하는 ‘PorYes Award Europe’ 홈페이지에 게재된 사진. 한 집회에 나온 피켓 이미지로, “너의 성적인 상대가 되고 싶은지, 언제 되고 싶은지는 내가 결정한다”라고 쓰여 있다. ⓒ출처: poryes.de


대안 포르노그래피 시상식을 만들다


라우라는 대안적인 포르노그래피 발굴과 보급, 토론에 많은 노력을 들여왔다. 2009년 베를린에서 2년마다 열리는 대안 포르노그래피 시상식 ‘PorYes Award Europe’ 창립자이기도 하다. 이 축제 홍보 차 진행된 다른 인터뷰에서 라우라의 목소리를 더 들어본다.


질문:대안적인 포르노그래피의 분류 기준은 무엇인가?


라우라: 우리가 사회에 요구하는 가치들과 유사하다. 우선 다양성이다.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욕망이 두루 담겨있어야 한다. 새로운 촬영 미학도 기준이다. 모든 젠더와 몸이 반영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합의’(consensus)라는 가치도 중요하다. 촬영에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이고, 어디까지 할 것인지에 동의해야 한다. 마지막 기준은 공정함이다. 노동자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과 적절한 임금, 정서적 제도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


질문: 전통적인 포르노 소비자들, 남성들은 이러한 대안-페미니스트-퀴어 포르노그래피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나?


라우라: 우리 타깃은 퀴어-페미니스트 집단만이 아니다. 서브컬쳐를 뛰어넘는 것을 항상 목표로 하기 때문에 남성들도 물론 고려한다. 사실 남성들의 반응도 좋다. ‘(섹스를) 잘 해야 된다’는 압력에서 남자들도 해방시키고 싶다. 들어갔다, 나왔다, 사정? 그건 그냥 넌센스다! 포르노 소비자 다수가 남성이라는 것의 장점도 있다. (이미 그들은 소비자 층이기 때문에) 새로운 메시지를 갖고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만 고민하면 된다. 남성들도 기존 포르노 외에 다른 볼거리가 있다는 것에 고마워한다.


질문: 주류 포르노 업계에 이런 메시지가 받아들여지고 있나?


라우라: 그렇다. 하지만 대부분 피상적인 수준으로 용어만 차용되곤 한다. 예를 들어 “여성친화적인 포르노”, “친-섹스”와 같이. 퀴어 포르노 배우들이 주류업계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하지만 갈등도 많이 일어난다. Jiz Lee라는 배우는 촬영을 위해 다리털을 밀라는 요구를 받고 그만두었다.  -2017년 10월 21일 일간지 Tagesspiegel 인터뷰 “Rein, Raus, Spritz ist Blo?dsinn” 중에서


질문: 포로노 업계에는 아직도 성차별이 스며있다. 남자가 초점이다. ‘그’의 필요가 해결되고 ‘그’의 욕망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런 패러다임 왜 21세기에도 여전한가?


라우라: 업계는 아직도 극도로 보수적이고,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성교육의 부재도 원인이다. 자기 성기의 해부학적 구조를 아는 사람을 드물다. 여성의 성기는 종종 부정적이거나 불완전한 것으로 묘사된다. 성별 차이를 강조를 강조하면서 그 차이가 상호보완적인 것이라 한다. 재생산 메커니즘에 치중한 계몽주의 시대 때의 성교육 지식이 아직도 지배적이다. 욕망의 관점에서 섹슈얼리티를 다루지 않는다. 즐겁고 새로운 섹슈얼리티에 대해 사회 주류가 침묵하는 것이 주류 포르노그래피의 그러한 해석과 표현을 낳고 있다고 본다. 계몽은 따라서 페미니스트 포르노의 과제다. -2017년 10월 18일 문화잡지 Spex Magazin 인터뷰 “Vereinte Sa?fte ? PorYes-Award-Initiatorin Dr. Laura Me?ritt im Interview” 중에서


여자 몸에도 전립선이 있다! 보수적 성의학에 도전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새로운 성교육이 절실하다고 믿는 라우라는 성 긍정주의 페미니스트 성의학자들의 발견과 주장을 쉽게 풀어 쓴 대중적 의학서들을 펴냈다. 먼저, 기사 서두에 나의 사정 워크숍 교과서로 언급한 <황홀한 솟구침 - 여성 사정>(The Gush of Ecstasy - Female Ejaculation)은 작은 책자 형태로 발간되었다. 두 가지 새로운 ‘사실’(truth)을 알리는데 주 목적이 있다. 1)그간 해부학적으로 규명이 덜 되었거나 의도적으로 축소된 클리토리스의 모습과 기능 2)여성 생식기에 전립선이 존재하며, 특정 부위가 자극되어 극치감을 느낄 때 이 곳을 통해 사정이 일어난다는 점. 독자들이 직접 사정 워크숍을 열 수 있도록 친절한 가이드라인까지 수록해놓았다.


▶ 라우라 메릿이 쓴 <황홀한 솟구침 - 여성 사정> 책자 중에서. ⓒ하리타


여성 생식기의 명칭이 여성혐오적인 의미를 담고 있거나 가부장적 담론에 기반한다고 지적하며 새로운 용어를 제안한 것도 매우 반갑다. 책 속의 일러스트부터가 범상치 않다. 정 가운데 자궁이 있고 좌우로 난소, 나팔관, 아래로 질이 이어지는 평면적 그림, ‘아기집’ 위주의 시각이 아니다. 질을 중심으로 위와 아래, 옆, 안과 바깥의 다양한 각도에서 보는 3차원의 여성 생식기 모습이 줄지어 나온다. 질 입구 부분인 음문/보지(Vulva)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특히 인상적인 것은 클리토리스 표현. 으레 점으로 표현되는 클리토리스는 라우라의 책에 따르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었다. 사실 바깥에서 보이는 삐죽 나온 조직 ‘클리토리스 진주’(Clitoral Pearl) 뒤에는 자루(shaft), 다리(leg), 구근(bulb)이라 이름 붙여진 거대한 조직과 신경망이 뻗어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성들의 성감과 성욕, 성기능에 무한한 잠재력이 있을 수밖에.


한편, 2012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여성의 몸 새로 보기>(Frauen Korper Neu Gesehen)는 1987년 1판을 확장, 개정한 것이다. 당시에도 여성의 몸을 광범위하고 긍정적으로 그린 흔치 않은 책으로 주목을 받았다. 남성의 몸을 그린 해부학도가 있고 그 중 여성만이 가진 특징을 따로 떼어 설명하는 기존 방식이 아니라, 여성의 몸 전체를 온전히 묘사하면서 독자들이 자기 몸을 스스로 살펴볼 수 있도록 안내한다. 흔한 여성 질환들과 피임법, 안전한 섹스와 임신중단, 여성 생식기 성형술에 대해서도 여성운동의 역사를 짚어가며 소개한다.


처음 아마존 온라인 서점에 올라갔을 때 표지 이미지에는 검은 줄이 그어져있었다. 표지에 나온 여자는 상반신을 다 드러내고 청바지만 걸쳤는데, 바지 위쪽으로 보지털이 보여서다. 아마존은 ‘기술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그런 건 처음 본다는 듯 짐직 놀란척하는 어떤 남자들의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하리타: 이 책 <여성의 몸 새로 보기>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나요?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있는지,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라우라: 당시(1987년)만 해도 여성 생식기, 특히 보지와 질을 섹슈얼리티의 중심에 놓고 논하는 책이 없었어요. 그런 문제 의식에서 여러 페미니스트들의 모여서 처음 만들었어요. 그 뒤 개정판이 나왔고, 올해는 드디어 영어판이 출간된다고 하네요.


하리타: 한국어판도 나오면 좋겠습니다. 책이 정말 좋아요. 무엇보다 일러스트를 처음 봤을 때 가히 혁명적이라고 느꼈어요. 의학계에서의 반응은 어땠나요?


라우라: 그 쪽의 반응은 좀 갈리죠. 일부는 여성 신체에 전립선이 있다는 걸 듣도 보도 못 했다면서 우리 작업을 학문적인 성과로 인정하지 않아요. 새로운 관점이 등장한 것을 반기는 이들도 있고요. 아직도 논쟁 중이지만 첫 출간 때에 비하면 사정이 훨씬 나아졌어요. 그 사이 성 긍정주의 페미니즘도 점점 커져왔기 때문에 누구도 마냥 무시할 수 없을 거예요.


하리타: 전립선 말고 논쟁적이 되는 부분이 또 있나요?


라우라: 용어를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일각에서는 ‘vulva’(보지)를 학술 용어로 보지 않아요.(학계에서 주로 쓰는 거는 ‘external female genitalia’) 그런 지적에 일일이 대응하지는 않고 때로는 그냥 그러죠. 역시 학계구나. 꺼져.(웃음)


하리타: 라우라 본인에게는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확고한 진실인가요? 아니면 여러 가능한 진실 중에 하나라고 보나요? 과학도 사회적 구성물인데요.


라우라: 나에게는 이게 유일한 진실이에요. 여성 전립선과 사정 메커니즘이 실재한다는 것. 우리 페미니즘 진영에서 15년 넘게 싸워온 것이기도 하고요. 다들 젖어있고 뿜어대는데, 그걸 사정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그냥 오줌이야! 저 여자 오줌 싼 거야.” 그거야말로 말이 안 되죠.


▶ 라우라 메릿 박사의 저서 <여성의 몸 새로 보기> 2012년 독일어 개정판이 어느 서점 매대에 진열되어 있다. (사진 출처: http://ayeayesoeur.blogspot.de)


이름표가 필요하면 써라, 그리고 떼버려라


나는 재작년에 라우라 메릿을 처음 알게되었을 때부터 뭐랄까, 롤모델로 생각했다. 박사학위를 따고 교단에 서는 등 원 없이 공부했고, 동시에 잔뜩 발기한 클리토리스처럼 섹시하고 자궁 속까지 웃기는 문화기획들을 실현시킨 그 삶이 아주 자유로워 보여서다. 예순 살을 바라보지만 깔깔, 호랑방탕하게 웃고 유쾌한 표정을 잃지 않은 걸 보며 저렇게 늙어야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새침한 마음도 이내 고개를 든다. 라우라는 독일에서 태어났잖아. 백인 여자잖아. 애초에 영향력 있는 집단 출신이란 얘기다. 만족스럽게 늙어가는 중년의 여유 덕분에 옆에서 푸근한 느낌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집을 나서면 곧바로 상기될 것을 알았다. 불안정하고 혼란스럽고 조바심 나는 나의 젊음. 인생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는 심정으로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하리타: 성 긍정주의 페미니즘은 북미권과 유럽에서 주로 성행합니다. 가부장제와 종교 규율이 우세한 다른 지역에서는 좀 사치스러운 주제라고도 할 수 있어요. 베를린에는 다양한 지역과 문화권 출신의 여성들이 살고 있는데, 여기 살롱에서도 만날 수 있나요? 가령, 우리 지역 페미니즘 모임은 여러 군데를 나가봐도 절대 다수가 20~30대 백인 독일 여자들인데요.


라우라: 다양한 사람들이 와요. 하지만 나는 인종과 나이를 기준으로 머릿수를 헤아리지 않아요. 묻지도 않죠. 그런 타이틀로 행사를 열지도 않아요. 젠더 정체성에서도 마찬가지로, 트랜스젠더만을 위한 자리를 마련하지도 않아요.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때 의식해서 알게 됩니다. 얼마 전에 무슬림 이주여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참가자가 있었어요.


하리타: 구조와 구분을 해체하는 입장인가요. 일리가 있어요. 저는 여기서 외국인 유색인종 여성으로 살면서 일상적인 폭력을 겪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제 정체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게 저를 옥죈다고 느껴질 때도 있죠. 차별과 배제에 반대하는 나의 언어 역시 구분 짓기, 분류하기인 것에 한계를 느낄 때도 있고요.


라우라: 안 그러려고 해보세요. 물론 쉽지 않을 거예요. 거의 자동적으로 작동하는 구분 짓기 사고방식을 스스로 인식할 때마다 무장해체 시켜보세요. 그냥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가게 둔다는 느낌으로요. 젊은 시절 저도 “난 레즈비언”이라고 선언하듯 자기소개하길 좋아했어요. 20년쯤 지나고 부터는 그 말을 뱉으면 “그래서 뭐?”(so what?)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 다음부터는 “나는 또한 다른 모든 것이야.”(I am everything)라는 쪽으로 마음가짐을 가져요. 이름표는 분명 유용해요. 스스로의 정체성을 세우고 받아들이고 동류 집단에 소속되는데요. 하지만 받아들여지고 나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하리타: 오, 해방감을 주는 얘기네요. 이름과 정의와 규정이 중요치 않고 그냥 나로 존재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하지만 현실에서 특권 문제가 자꾸 걸려요. 어떤 mtf(male-to-female) 트랜스젠더 작가는 퀴어 커뮤니티에서도 소수자 배제가 일어나고 특권이 작동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저한텐 그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보였어요. 그 발언을 한 사람이 스스로도 여러 겹의 특권(생물학적 남성, 영국 시민권자, 백인)을 지닌 사람이었거든요. 정체성 위계에 대한 비판도 그 위계 꼭대기에서 나올 때만 파급력이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요. 소수자들, 보이지 않는 여성들을 어떻게 보이게 할 수 있을까요?


라우라: 물론 맞는 지적이에요. 그런데 정체성은 가변적이고 유동적이기도 하지 않나요? 예를 들어 레즈비언 그룹의 지지가 필요한 상황이면 자신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강조해서 드러내지만, 장소를 바꿔 자신이 ‘젊은 여성’이라는 것을 전면에 내세울 수도 있죠.


나도 궁금한 점이 있어요.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는 건 어떤가요? 하리타가 급진적인 축이라는 걸 대강 알아요. 작년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참석차 한국에 갔었어요. 많은 한국영화가 우리가 익히 아는 주제들- 성폭력, 몸과 섹슈얼리티, 성적 대상화, 여권, 밤거리 안전?을 다루고 있었는데, 대개 문제 분석하는 단계에 있고 해결책까지 가지 않는 것 같았어요.


하리타: 저는 입장이 좀 애매하죠. 물리적으로 독일에 있으면서 한국에 글을 발표하고 있어서 직접 만나서 교류할 안정된 소속이 없어요. 외로울 때가 많죠. 이렇게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라우라: 지금 잘 하고 있다고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주어진 한계에 머물러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에 반해 앞장서서 앞으로 나아가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모습을 아주 바람직하다고 봐요. 한국의 여성영화제에서 인상 깊었던 점은 200여명이나 되는 10-20대 여성들이 자원활동가로 활발하게 참여하는 모습이었어요. 베를린 같으면 그렇게 많이 사람을 동원 못해요. 그 젊은 친구들 외모나 꾸밈새가 서로 엇비슷하고 몰려다니는 것도 눈에 띄더라고요. 청소년들에겐 또래집단에 속하는 게 중요하죠. 독일 청소년들은 스스로 개별적이라고 믿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도 않아요.


▶ 인터뷰 도중에 나의 책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2017, 동녘)와 사회공헌 프로젝트인 <소녀들을 위한 초경 가이드북: 어바웃 문데이>(공저)를 들고 라우라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각각 다른 지역, 인종, 세대, 문화 출신의 두 페미니스트가 만나 마음을 나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하리타


나이 듦이 좋다, 우리의 성취를 돌아볼 수 있어서


하리타: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가요? 아직 그 시간을 살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어요. ‘젊어서 좋겠다’는 말을 듣는 나이입니다.


라우라: 모든 나이 때가 저마다 좋은 시간이었어요. 나는 스스로 잘 나이 들어 왔다고 생각해요. 젊을 때는 여행에 혈안이 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알아요. 굳이 먼 호주나 뉴욕까지 갈 필요 없다는 것을. 지금 여기에도 내가 할 일이 많아요. 모든 이슈, 모든 분야에 힘을 쏟을 필요가 없다는 것도, 내 자리와 역할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도 나이 들며 알게 됐어요. 베를린에 있다는 게 물론 큰 특권이죠. 여기가 글로벌한 사회이고 역동적인 변화가 계속 일어나니까요.


나이 듦은 좋은 일이예요. 내가 이룬 것, 여러 여성들이 함께 이룬 것을 돌아보며 뿌듯하게 곱씹을 거리가 많아져요. 어릴 때에는, 혹은 지금도 가끔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느껴요. 그럴 때 숨을 고르고 나 자신에게 말해요. “시간은 충분해. 지금까지 해온 것을 봐. 사회를 바꾸기 위해 활동하는 여성들이 이렇게 많아.” 각자의 길에서 자기가 발견한 걸 나누는 거예요. 비슷해 보이는 것도 결코 같지 않으니까 경쟁심이나 조바심 느낄 필요 없어요. 다양성이 우리의 자원이고, 더 많은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건 언제나 좋은 겁니다.


하리타: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네요. 향후 5년간의 삶의 비전은 무엇인가요?


라우라: 학교 교과서에 실리는 해부학 그림이 바뀌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 날을 위해 열심히 활동해왔고, 몇 년 내로 그 일이 일어날 것을 확신해요. 다른 길이 없거든요. 페어 포르노, 페어 섹스토이와 같은 움직임도 나올 거예요. 미투(#MeToo) 캠페인의 확산도 정말 좋아요.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기성세대의 인식변화와 자기성찰이 동반될 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지요. 여성들은 점점 더 강력한 주체로 사회에 나가요. 인터넷 덕분에 캠페인을 하면 쉽게 수백만 명에게 닿을 수 있어요. 지금이에요. 지금이 좋은 때예요.


에필로그: 불 꺼진 방에서 들리는 신음소리


금요일 저녁 6시 30분. 섹스클루티비테튼(Sexcluvititaten)에서 ‘PorYes Salon’이 열리고 있다. 얌전한 와이셔츠에 니트 조끼를 받쳐 입은 중년의 사내부터 수수한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남학생들, 옆머리만 바짝 민 힙스터 숏커트의 젊은 여자까지 다양한 사람들 사십여 명이 TV스크린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오늘의 상영작은 베를린을 기반으로 한 ‘인디펜던트 사이키델릭 포르노’ 그룹 ‘MEOW MEOW’의 단편영화 4편이다. 한 편이 끝날 때마다 라우라가 평론 및 진행을 맡아 함께 자리한 여.남 감독 2인과의 대화를 이끈다. 신음소리 가득한 포르노를 단체로 보는 것부터가 이색적인데, 이렇게 학구적인 분위기라니. 대안적인 포르노를 통해 성교육을 하자는 라우라의 말이 대번에 와 닿는다.


▶ 라우라의 섹스문화살롱에서 열린 페미니스트 포르노 상영회의 모습. 거실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하리타


-단편 <한나와 남자들: 아스파라거스 음모>(Hanna & die Keta-Boys: Der Spargel-Komplott)를 보고 나서 오간 대화들. 영화는 아스파라거스의 독성을 이용해 인류를 멸망시키겠다는 음모를 꾸미는 여자와 이를 막으려는 친구들의 소동을 그린다.


감독1: 이 작품은 네 명의 출연 배우들과 얘기하면서 시나리오를 같이 완성했어요. 아스파라거스라는 채소는 잘못 요리하면 독성을 띌 수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중심 소재로 삼게 됐는데요, 극중에서 페니스를 상징하기도 해요.


관객1: 으레 보는 포르노랑은 많이 달랐어요. 여자 캐릭터가 굉장히 적극적이었고 줄거리가 섹스 씬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섹스가 일상생활의 하나로 표현이 된 것 같아요.


관객2: 섹스가 끝나고 나서 ‘너무 좋았다’는 식으로 오버하는 장면이 없어서 좋았어요. 섹스할 때도 과장된 행동이 없었고요.


라우라: 사람들이 포르노를 보는 목적은 뭘까요? 재미? 자위의 도구? 우리가 보통 상업 포르노를 ‘메인스트림 포르노’라고 부르는데 사실 그 콘텐츠는 모두를 만족시키지 않잖아요. 주류가 아닌데, 그 명칭 자체가 아이러니한 거죠.


-단편 <Jell-O!>에 대한 코멘터리 중에서


주연 배우: 저는 사실 깨끗하고 깔끔하게 하는 섹스가 취향이거든요. 그래서 서로 뭘 던지고 논다는 영화 속 페티쉬는 사실 별로였어요. 대신 꽉 묶이는 것에 대한 페티쉬는 있어서 그걸 찍을 때는 재밌었어요.


관객1:서로 모르던 두 여자가 금세 친밀해져서 서로 장난치며 논다는 설정이 맘에 들었어요.


감독1: 스웨덴 카메라 감독과 작업했어요. 아무리 작은 씬이라도 그걸로 사회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는 모토를 가진 친구예요. 개인적으로 카메라 워크가 지금 봐도 참 맘에 들어요. 보통 카메라 2대로 찍는 게 최대인데, 여기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장면을 담자고 3개까지 썼고요. 관 느낌을 낼 수 있는 큰 투명 용기를 찾아 헤매고 다시마를 재료로 한 젤리 100리터를 구해서 소품으로 썼어요. 100% 비건 젤리였죠.


관객2: 부드러움에 관한 포르노라고 느꼈어요. 느리고 몽환적이면서 음악이 좋았어요. 영화가 너무 빨리 끝나 아쉬웠어요.


라우라:저는 포르노의 기능이 사람들의 성적 판타지를 화면으로 구현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보면서 사람들은 또 다른 판타지를 갖게 되고요. 불평등한 젠더만 획일적으로 재생산하는 게 그래서 위험한 거고요. 여러분들도 영화로 보고 싶은 판타지가 있으면 제작진한테 알려주세요.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강남역 2주기, 우린 아직도 ‘일반 사람’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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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2주기…우리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성차별, 여성혐오 범죄,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를 보면서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지금은 고인이 된) 송신도 할머니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진행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안해룡 감독)를 보았다. 지금도 그 영화를 생각하면 많이 울었던 기억과 함께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세력에 대한 분노와, 송신도 할머니와 일본에서 할머니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진실을 알리고자 끈질기게 맞서는 모습에 큰 힘을 얻었던 것이 또렷이 떠오른다.


▶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안해룡 감독)에서 송신도 할머니의 모습


하지만 당시 나의 분노는 무언가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었다. 방법을 몰랐다고 변명하기보다 게을렀다는 편이 맞을 거다. ‘나 먹고 살기도 벅차서’라는 핑계를 방패삼아 세상 속 내 자리만 깨끗하게 닦고 치장하면 사회에서 말하는 ‘안정적 생활을 하는 일반적인 사람’으로 대우 받을 수 있을 줄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여성혐오 살인에 대해 터져 나오는 수많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함께 분노했고, 깨달았다. 내가 ‘안정적’이기는커녕 ‘안전하지도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일반 사람’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살아가던 세상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영웅서사에 나올 법한 각성을 하며 다시 태어났지만, 영웅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단지 이 사회에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을 뿐이다.


깨어난 나와 너, 우리 ‘페미니즘’을 외치다


일어서야 했다, 목소리를 내야 했다, 소리 질러야 했다, 소리치는 내가 여기 있다고 나를 드러내야 했다. 위험하지 않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모순을 대면하면서 말이다.


메갈리아, 강남역 이후 만들어진 일명 ‘영영페미’들이 만든 새로운 여성단체들의 활동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무명의 여성들이 자신들이 겪었던 불평등하고 불합리하며 끔찍한 성폭력을 #OO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를 달아 폭로하는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주최한 17일 저녁의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 참가자가 젖은 종이피켓을 우비 위에 붙이고 있다.  ⓒ일다(박주연)


박근혜 정권 탄핵을 외치는 촛불집회에서도 촛불을 들었다. 그리고 탄핵이라는 거대한 해일 속에서 ‘성폭력, 성차별,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와 배제에 반대한다’는 소리를 내며 작은 조개들이 휩쓸려가지 않도록 열심히 조개를 주웠다. 새로운 촛불 정부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도 ‘나중에’라고 미뤄도 되는 인권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17년 미투(#MeToo)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에도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너는 혼자가 아니야’ 라는 용기 있는 발언들이 나오며, 혼자서 고통 받고 고립되었던 생존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희망이 되었고, 응원이 되었다.


‘페미니스트 색출과 탄압’ 국면을 맞다


그러나 여성들의 연대를 공격하는 이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 ‘소녀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Girls can do anything)라는 문구에 온갖 혐의를 씌워 ‘메갈이냐? 페미냐?’ 색출하는 일도 벌어졌다. 심지어 회사 대표가 직원에게 ‘한국여성민우회’ 같은 단체를 SNS에서 왜 팔로잉했냐고 추궁하는 일마저 벌어졌다.


페미니즘과 성차별 등의 이슈에 대해 제대로 된 논의를 해보자는 기획으로 만들어진 교육방송의 젠더토크쇼는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세력들의 공격을 받았다.(관련 기사: 까칠남녀 패널 하차, 젠더-언론-교육의 문제 http://ildaro.com/8105) 그리고는 급기야 주요 패널을 하차시키더니, 결국 프로그램 자체를 폐지시켰다.


그뿐만이 아니다. 연이어 이어졌던 미투 운동으로 폭로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들이 제대로 된 수사를 받고 있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가해자들 중에는 오히려 피해자를 협박하며 역고소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집에서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다, 페미니즘을 한다, 페미니스트로 선언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는 경험이 늘어났다.


우린 아직도 ‘일반 사람’이 아닌가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2주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던 지난 1일, 한 인터넷 사이트에 홍익대학교 회화과 실습 시간에 불법촬영을 한 남성 누드 모델의 사진이 올라왔고 댓글로 인신공격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 사건에 대한 경찰 수사는 신속하게 이뤄졌고 12일 사진을 유포한 여성 모델이 구속되었다. 지금껏 수많은 여성들이 불법촬영과 동영상 유포 피해를 신고하고 고통을 호소해왔지만 제대로 된 수사도, 처벌도 이뤄지지 않았었는데 ‘형평성’에 어긋난 경찰 대응을 보며 여성들은 큰 배신감을 느꼈다.


불법촬영 범죄의 피해자 중 98%를 차지하는 여성들은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면서 ‘진행이 힘들고 어렵다’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수사가 진행되고 고소된 사건조차 ‘성적수치심을 유발하기 않았다고 보여짐으로’, ‘초범이니까’, ‘가해자의 미래와 인생을 고려하여’ 등의 논리로 가해자를 두둔하는 법정을 지켜봐야했다.


▶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와 불꽃페미액션이 공동 주최한 ‘경찰은 여성의 목소리에 응답하라’ 기자회견이 17일 오전 경찰청 앞에서 열렸다. ⓒ일다(박주연)


지난 17일엔 유튜버로 활동하는 한 여성이 피팅 모델 알바에 지원했다가 겪은 성폭력을 알리고, 그 때 찍힌 사진이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을 SNS에 공개했다. 모델 지원자들에게 충격적인 방식으로 집단적인 성폭력이 행해지고 있다는 것에도 분노했지만, 더 괴로운 것은 그 무섭고 끔찍한 상황을 불특정 대중 앞에서 공개해야만 수사와 처벌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 폭로 이후, 오히려 포르노 사이트에서 피해자의 이름이 더 많이 검색되고 있다는 얘길 들었을 땐 무력감이 느껴졌다.


우리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나? 소리를 내는 사람이 너무 적었나? 여자라서 너무 만만하게 보였나? 여전히 조신하게 행동했나? 페미니즘이라는 화두 속에서 보낸 지난 2년 동안 나는(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나? 계속 묻고 또 물었다. ‘일반 사람’이 아닌 ‘OO녀’로 불리는 그 견고한 위치 앞에서 좌절하면서 말이다.


지금 여기, 다시 강남역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2주기였던 17일 목요일은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집중호우가 쏟아지는 서울 신논현역 저녁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주최 측은 열심히 우비와 피켓, 안내 자료를 배포했고 참가자들은 서로 우산을 들어주며 우비를 입고 비에 금방 젖어버리는 종이피켓이지만 피켓을 나눠들었다.


불꽃페미액션 이가현 활동가는 “지금 우리의 목소리가 역사에 기록되어 앞서간 여성들, 미래의 여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집회 참여자들이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독려했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유승진 활동가는 홍대 누드크로키 불법촬영 사건을 언급하며 차별 수사에 대해 비판했다. 또한 “여성들은 이제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폭력을 겪고 살해 당한다”는 뼈아픈 말을 덧붙였다.


3.8대학생공동행동 예진 활동가는 “폭력의 이유를 더 이상 나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다”고 말하며 “우리의 행동을 검열하지 말고 우리가 경험하는 일상 속의 폭력, 외모평가, 불법촬영, 고용불평등, 임금차별, 성폭력까지 연결된 이 폭력을 이제 바꿔야 한다”고 외쳤다.


행동하는 간호사회 최원영 간호사는 병원에서 있었던 불법촬영 성폭력 사건을 폭로했다. 또한 “왜 나이 든 여성간호사가 없는지 의문을 가진 적이 있는가? 쉽게 성적 대상화되고 노동의 가치가 절하되는 간호사의 현실을 제대로 봐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주최한 17일 저녁의 ‘성차별 성폭력 끝장집회’의 거리행진 ⓒ일다(박주연)


용화여고 성폭력 뿌리뽑기 위원회 오예진 졸업생은 “스쿨미투를 지지하는 시민 여러분을 보니 힘이 난다”며, “이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것 우리가 아니”라고 외쳤다.


차별금지법제정연대 쥬리 활동가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을 여성혐오가 아니라 정신질환으로 규정한 것은 여성혐오를 지우는 것이며, 장애와 정신질환 혐오로 그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고 말하며 “혐오와 차별을 근절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차별금지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다양한 환경과 다양한 자리에서 각각의 방식으로 여성혐오, 성차별, 성폭력과 투쟁하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거리를 채웠다. 또 그 목소리에 응답하는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지는 그 거리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나뿐 아니라 참가자 모두에게 힘이 되었을 것이다.


강남역까지 걸어서 행진하고 다시 신논현역으로 돌아오는 동안 운동화가 빗물에 흠뻑 젖어 점점 무거워졌지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점점 가벼워졌다.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구호를 외치며 빗길의 강남대로를 걸었고, 강남역 앞에선 추모의 묵념을 했다. ‘정말 더 이상 우리를 잃고 싶지 않다’는 염원을 담아서.


부정의한 세계를 깨부수기 위한 발걸음은 계속될 것


강남역 이후 2년, ‘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나?’는 의문을 품으며 절망하기도 했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건 우리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길 두려워하는 세력과 이 사회였다. 우리는 분명 나아가고 있다. 그 수많은 증거들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19일(토) 혜화역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는 무려 1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모여 “불법촬영과 유출, 유통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라”고 외쳤다. “여성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성별 관계없는 국가의 보호를 요청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20일(일) 기준으로 40만 명을 돌파했고, 유투버 성폭력 사건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는 청원이 18만 명을 넘어서 곧 20만 명을 바라보고 있다.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섹스 칼럼니스트인 은하선 씨의 서강대 강의는 이를 반대하는 이들의 압력으로 취소되었지만, 한편에서 ‘여성주의는 취소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제기되었고 다른 방식으로 페미니스트들이 연대하고 있다.


▶ 11일(금) 서강대학교 여성주의 학회 ‘담다디’ 등의 대학모임이 주최한 ‘여성주의는 취소될 수 없다’ 시위 현장 ⓒ일다(박주연)


게임 및 웹툰 등 서브컬쳐 업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페미니즘 관련된 발언을 하거나 페미니스트 선언을 함으로써 받았던 사이버불링(cyber bullying, 인터넷 상의 집단적인 괴롭힘)과 업계 내 커리어 불이익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내고, 페미니스트 작가들을 응원하는 전시 기록 프로젝트가 ‘팀 내일’이라는 모임 주최로 준비 중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페미니즘 모임, 행사, 집회 등이 개인 그리고 연대의 이름으로 다양하게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어떠한 공격과 반격이 들어와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균형하고 부정의한 세계를 깨부수기 위해서 말이다.


다가오는 24일(목)에는 여성의 몸에 대한 국가의 통제와 연결된 ‘낙태죄’ 폐지 헌재 공개 변론이 예정되어 있다. 미투 운동으로 폭로된 사건들은 재판 중이거나 수사 중, 혹은 수사를 앞두고 있다. 아직 더 큰 목소리가 필요한 사안들이 많다.


다큐멘터리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에서 송신도 할머니는 일본 정부를 대상으로 한 기나긴 재판에서 결국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말은 단지 자기위로가 아니다. 재판에 졌지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건 아니며, 오히려 더 힘을 내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또한 정말 자신의 마음은 정정당당하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변화를 요구하는 우리도 지는 경험을 하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다가올 일들 중엔 또 지난 2년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되고 있다고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진전하는 우리의 발걸음만은 멈추지 말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미투(#MeToo) 외칠 수도 없는 돌봄노동자의 노동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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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서비스가 소중하다면 돌봄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정부에 ‘사회서비스 예산 추경’ 요구하는 목소리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는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불린다. 사회가 현재 어린이/노인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할뿐 아니라, ‘누가’ 이들을 돌보고 있는지, 우리 사회는 돌봄의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지 점검해볼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노인돌봄종합서비스, 가사간병방문지원사업, 산모/신생아건강관리지원사업, 장애인활동지원사업에서 돌봄노동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환경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지난 9일 오전 11시 30분 국회의사당 앞에선 바로 그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회서비스제도개선공동행동(공공운수노동조합 의료연대본부 돌봄지부, 전국활동지원사노동조합, 온케어경기, 한국돌봄사회적협동조합, 한국돌봄협동조합협의회, 한국여성노동자회)은 돌봄노동자들의 현실을 토로하며 ‘사회서비스 예산 추경’을 요구했다.


▶ 5월 9일 오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사회서비스 예산 추경 요구 기자회견. ⓒ 일다(박주연)


‘낮은 임금’, 중년여성의 노동이기 때문입니까?


한국돌봄협동조합협의회 윤혜연 회장은 왜 ‘예산 추경’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 수밖에 없는지 설명했다.


“사회서비스가 2007년부터 돌봄을 제공을 받는 이용자의 선택권을 넓히기 위해서 바우처 제도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하시는 분들은 월급제가 아니라 시급제, 즉 일한 만큼 시급으로 받게 되었다. 이 시급은 보건복지부에서 제공하는 예산으로 지급되는데, 문제는 해가 갈수록 최저임금 인상분만큼 그 예산이 늘어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윤혜연 회장은 “이런 불합리한 점들을 개선하고자 2016년부터 3년간 공동행동에서 투쟁을 하고 있지만, 전혀 변화가 없다”고 말했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돌봄지부 박대진 사무국장은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이 이렇게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을 받고 일하는 이유가 뭔지 생각해 봤다”며, “그건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의 특징이 중장년 여성분들이라는 점”이라고 분석했다. “정부가 중장년 여성들의 노동을 가치 절하하고 있다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윤혜연 회장은 또 “요즘 요양병원에 가면 간병노동하시는 분들의 대부분이 외국인노동자”라고 언급했다. “사회서비스 노동에 대한 임금이 워낙 낮으니까 일을 하려는 노동자가 별로 없고, 그 자리를 조선족을 비롯한 외국인 여성 노동자가 채우고 있다”는 것.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인 이들이 타인의 돌봄노동을 수행하고 있는 모순적인 현실을 꼬집었다.


‘낮은 수가’ 때문에 운영기관도 파산해야 할 판


사회적협동조합 양지돌봄 곽말라 사무국장은 사회서비스가 우리 사회에 가지고 온 긍정적 효과를 이렇게 평했다.


“사회서비스는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가사 및 간병 서비스를 제공하고 정서적 지원을 통해 사회와 소통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진행하는 서비스”이며, “그로 인해 노인과 장애인 등 사회적 활동에 취약했던 사람들의 외부 활동이 눈에 띄게 향상되는 효과를 낳으며 이제 우리 생활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제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지난 11년 동안 정부의 지나치게 낮은 수가의 책정으로, 사회서비스 제공 서비스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온케어경기 홍여옥 실장은 “올해 정부 수가는 시간 당 10,760원으로 보건복지부의 지침에 따르면 적어도 수가의 75%인 8,070원 이상을 노동자에게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올해 최저임금은 7,530원으로 주휴와 연차수당를 포함하면 9,413원, 여기에 사회보험료와 퇴직급여를 계산하면 최소 11,100원으로, 운영 기관은 정부 수가보다 많은 금액을 노동자의 인건비로 지급해야 한다.”


즉 사회서비스 운영기관은 “운영비도 남지 않는 상황에서 허덕이다 파산하던가, 아니면 최저임금 기준에 못 미치는 임금을 제공하여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 ‘사회서비스 전자바우처’ 운영 구조  ⓒ 일다(박주연)


홍여옥 실장은 “정부는 우리가 요구하는 12,700원이 그저 최저임금을 지급하기 위한 최소금액임에도 불구하고, 시간당 622원의 보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자리안정자금’ 지원으로 입막음을 하고 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사회적협동조합 양지돌봄 곽말라 사무국장은 “고작 최저임금을 요구하는 현실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사회서비스는 국가 기관인 보건복지부가 진행하는 사업인만큼, 요즘 지자체에서 많이 언급하듯이 최저임금이 아니라 ‘생활임금’으로 수가가 책정되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미투(#MeToo) 외칠 수도 없는 돌봄노동자의 노동 환경


기자회견에서는 생활임금에 대한 요구도 나왔지만, 안정적이고 좋은 일자리로서 환경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게 제기되었다.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돌봄지부의 박대진 사무국장은 “단지 돈 얼마 더 받아야 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이건 생존권의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회적협동조합 양지돌봄 곽말라 사무국장은 이 자리에서 어느 돌봄노동자의 이야기를 대신 전했다. 2005년부터 간병사업을 시작으로 현재 노인종합돌봄서비스와 가사간병방문도우미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요양보호사라고 밝힌 여성노동자의 이야기다.


“서비스를 받는 고객분들은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나 독거 어르신 등 생활에 어려움이 있는 분들입니다. 서비스 받는 분들이 생활이 어려우니,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는 환경도 조성되지 못합니다. 여름엔 집에 선풍기가 없는 집들도 있고, 선풍기가 있더라도 저희가 쓸 순 없습니다. 두 벌 정도의 옷을 챙겨가야 할 정도로 청소하고 나면 땀으로 범벅이 되고, 시원한 물조차 먹기가 눈치가 보일 정도입니다. 겨울에는 양말을 3겹 신고 일합니다. 이런 실정이니 물 쓰는 것도 세제를 사용하는 것도 아끼고 아껴서 사용해야 하는 곳이 바로 우리가 일하는 공간입니다.”


“저희가 하는 서비스는 청소 빨래만 하는 서비스가 아닙니다. 독거 어르신들의 사회와의 연결고리로 정서 상담도 진행해야 합니다. 고객 중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분들이 있어서 자살예방전도사 교육도 받았습니다. 어떤 때는 일하는 것보다 정서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더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저희 돌봄노동자들은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요즘 이슈화되고 있는 미투 운동에서 이야기되는 성희롱, 우리 돌봄노동자들은 매주, 매일, 매 시간 겪는 일입니다. 저는 현장에서 투명인간입니다. 아니,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고객 중 어떤 분들은 같은 공간에 있어도 실오라기 하나 입지 않고 대자로 누워 계시거나, 속옷을 바로 눈 앞에서 갈아입으시거나, 버젓이 야동을 보시면서 자랑스럽게 성적 농담을 합니다. 집에 친구들을 불러 술자리를 하면서 (우리를) 성적 농담의 안주거리로 만들기도 하고, 돈을 줄 테니 여관을 가자는 등의 언어적 성희롱뿐만 아니라 뒤에서 안거나 가슴을 만지는 행동들이 지금도 돌봄노동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구를 고발해야 될까요? 서비스를 받는 어르신들을 고발하면 돌봄노동 현장이 조금 더 나아질까요? 고발하면 일이 끊어지고 어르신들도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운데 현실은 누구의 몫일까요? 저는, 우리 돌봄노동자들은 국가를 고발하고 싶습니다.”


곽말라 사무국장이 대독한 이야기는 “저희도 돌봄노동자가 정당한 직업인으로 인정되는 사회에서 당당히 일하고 싶습니다. 돌봄노동이 모든 돌봄노동에 종사하는 분들에게 안정되고 좋은 일자리로 그리고 사회에 꼭 필요한 노동으로 인식되고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돌봄이 필요한 사회’, 사회서비스 노동이 하찮은가?


고령화 사회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율이 20% 이상)가 오고 있다고들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살면서 필수적으로 노인이 되는 과정을 거친다. 원치 않더라도 체력이 쇠약해지고 경제적 활동 능력이 떨어져 타인의 돌봄을 필요로 하게 된다. 꼭 노인이 되어야만 돌봄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은 너무나 많다.


그 돌봄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는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기자회견에서 노동자들이 외친 이야기처럼 그들의 노동은 적절하고 합당한 대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최저임금은 노동자들이 어떠한 노동을 하더라도 받을 수 있는 품위 유지의 최소한이다. 우리는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이라도 보장하라고 주장하는 작금의 현실이 개탄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아직도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그 문제조차도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서비스 노동을 하찮게 여길수록 사회서비스도 하찮아질 수밖에 없다. 정부와 국회는 우리의 요구와 같이 당장 사회서비스 바우처 수가를 현실화하고 사회서비스의 발전 방안을 논하라.” (사회서비스제도개선공동행동)


오랜 시간 요구해 온 사회서비스 노동자들의 외침이 이제 더 크게 울려 퍼져야 한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그 위험한 생리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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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험한 생리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2018 월경페스티벌을 앞두고


※ 5월 26일 개최되는 2018 월경페스티벌을 앞두고, 부산페미네트워크 청소년 활동가인 김이해 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지난 2년 ‘깔창’ 생리대와 ‘발암물질’ 생리대 파문


2016년, 한 청소년이 인터넷에 쓴 댓글로 저소득층 청소년의 월경 위생용품 사용 실태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생리대를 살 돈이 없어 깔창을 생리대 대용으로 쓴다는 이야기였다. 이에 대한 대부분의 반응은 ‘그런 일이 실제로 있느냐’는 것이었지만, 사실 나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나만 해도 중학생 시절 생리대 살 돈이 없어 휴지로 대신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를 거친 여성들에게 생리대는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내 주위에서 가장 보편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보건실에서 생리대를 ‘빌려’쓰고 다시 ‘반납’했어요.”


어딘가 부딪히고 까져서 보건실에 갔을 때, 방금 붙인 데일밴드를 내일 다시 가져오라고 말하는 보건교사는 없다. 하지만 생리대는 그렇지 않다. 더러는 생리대를 가져간 학생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다시 반납했는지 꼼꼼히 확인하는 학교도 있다. 생리대는 학교에서조차 온전히 여성청소년 스스로 부담을 안고 가야하는 생필품인 것이다.


▶ 대구 여성주의그룹 나쁜페미니스트 활동 사진


2017년, ‘깔챙 생리대’에 이어 ‘발암물질 생리대’라는 이름으로 월경 위생용품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확대되었다.


그 해 겨울 나는 학교에서 이상한 경험을 했다. 보건교사가 한 월경위생용품 회사의 이벤트에 당첨되었다며 생리대를 학생들에게 나눠준 것이다. 학생들은 공짜 생리대를 반겼다. 간혹 가져가지 않겠다고 하는 학생이 있으면, 대신 몇 개씩 챙겨놓는 학생도 있었다. 이벤트 물품은 얇은 비닐에 팬티라이너부터 대형 생리대까지 여러 종류가 담긴 ‘생리대 키트’였다. 이 안에는 발암물질 생리대로 논란이 된 브랜드의 생리대가 가득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이미지 광고도 되고, 팔리지 않는 생리대를 처분할 기회였던 셈이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 생리대를 받지 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경제권이 없는 청소년기, 매달 고정 지출로 나가는 생리대 값은 저소득층 여성청소년들에겐 너무나 큰 부담이다. 결국 이 ‘발암물질 생리대’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것들이 어떤 독성 물질을 지니고 있고, 얼마나 유해하며, 또 얼마나 논란이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들을 수 없었다.


이 두 가지 생리대 논란은 결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 여성들에게 생리대는 생필품이고, 생필품은 구매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없다. 월경 위생용품의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나오던 피가 들어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구매해야 하는 생필품이기 때문에 안전성이 무시되었고, ‘여성의’ 생필품이기 때문에 정부가 이를 제대로 감시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2017년 9월 7일 대구백화점 앞 광장. 대구지역 여성/시민단체들이 생리대의 모든 유해성분 전수조사 및 건강역학조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사진: 나쁜페미니스트)


월경 위생용품을 지원받는 대상은?


저소득층 청소년 생리대 문제가 이슈화된 이후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 및 각 지역 보건소에서 생리대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없어지지 않았다. 정기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저소득층 지원 대상가정의 자녀인지 확인해야 하고, 그 대상이 아니면 정기적으로 지원을 받을 수 없다. 게다가 학교 밖 청소년 지원센터에 비치된 생리대를 직접 가지러 가야 하는 등, 일상에서 꼭 필요한 물품임에도 여전히 접근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이 제한도 조정이 시급하다고 본다. 2014년 서울시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초경 평균 나이가 11.7세이고 10세 이하에 초경을 시작하는 청소년도 2.9%에 달한다. 그런데 이번에 생리대를 지원받을 수 있는 연령은 11세 이상으로 제한됐다.


그 대상을 저소득층 ‘청소년’으로 한정하는 것 역시, 소득이 일정하지 않고 생리대를 구매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한 성인여성은 해택을 받을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크다. 약 7천원(18개입 기준) 가격의 생리대로 매달 평균 두 봉지를 소비했을 때 연간 16만8천원을 필수적으로 지출하게 되는데, 평생 월경 기간을 감안해 계산하면 일회용 생리대 구입에 총 628만4천원이 든다고 한다.


지원 받을 수 있는 생리대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다는 점도 큰 문제다. 시중에는 생리대 뿐 아니라 생리컵, 탐폰, 면생리대 등 많은 위생용품이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건소에서 지원하는 위생용품은 생리대 한 종류다. 염증 등의 부작용 탓에 생리대가 아닌 탐폰과 생리컵을 사용해야하는 청소년들은 사용할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애초에 이들이 탐폰과 생리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것이다. 생리를 시작하면 가장 보편적으로 권하는 월경 위생용품은 생리대 한 종류뿐이다. 특히 삽입형 위생용품의 경우 잘못된 이해와 통념을 바탕으로 청소년기에 사용할 수 없는 분위기마저 형성되어있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보건시간에 다양한 월경 위생용품에 관한 교육을 하는 것이다. 단순히 ‘이런 것도 있다’ 수준에서 그치는 지금의 교육 방식으로는 절대 이러한 상황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피 흘리는 일이 자유롭도록


“너 그거 있어?” 역시나 학창시절 많이 주고받았을 질문이다. ‘그거’, ‘그 날’, ‘마법’, 또는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살 때면 꼭 꼭 숨겨 담아주곤 했던 검은 비닐봉지. 그것을 ‘센스’라고 포장하고 소비했던 시간들. 돌이켜보면 우리는 한 번도 피 흘리는 일에 자유롭고 당당했던 적이 없었다.


▶ “어떤 피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 2018 월경페스티벌 웹자보


이러한 현실에서, 5월 26일 정오에 하자센터 앞마당에서 열리는 월경페스티벌은 더욱 상징적이다. 5일 동안 28일마다 한다는 평균 월경 주기에서 따온 날짜인 5월 28일 ‘월경의 날’에, 세계 각지에서는 ‘피 흘리는 일’을 조금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한 월경 정책과 교육들이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밖으로 드러내는 것조차 어려운 이 사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더 이상 피 흘리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여성들이 목소리 높여 월경에 관해 떠들고,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알리는 것이다.


깔창생리대 문제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일회용 생리대의 안전성 문제도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여전히 그대로다. 우리는 지난 2년간 쏟아졌던 월경 위생용품에 관한 이슈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더 치밀하게 감시하고, 요구해야한다. 피 흘리는 일이 자유롭도록.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드라이버밖에 쓸 줄 모르는데 햇빛식품건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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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버밖에 쓸 줄 모르는데 햇빛식품건조기를?

[도시에서 자급자족 실험기] 공구를 익히듯 나를 발견하다


※ 필자 이민영님이 목공을 배우고 적정기술을 익히며, 동료들과 함께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도시를 꿈꾸면서 일상을 제작해나가는 과정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햇빛식품건조기 제작으로 시작하는 목공


“햇빛에 말린 식재료는 맛이 더 응축되죠. 토마토를 햇빛식품건조기에 넣어 말려보세요. 감칠맛이 배가될 거예요. 얼마나 말려야 하는지는 어떤 요리를 만드느냐, 그날의 일조량과 건조도는 어떠냐에 따라 다릅니다. 몇 가지 조리법을 알려줄게요. 앞으로 더 많은 조리법을 개발해서 소책자를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당장 다음 만남에서는 말린 식재료로 조리한 음식을 내게 선보여주세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후지무라 센세가 알려주신 햇빛식품건조기 만드는 법은 이 말과 함께 설계도 한 장이 전부였다. 목공을 하게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레 닥칠 줄이야. 센세, 전 노루발 하나 바꿔달지 못해 우리 집 현관문이 여닫을 때마다 쿵 하고 닫히는 걸 내버려 두고 있다고요. 그런데 다음 달 센세가 한국으로 오시기 전까지 햇빛식품건조기를 목재로 만들어 놓으라고요?


측정하기, 고정하기, 자르기, 뚫기…. 교과서처럼 체계적으로 기초부터 시작할 줄 알았건만, 나의 첫 목공은 햇빛식품건조기라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학습 목표로 거침없이 찾아왔다.


▶ 완성된 햇빛식품건조기가 놓인 풍경 ⓒ오수정


자의 개수만큼 넓어지는 목공의 세계


목공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기 전, 공구의 종류와 사용법부터 배우기로 했다. 이부터 신세계다. 자만 해도 그렇다. 삼각자, 모양자, 방안자 정도가 전부였던 내 머릿속 자의 세계에 곱자, 철직자, T자, 각도자, 수평자까지 정신없이 수많은 자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진돗개, 푸들, 삽살개, 요크셔테리어 정도가 전부였는데 강형욱 조련사가 등장했다고나 할까.


정밀한 측정이 필요한 목공에 다양한 자가 있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름이 쉽사리 외워지지 않는다. 한동안 ‘연기자’인줄로 알았는데 ‘연귀자’라니. 여전히 자의 이름과 사용법을 적확하게 이해하고 사용하지는 못하고 있다. 감각적으로 지난 번 누가 이 작업을 할 땐 이 자를 쓰던데, 또는 이 작업해보니까 이 자를 쓰는 게 편하던데 하는 식으로 공구함에서 자를 꺼내 쓴다.


세상엔 내가 아직 모르는 얼마나 많은 모양의 자가 있는 걸까. 그리고 각기 다른 자의 명칭과 용도만큼 얼마나 더 넓고 다양한 목공의 세계가 있는 걸까. 목공뿐 아니라 이 세상은 내가 모르고 지나치는 얼마나 다채로운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는 걸까.


▶ 목재와 공구를 늘어놓고 햇빛식품건조기 조립순서를 확인하고 있다. ⓒ박새로미


목공하며 드러나는 동료들의 성향


자야 익숙한 도구니 쉽게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지그소, 원형톱, 테이블톱 등 평소 쓸 기회가 없었던 공구들은 오히려 사용법을 처음 익히기 때문에 배우기 어렵지 않았다. 도리어 자를 대고 원하는 지점까지 줄을 긋는 천편일률적인 자의 이용법을 확장하는 일이 어려웠다.


원거리의 점과 점을 이으려면 측정한 치수에 점을 찍는 방식이 아니라 측정한 지점을 가운데로 놓이게 V를 표시해 선을 긋고 싶은 양쪽의 두 V의 꼭짓점을 잇는, 더 정확하지만 새로운 측정법을 익히는 일이 몸에 금방 배지 않았다. 머리로는 알겠다 싶은데 하다보면 자꾸 예전 버릇대로 줄을 그었다. 재확인하면 영락없이 치수가 다른 상황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악기 운지법부터 바이엘, 체르니30, 40, 50… 정규 과정을 순차적으로 밟는 배움에 친숙했던 내게, 갑작스레 피아노 연주로 고백 방식을 결정해놓고 연주곡을 연습하듯 떠듬떠듬 목공을 배우는 일은 묘하게 즐겁고 설렜다. 홀로 작업하지 않고 셋이 모둠을 이루어 작업하다보니 제작자 한 명 한 명의 성향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H가 재단한 목재는 나사를 박으면 한 치의 오차 없이 딱 들어맞고, J는 문제가 풀리지 않아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러 다녀오는 동안 홀로 요리조리 들여다보곤 해결해버렸다. 목재를 잘못 절단해 아깝게 버리게 되었을 때 S는 궂은 내색 하나 없이 ‘괜찮아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며 마음을 풀어준다. 몸을 부대끼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그 사이의 간극은 말로 메우는 형태의 관계 맺기는 낯설지만 편안하고 끈끈했다.


▶ 조립을 마친 햇빛식품건조기를 도색하고 있다. ⓒ신수미


목공을 배우듯 관계를 배우다


글을 쓸 때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적어보고 문단을 구성하듯, 목재를 고르고 공구를 다루고 목제품을 만든다. 무엇 하나 손에 익지 않은 나는 매번 동료의 도움을 받는다. 나사 하나 박으면서 뒤편의 목재가 밀리지 않게 잡아줄래 부탁하고, 긴 목재를 자를 때면 쳐지지 않게 받쳐줄래 요청한다. 클램프로 고정하고 버팀목을 괴면 될 일인데 말이다.


몸이 굼떠 더디기도 하고 일이 느려 미처 생각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도와 달라 손 내밀고 그 손을 기꺼이 잡아주는 동료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일이 좋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지 물어보고 상대가 고개를 끄덕여주며 작업할 때야말로 함께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동료와 손발이 탁탁 맞는다는 느낌이 들 때의 쾌감은 목제품이 완성되었을 때의 행복감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내 손으로 만들어지는 걸 지켜보는 황홀감은 크다. 하지만 목공을 하면서 그보다 더 크게 느낀 기쁨은 내가 수다스럽게 누군가와 쿵짝대는 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점이다.


손기술이 젬병인 내게 목공을 배우는 일은 우리 집을 내가 만든 목가구로 채워야지 가열한 포부와 거리가 멀다. 머리를 맞대어 설계를 고쳐나가고 목공을 마친 뒤 컴프레서로 서로 옷에 묻은 톱밥을 털어주는 일상의 충만감을 늘리는 일에 가깝다. 그 만족감이 자연스레 기술의 습득과 발전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진실을, 난 왜 오랫동안 잊었던 걸까.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고용불안과 성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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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신분’을 얻기 힘든 성소수자들

[성소수자, 나도 취준生이다]④ 고용불안과 성정체성


성소수자 청년들의 취업과 노동을 이야기하려 한다. 소위 ‘일반’ 청년들의 노동에 있어 접점과 간극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모두 헬조선이라 불리는 사회를 살아가는 20~30대지만, ‘청년’이라는 이름으로만 묶일 수는 없다. 취업 키워드를 통해 성소수자들과 비성소수자들의 삶을 살폈다. 그렇게 찾아낸 공통분모들이 우리 시대의 청년노동에 대해 말해줄 것이라 믿는다. [기록노동자 희정]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안정적인 직장을 찾아서


강표를 만난 느낌을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부러웠다. 아직 이런 직장이 있구나. 취재 때문에 비정규직, 기간제, 파견직 그런 고용형태만 쫓다가 강표가 말하는 평생직장 이야기를 들으려니 적응이 안 됐다. 강표는 공무원이었다.


“경쟁이 없어요.” 


강표에게 장그래의 <미생>은 드라마 속 이야기일 뿐이다.


“일단은 잘릴 걱정이 없으니까. 진급 같은 게 있어도 연차에 따라 하는 경우가 많고.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저는 큰 욕심이 없거든요.”


공무원이 되기 위해 2년간 고시생 생활을 했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집과 학원을 오가는 거리에서 느꼈던 박탈감에 대해 잠시 이야기 나눴다. 어쨌든 강표는 또래들 눈에 보기에는 성공한 인생이다. 그러나 잘릴 걱정 없다는 안도에는 이면이 있었다.


강표는 자신의 성적 지향이 밝혀진다면 직장에서 해고나 불이익을 당할 것을 염려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강표는 자신을 ‘울지 못해 웃는 사람’이라고 했다. “어떤 연구 결과에 그런 게 있대요. 우울한 표정을 짓는 게 훨씬 더 힘들다고. 굳이 더 힘들게까지. 울지 못해 웃고 있어요.” 강표는 남자를 사랑한다.


홍석천씨가 커밍아웃한 후 방송 하차를 겪던 15년 전이 아니다. 2017년 한국갤럽은 ‘동료가 동성애자임이 밝혀져 해고된다면 이것이 타당한가’를 물었다. 응답자 중 80%가 ‘타당하지 않다’고 했다. 7년 사이 17%나 증가한 수치였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는 타당하게 해고됐던가. 해고의 용이함도 7년 사이 17%는 넘게 늘었을 게다.

 

그래도 강표는 정규직이다. 해고와 인사이동에 대한 문서화된 규정이 있는 직장. 이 사실이 강표를 안도케 했다. 그럼에도 아웃팅될 순간을 두려워한다. “걱정되죠. 누가 제 핸드폰이라도 본다면…” 인사고과나 업무평가에 부당함을 겪지 않을까. 그것이 아니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해야 한다. 강표는 자신이 없다고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약점’이라고 했다.

 

“제 약점들로 인해 내가 드러날까 봐 뭘 못 하겠는 거예요. 남들과 경쟁관계가 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두렵고. 그래서 더 안정적인 직장을 찾게 된 거고. 공무원은 경쟁 같은 걸 안 해도 평생 자리를 보장해주니까요.”


안정된 직장의 ‘함정’


그런데 안정적인 직장은, 바로 그 속성 때문에 강표를 위협했다.


“직장동료들이 ‘평생 간다. 이 사람이랑 계속 같이 근무를 해야 한다’는 게 있으니까. 소속감이 강해요. 서로 챙기고 알려고 하는 게 있어요.”

 

보통 공장에 인력업체를 통해 파견노동을 가면 며칠간은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는다. 곧 떠날 사람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며칠이나 일하다가 갈지 모른다는 생각. 한 주 정도 지나야 눈길도 주고 말도 건다. 강표의 직장은 그 정반대의 경우다. 이제 몇 안 남은 평생직장. 내 옆의 동료가 정년까지 함께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소속감을 강조하고 서로간의 일상을 공유하려 든다.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한국사회에서 인기 있는 사생활은 연애와 결혼(가족)이다.


20대 중반 나이에도 강표는 결혼 압박을 받는다. 그래서 가상의 여자친구를 만들었다. 그 여자친구와 이별도 한다. 가짜로 할 수 없는 결혼이 걱정이다. “팀 사람들은 거의 다 결혼했어요.” 책상마다 아기 사진 하나씩 올려놓은 풍경이 ‘일반’이다.


강표는 동료들의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더욱 존재를 숨겨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괴리가 든다. 평생을 “가면 쓰고” 살아야 하는가. 강표는 성적 지향을 밝힐 수 없는 상황을 스스로 납득시켜보려고 한다. “직장동료라 해도 내 잠자리까지 밝힐 필요는 없는 거잖아요.” 곧 체념하긴 한다.


자기만의 길을 가는 박탈감


정규직이라 행복한 이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린다. 동료들에게는 당연한 권리가 자신에겐 오지 않는다. 숫자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차별에는 수당이 있다. ‘정상가족’을 중심으로 배치된 각종 수당(가족수당, 배우자 관련 경조비 등)에서 제외된다. 공무원인 강표의 경우 연금도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다. “저는 죽으면 연금을 다 국가에 줘야 해요. 나라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ㅎㅎ” 법이 인정한 배우자가 없다. 20년간 근속한다면 유족연금 금액이 1억원 쯤 된다고 했다. 동성혼이 합법화되지 않는 이상 강표는 애국자다.


그러나 숫자로 확인되는 차별보다 박탈감을 주는 건 따로 있다. 내 삶이 ‘일반’과 다른 궤적을 걷는다는 생각 때문이다. 교사인 영진은 다른 동료들의 삶을 “그림이 그려지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삶. 아파트에 층층이 들어선 집들 마냥 정형화된, 그러나 같아서 안심되는 삶. 영진은 자신이 이 그림에서 벗어났다고 했다.

 

“제 길을 그냥 가는 거라 생각해요. 그런데 그 마음먹기까지 굉장히 외로웠어요.”

 

한눈에 보아도 착실하고 바른 학생이었을 것 같은 사람. 그런 이가 사회에서 인정하지 않는 길을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얼마나 갈등이 컸을까. 영진은 ‘평범히’ 결혼하고 자녀를 낳는 삶에서 멀어졌다. 동료 교사들은 대부분 서른 전에 결혼을 한다고 했다. 

 

“보통 100명 중에 3명만 결혼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3명이 되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3명 중 한 명인 영진은 덤덤하나 걱정한다.


비정규 파견직 성소수자들


걱정을 할 필요도 없는 성소수자들도 있다. 같은 교사지만 B는 결혼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한다. (<나, 성소수자 노동자>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노동권팀, 2011년 12월) 동료 중 “서른 넘고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는 기간제 교사다. “연애 해야지” 주변에서 말은 하지만 막상 이성을 소개시켜주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이유야 알만하다. 기간제 교사 B는 ‘정규직이 그리는 그림’에 낄 수 없다.


그 그림은 익숙한 동시에 낯설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만 ‘우리’의 삶이라 할 수는 없다. 우리 부모들이 걸어온 삶이다. 호황기 시절, 그것도 중산층 부모들의 삶. 그 삶을 답습할 수 있는 건 한줌 사람들이다. 20대 때 무슨 결혼인가. 취업준비와 학자금 갚기도 버겁다.


그런 의미에서 B는 강표나 영진과는 접점만큼이나 거리감도 커 보인다. 젠더(남성)와 성적지향(동성애)이 동일함에도 말이다. 어쩌면 노동에 있어서는 지민과 공통분모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지민은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비정규직-파견 직원이다.

 

노동의 유연화는 비정규직, 계약직, 파견직을 ‘일반’적인 고용형태로 만들어놨다. 파견허용 업종은 꾸준히 확대되고 사무직도 예외는 아니다. 지민과 같은 20대의 적지 않은 수가 파견직원이 된다. 지민은 첫 번째 직장에서 국가기관 지원 사업을 했다. 그러나 고용에 있어 공공기관과는 어떤 연관도 없었다. 행정보조를 하는 파견업체 직원일 뿐이었다. 그 후 세 차례 일을 옮겼는데, 무슨 일을 하던 연봉 2천만 원 미만, 1년 계약. 조건은 동일했다. 그 외에도 야근수당이 지급 안 되거나 정규직이 받는 수당에서 배제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파견 ‘여직원’일 뿐인 지민은 동료들과 사적인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다. 동료라 부를 사람도 별로 없다. 지민의 업종만 따로 파견직을 둔 거라, 어딘가 외떨어졌다. 그래서 강표가 말한 “내 잠자리를 밝힐 필요”를 상대적으로 덜 느꼈다.

 

▲ 2011년 11월 11일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주최로 열린 <나, 성소수자 노동자> 토론회 웹자보


알바 인생 성소수자들

 

지민은 직장에서 업무 관련 대화 말고는 거의 하지 않는다. 영진은 교실에서만 종일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을 만족해한다. 강표는 동료들의 챙김과 오지랖을 부담스러워 한다. 누군가는 관계의 단절이라 하고, 누군가는 섬이라 표현하고, 누군가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 말하는 관계들. 이성애/성별이분법 중심의 언어가 판을 치는 공간에서 이들은 말문을 닫아버렸다. 그것대로 차별 받는 중이다.


그리고 여기,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있다. 불안정 노동이면서 도무지 사장과 직원, 그리고 고객들과 거리두기가 가능하지 않는 일터. 을(乙) 중 을(乙)이다. “나이도 어린 게” “사장 나오라 그래”를 외치는 고객들과 “얼굴 보고 뽑을 거다” 당당히 내뱉는 사장 사이에서, 성희롱을 겪거나 폭력에 노출돼도 대처할 방법이 딱히 없다.

 

“손님들이 저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저는 남자가 아니에요.” (나이스, 20대, 트랜스젠더 여성, 알바노동자)

 

카페 알바를 하며 나이스는 성 정체성 따윈 알 것 없는 고객과 사장에게 시달렸다. 남자라고 말 험하게 하고, 남자끼리 어떠냐면서 함부로 몸을 부닥친다. 힘쓰는 건 남자가 해야지, 더러운 건 남자가 치워야지. 물통 들고 쓰레기 버리는 일에도 나이스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되새김질해야 했다.

 

알다시피 여자로 알바하기가 편한 것도 아니다.


“사장이 남자직원에게는 말을 험하게 해요. 농담으로 ‘너 죽여 버린다.’ 여자들에게는 고분고분 말하는데, 대신 손으로 터치하거나 어깨를 만진다거나.”

 

이들은 자신이 받는 차별과 불편을 이야기할 수 없다. 영진처럼 직장 내 개인공간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지민처럼 거리두기가 가능치도 않다. 강표처럼 평생 같이 볼 동료들이라는 마음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이들에게 활로란 그만둠이다. 사장님들은 한마디 하겠지.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서.”

 

‘생계형 아르바이트’ 굴레

 

안타깝게도 아르바이트는 학생 때 잠시 하는 인생 경험이 아니다. 많은 이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장기 일자리이다. 최저임금, 퇴직금 등의 문제가 있어 단기 일자리로 위장하고 있을 뿐. 특히 ‘일반인’을 원하는 ‘일반 직장’의 높은 문턱은 트랜스젠더들의 알바를 생계형 노동으로 만든다.


외양이 다르면 고용하지 않는다. 주민등록 앞 번호와 성별표현이 맞지 않으면 면접 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그나마 기업과 국가가 양보한다며 하는 얘긴 “성전환 수술을 하고 와라”다. 우리 사회는 의학의 힘을 빌려 성별전환을 완료(?)하지 않은 이들을 트랜스젠더로조차 봐주지 않는다. “수술 안 했으면 아직 남자 아니야?” 직업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때로 성전환 수술은 선택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인식된다.


그런데 트랜지션(성전환 수술 및 호르몬 치료) 비용이 만만찮다. 트랜스여성 평균 1천515만원, 트랜스남성 평균 2천57만원(“한국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 관련 경험과 장벽”, 김승섭 외, 2018년 3월) 여기에 회복기간 동안의 생계비, 해외수술일 경우 체류비까지 더해야 한다.

 

온전히 개인 부담이다. 다른 OECD 가입국들처럼 의료보험에 기대볼 수도 없다. 20대 초반부터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전전한다. 비용을 마련하기 전까지 성별정정은 유예되고, 그럴수록 일정 금액 이상을 받을 수 있는 안정적인 일자리도 멀어지는 악순환을 겪는다. 수술을 했다 해도  비용은 고스란히 개인 빚이 된다. 마치 ‘대졸’이 아니면 취업시장에 입성조차 할 수 없기에 학자금 부채를 져야 하는 젊은 인생처럼 말이다. 트랜스젠더들은 1~2천만 원짜리 졸업장 같은 빚을 지고 나온다. 양쪽 다 알겠지만, 막상 사회에 나오면 졸업장 따위는 별 소용이 없다. 입장권일 뿐이다.

 

다른 이들도 알바 인생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성별표현과 법적성별이 같다고 해도 말이다. 존재(의 커밍아웃)로 인해 가족과의 연이 끊길 가능성도 크다. 가출하거나 독립하거나 가정폭력으로부터 도피하거나. 혼자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알바 쳇바퀴 인생이다.

 

성소수자 내 고용의 격차

 

비정규직-알바 인생 20대와 정규직 20대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있다. 거리감은 ‘고용형태’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자라온 환경부터 다른 경우가 많다. 가족은 “부 뿐만 아니라, 문화자본, 인맥, 건강, 외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혼자서 보는 영화> 정희진, 교양인, 2018)라 했다.


요즘 세상에 정규직이 되려면 문화/경제적 자본이 필요하다. 서울대 합격률이 아파트 가격과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조사연구(<부동산 계급사회> 손낙구, 후마니타스, 2008)부터 20대 대졸자의 아버지 34%가 대졸자, 47%는 정규직이라는 조사결과까지(2017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부가조사) 증거는 무수하다. ‘할아버지의 재력, 어머니의 정보력, 아버지의 무관심’은 교육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정규직을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신분’이라 부른다. 신분질서는 위계를 정당화하려 든다. 옛적 귀족 지위를 보장해준 것이 혈통-고귀한 피였다면, 요사이 정규직 신분을 정당화하는 것은 자기관리와 경쟁에서의 성취라는 환상이다.

 

그런데 ‘성취’는 불안 요소가 적절하게 제거된 이들의 리그다. 가정형편, 장애, 질환 등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수많은 것이 불안요소로 작용한다. 여기에 성정체성도 들어간다. 학창시절에는 아웃팅, 왕따, 학교(교사) 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있다. “아닌 척 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어요.” 일이나 공부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사회에 나와서는 면접 기회를 박탈당한다. 뽑혀도 이직이 잦다. 기업이 취업재수생도 뽑지 않는 시절에 이직이라니. 남은 인생이 그려진다.

 

정규직이 된 성소수자들은 그런 위험 요소들을 ‘이겨낸’ 이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의지와 노력조차 ‘패싱(passing, 어떤 사람을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여기게끔 외양과 행동을 위장하는 것)에 유리한 몸인가’ 하는 조건에 영향 받는다. 소위 말하는 ‘정상’ 몸으로 숨김이 가능한가. 단순 비교를 해보자. 젠더퀴어(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성정체성)인 마늘과 게이 정체성을 가진 영진. 사범대 학생인 마늘은 졸업과 채용의 필수조건인 교생실습을 나갈 수 있을지 미지수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교생을 받아줄 학교가 있을까. 반면 성적 지향을 드러내지 않은 영진은 교사가 되는 일이 가능했다.


이를 증명하듯, 2014년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는 트랜스젠더들이 다른 조사자들에 비해 학력과 소득수준이 더 낮고 고용상태가 불안정함을 보여준다.(2017년 6월 SOGI법정책연구회 주관, 김수영 “트랜스여성의 노동과 복합적인 젠더실천”에서 재인용) 특정한 몸이 사회적 성취(?)를 누리는 데 불리하다. 모든 것을 개인 능력으로 성취하라는 사회지만, 성취는 의지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성소수자 내에서도 몸의 ‘정상성’과 인적/물적 자원에 따른 위계가 있다.


▲ 성소수자 노동자들과 이들의 노동권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비영리기구 <일터의 자긍심> 캠페인 이미지 ⓒPride at Work Canada


불안의 확장


불안은 늘 성소수자들과 함께했다. 오늘 안정적 직업을 가질 수 없는데, 내일의 안정을 바랄 수 있을까. 그 내일을 혼자 살아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안정이란 ‘가족의 형성’에 뿌리를 둔다. 그 ‘정상가족’을 이루는 성애와 (법적)결혼에서 배제된 이들에게 노후는 ‘혼자’ 감당해야 할 무언가다.


“벌이에 대해 별로 불만이 없어요. 얼마 못 버는데도. 내가 오래 살 거라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요. 늙어서까지 혼자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면 더 불안하니까. 오래 살 생각을 안 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할지도.” -지연, 20대, 에이섹슈얼(타인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거나 현저하게 낮은 경우), 현재 제조업 근무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시대는 이들을 외롭게 두지 않는다. 불안의 지평을 넓히는 중이다. 보수적으로 측정된 정부 통계마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최근 10년 사이에 두 배로 벌어졌다고 말한다. 좋은 일자리는 축소되고 비정규직은 늘어나고 사회적 안전망은 미비하다. 한 사람이 나고 자라 결혼까지 하는 데 드는 사회적 비용은 엄청나다. 개인이 감당할 수 없다.


감당할 수 없음의 직접적인 표현은 ‘n포’였다. 결혼도 포기한다. (여성들의 ‘비혼’ 선택은 단순한 ‘포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만) 너무 ‘신성’해서 동성애자들에게 결코 ‘허락’해줄 수 없다는 그 결혼 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비정규직 계급의 포기와 불안은 성정체성의 차이를 뛰어넘어 글로벌하게 확장되는 중이다.


구매해야 하는 시민권


비혼을 선택하거나 결혼을 포기했다. 그래봤자 남는 건 또다시 불안이다. 우리는 가족을 사회구성의 기본 단위라 배웠다. 거기서 낭만적 요소를 빼면, 생계를 유지하는 모든 돌봄을 ‘가족’ 단위에서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남는다. 노후의 돌봄 또한 마찬가지다. ‘효’의 영역이라 했다. 가족이 없다면?돈으로 구매해야 하는 돌봄이 남는다. 돌봄을 구매할 능력이 안 된다면? 노후불안은 자연스레 ‘고독사’로 연결된다. 비용감당이 안 돼 결혼을 포기했더니, 이번에는 돌봄(비용)이 감당 안 된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어디 돌봄 뿐이랴. 모든 것이 개인의 비용으로 처리된다. 취업도 마찬가지다. 학자금 빚지고 졸업해, 대출받아 어학연수 다녀와, 무급인턴을 거치며,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얻기 위한 비용을 개인이 감당한다. 그렇게 공들여 사들인 것을 우리는 ‘능력’이라 불렀다.


능력이 구매의 최종 결과물은 아니다. 능력이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조건일 뿐이다. 우리가 사들인 것은 ‘시민권’이다. 천부인권이라는 말은 헌법에나 있는 좋은 소리. 이 시대 시민들은 시민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능력(쓸모)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권리를 가진다.(노동 또한 권리이다.)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남들보다’ 두세 가지 과정을 더 거치는 게다. 추가비용이 든다. 성전환 또는 엄격한 패싱. 트랜스젠더의 경우 천만 원 단위 비용을 들여 전환(수술)을 해야 한다. 그래야 면접장에 들어갈 수 있으며, 노동하는 국민으로 시민권을 얻는다.


신자유주의 시민권(성원권) 획득은 비용지불로 이뤄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제일의 성취는 구매이다. 동시에 배제의 기준조차 돈이다. “소비력이 없는 사람들부터 추방이 이루어”진다.(<한국남성을 분석하다> 엄기호 외, 교양인, 2017) 스펙도, 성별도 살 수 없는 하류시민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한’ 밑바닥 불안정 노동으로 간다.


비용과 구매의 전쟁


시민권(또는 성원권)을 얻기 위해 20/30대가 감당해야 하는 비용은 너무 크다. 젊음을 갖다 바친다. 그나마 비용이 덜 드는 ‘시험’으로 몰린다.(2017년 공무원 시험 경쟁률 46.5:1) 세상의 불공정함은 다 아는 일이다. 주관적 판단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입사채용보다, 소수점자리마저 확인 가능한 점수를 택하겠다는 판단도 있다.


그 소수점이 ‘공정’의 상징이 된다. 점 아래 숫자 몇 개가 주는 명확함을 붙잡고 안도를 찾아야 할 정도로 경쟁은 치열하다. 강표는 “파이는 이미 바닥났다”고 했다. 취업준비생들은 (누군가 가져가) 몇 조각 남지 않은 파이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다.


경쟁한다. 치열하다. 모든 획득과 성취가 ‘개인’에게 맡겨진 사회에선 당연한 일이다. 결국 어떤 개인이 더 잘 ‘구매’하는가만 남는다. 취업에 쏟는 ‘시간’마저 자본주의의 구매 목록이다.(‘시간이 금이다’는 근대의 발명품 같은 말이다) 구매할 능력 없음은 간단한 말로 치부된다. ‘무능’. 비용 부족으로 인한 결과는 온전히 개인의 책임이다. 우리는 불안하므로, 세상에 ‘불안요소’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빈곤도 차별도 ‘나’ 또는 ‘너’의 문제다.


모든 것을 구매해야 영위되는 삶. 이것이 사회적 소수자들이 그토록 바라는 ‘그림이 그려지는’ ‘일반의’ ‘평범한’ 삶의 모습이라니, 그 또한 불안하다. (희정 / 기록노동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엄마와의 불행배틀

세상의 모든 딸들이 내가 겪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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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여성할례’ 악습이 전부 폐지되는 날까지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빈투 보장②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에서 제작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이며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나는 여성성기훼손 피해자다”(I am a victim of Female Genital Mutilation) 편의 주인공은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독일로 망명한 20대 초반의 여성입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강제 결혼, 면도날로 내 성기의 봉인을 푼 날


내가 할례를 당하고 나서 5년 뒤에 사람들은 결혼을 강요했다. 5년 뒤니까 나는 16살이었다. 상대 남자가 몇 살인지는 몰랐다. 내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그 사람의 성이 나와 같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형제든가 친척으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사람 역시 성이 ‘보장’(Bojang)이었다. 나는 그 남자를 우리 마을과 가족의 어른으로 알고 있었고, 아버지를 부르듯이 ‘바’(Ba)라고 불렀다. 몇 살인지는 몰랐지만 아버지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그 사람은 부인이 이미 셋 있고, 내가 네 번째가 될 참이었다.


사람들이 나에게 오늘 결혼식을 한다고 했을 때 믿을 수가 없었다. 라마단 기간 금요일이었다. 지금도 그날을 잊을 수 없다. 모스크에 갔다가 돌아오니, 집에 사람들이 있었다. 아주 많았던 것은 아니고 내가 이모라고 부르는 여자들과 더 나이든 여자가 있었다.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그 여자들을 따라가라고 했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버지의 부인들 중 하나가 천을 가져왔다. 여자가 결혼할 때 입는 특별한 천이었다. 남편 집에 가는 첫날에 사람들이 신부에게 그 천을 주는데, 그러면 무늬 없이 새하얀 천과 함께 그걸 둘러 입는다. 그 흰 천이 처녀 피가 닿아야 할 곳이다. 그게 모든 사람들에게 신부가 처녀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어떤 남자도 이 여자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 남편이 그 여자를 아는 첫 남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천을 보여주는 그날 밤, 여자들은 자신이 결혼한다는 것을 곧바로 알게 된다.


사람들이 그걸 가져왔을 때 나는 “누구한테요?”라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대답은 않고 자기들과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남편 이름을 모르고서는 어디로 갈지 몰라요”라고 하면서 울었다. “안 갈래요.” 아버지는 말했다. “아니, 너는 저 사람들을 따라가는 거다. 그게 네가 원한 바니까.”


아버지 말은 결혼이 내가 할례의 비밀을 공개적으로 발설해서 일으킨 문제를 책임지는 벌이라는 의미였다. 나는 당시 선생님에게 다 털어놨고, 선생님은 나보고 TV에 나가서도 말할 수 있겠냐고 했다. 선생님은 글로도 쓸 수 있겠냐고 물었다. “네, 쓸 수 있어요.” “비디오 인터뷰를 할 수 있겠니?” 선생님들은 나를 방송국으로 데려갔고 나는 모든 걸 말했다. 사람들을 내 증언을 녹화해서 방송으로 내보냈고 우리 가족에겐 끔찍한 일이 되었다. 우리 아버지가 그런 일에 대처하는 마을 대표였다. 대처해야할 일이 다른 가족이 아니라 바로 우리 가족에게 생긴 것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찾았고 긴급 회의를 열었다.


사람들은 나를 나이 많은 여자에게 데려갔다. 아프리카에선 화장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지? 화장실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에 있다. 사람들은 나를 변소가 있는 공터 오렌지 나무에 묶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나를 거기 두고 본다고 했다. 나는 다행히도 잠이 들었다. 사람들은 나를 때리기도 하고 여러 가지를 했다. 그러다가 이제 나를 결혼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아버지의 비밀 대책이 바로 그거였다. 아버지는 생각했겠지. “그 애가 결혼하면 학교를 관두게 될 거야. 서구교육 때문이야. 그래서 내 딸애가 겁이 없는 거야.” 고향 사람들은 내가 서구식 교육을 받아서 전통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를 최대한 빨리 결혼시켜서 다 잊어버리게 하려고 했다. 학교를 관두고 전통을 따르도록 말이다. 그렇게 된 거였다.


사람들은 나를 그 남자의 집에 데려가서 처녀성을 풀었다. 그 남자는 다른 여자들 앞에서 나와 자야했다. 내가 완강하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남자와 안 잘 거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했다. “술레만, 당신은 사악해! 당신 정말 나빠. 꺼져버려. 천둥이 내려버려라.” 나는 그 사람을 모욕하고 저주하며 말했다. “신이 당신을 벌할 거야. 정말 나빠! 나 말고 당신 딸이랑 결혼하지 그래?”


내가 저항하는 와중에 일어난 일은, 면도날 아시는지? 사람들은 면도날을 가져와 두개로 쪼개서 내 거기에다 대고 봉인을 풀었다. 그러고 5초 내에 남자가 여자와 자야지, 아니면 다시 닫혀버린다. 아, 자매들, 정말 쉽지 않았다. 겪어보지 않고는 아무도 이해 못할 것이다.


여기 독일에서도 나와 같은 문화와 전통에서 온 여성들을 많이 만났지만, 이야기하기 쉽지가 않다. 그들은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내가 단합해서 이런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자고 하면 날더러 미쳤다고 할 것이다. 몇몇은 심지어 나와 연락을 끊기도 할 것이다. 전화하면 안 받고 번호를 차단할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 사람들을 나를 급진적으로 본다. 유럽까지 왔으면서도 그들의 눈은 아직 닫혀있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고, 아직도 말을 꺼냈다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내게 이 야만적 행위를 같이 멈출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98%에 달하는 15-49세 여성들이 성기훼손수술을 받는 소말리아에서는 2016년부터 정부가 나서 전면 금지 법안을 추진 중이다. ‘할례’를 받아야 좋은 조건으로 결혼할 수 있고, 불결한 여자라는 낙인에서 면한다는 가부장적 문화 때문에 당사자 여성들 중에서도 1/3정도만 할례 폐지에 찬성한다는 여론 조사 결과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글로벌 온라인캠페인 단체인 ‘아바즈?행동하는 세계 (AVAAZ)’에서 소말리아 여성성기훼손 폐지를 위한 150만 명 청원이 진행 중이다. (한국어 링크: https://secure.avaaz.org/campaign/kr/fgm_somalia_ban_loc)


독일에서 체류권을 받았지만,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


독일에서 인도적 이유로 체류 허가를 받기까지 3년이 걸렸다. 사람들은 내 망명신청을 거부 했었다. 내가 TV에 나간 적 있다고 했는데, 그 증거가 되는 녹화테이프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방송국에 데려가서 할례에 대해 증언하게 했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들은 왜 녹화테이프가 없냐고 했다. 내 망명신청을 거부한 담당자는 여성이었다. 이 여자를 다시 마주칠 기회는 없겠지만, 사실 그 사람에게 묻고 싶었던 것 한 가지는 ‘당신은 다른 여성들의 안녕에 관심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어떻게 나 같은 16살짜리 여자아이가, 간신히 도망쳐온 아이가 방송국에 가서 녹화테이프를 달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독일로 오게 될 지도 몰랐다. 단지 안전한 곳을 찾았을 뿐이다. 사람들은 어느 나라로 가고 싶냐고 묻지도 않았다. 교회에서 돈을 받고 내 피난을 도와준 사람들이 있다. 목사님은 나한테 그랬다. “네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돕는 중이다. 그런데 어디로 가게 될지는 우리도 모르겠구나. 아프리카 말고 유럽의 어느 국가였으면 좋겠다. 아프리카 국가라면 사람들이 너를 쫒을 수 있거든.” 우리 마을 사람들은 나를 정말로 죽이고 싶어 했다. 그런 일을 저지르고 수 년이 지나도록 내가 멀쩡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사촌들이 나를 보고 비밀을 폭로하는 본보기로 삼지 않기를 원했다. 우리의 문화와 전통에 죄를 불러들이기 전에 나를 없애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이제 체류권은 있지만 나는 아주 아주 큰 어려움을 마주하고 있다. 내 생각에, 내 처지는 인도적 이유로 체류권을 얻기 전이 나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법 25조 3항에 근거해 내게 체류 허가를 주었는데, 교육 과정에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어 이 체류권으로는 실업급여를 받을 수가 없다. 학교에 다니면 학생 대출만 받을 수 있다. 학생 대출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나는 여기에 온 지 3년이 되었는데, 독일에 체류한 기간이 4년 9개월 이상 된 사람들에게만 돈을 빌려준다고 했다.


이제 사회복지국에서는 더 이상 나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한다. 고용청에서도 해당 사항이 없다고 했다. 나는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되어, 집세는 어떻게 내고 아이와 나 둘을 어떻게 먹여 살릴 지 모르겠다. 외국인청에서는 아이 몫으로는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 사회복지국과 연계해서 아이는 아직 자기들 책임 범위에 있다면서 매달 249유로를 지급한다고 했다. 아이에게 그만큼이 나오고 추가로 집세의 절반도 내준다. 나머지 절반의 집세와 식비는 내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나는 담당자 여성에게 내가 어떻게 돈을 마련해서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구직을 하세요.” 나는 또 물었다. “제가 거리로 나가서 몸을 팔길 원하세요? 제 학력으로 어떤 일을 구할 수 있나요? 집세 내고 옷가지에 음식 살 돈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내 생각에 독일은 선진국이고, 민주주의 국가다. 그런 면에서 아주 큰 나라이다. 전 세계에서 많은 눈들이 독일을 지켜보고 있다. 이 나라에 발을 들여놓은 나는 임신 막달에도 앞날의 성취를 생각하면서 학교에 의무적으로 나갔다. 독일에서 나는 삶의 희망을 품게 되었는데, 지금 사람들은 나를 아무 희망이 없게 만들고 있다. 나는 억압과 차별을 받는다고 느낀다. 교육받을 권리도 박탈당했다. 나는 지금 의료보험도 없다. 내 아이도 마찬가지다.


보험사에 편지도 보내 보았지만 거기서는 고용청에서도 사회복지국에서도 내 몫으로 보험료를 내지 않기 때문에 나를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누구도 내가 어디 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내 상황은 매우 끔찍하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으려 한다. 빛이 있는 한 희망도 있다. 변호사와 상담해보니 그 분은 아이는 앞으로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나는 아이 여권도 신청했다.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영주권을 받을 것 같다. 지금 당장에도 아이는 체류권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내가 겪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나는 여성성기훼손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인권단체들이 와서 이 싸움을 도왔으면 좋겠다. 나는 두 가지 슬로건을 생각해냈다. “우리 여자아이들에게 그만 칼질해라(Stop cutting our girls)”, “한번 상처 입은 소녀는 영원히 상처 입은 채 살 것이다.(A wounded girl will be wounded forever)”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냈고, 이 상처를,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본다. 지금도 상처로 보인다. 나는 섹스를 결코 즐기지 못했고 지금도 아프기만 하다. 항상 고통스럽다. 다른 여자들이 섹스에 대해 얘기하거나 영상 속의 섹스 하는 여자들이 내겐 놀랍다. 어떻게 저런 감각을 느끼지? 무슨 약이라도 한 것 아닌가? 사람들은 이런 내 말을 듣고 웃어 버린다. “그런 거 아니야.”


※FGM으로 인한 피해자의 고통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다양하며 일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성적 만족이나 희열 대신 통증을 느끼고 배뇨과 월경, 임신과 출산 시에도 고통과 염증을 빈번히 겪는다. 우울증과 트라우마 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흔하다. 첨단 재생 수술을 통해 클리토리스를 복원하고 훼손된 조직과 감각을 바로잡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대다수 피해 여성에게는 접근이 어려운 선택지이다.


솔직히 나는 남자에 대한 성욕을 느껴본 적이 없다. 안다, 이게 끔찍한 일이라는 것을. 정말 끔찍하다. 그래서 나는 국제기구에게 우리가 단체를 만들고 운동을 시작할 수 있게 도와 달라 요청한다. 아직도 할례를 행하는 아프리카 여자들에게 가서 얘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겐 힘이 필요하다. 그냥 무작정 뛰어가서 ‘여성 할례’라는 오랜 전통을 중단시킬 수는 없다. 사람들의 인식을 일깨우고 싶다.


내 말은, 나한테 전화기가 한 대 있으면 할례 전통이 없는 국가에 우선 사무실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 활동가들은 여기 저기 파견을 다닐 것이다. 너무 위험하고 어렵기 때문에 활동가들이 할례를 시행하는 국가들에 머물러선 안 된다. 하지만 나는 준비가 되어있다. 내 몸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가오는 세대가 여성성기훼손에서 자유롭게 되는데 쓸 준비가 되어있다.


▶ 한국인 여성감독 김효정이 아프리카 현지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소녀와 여자>(Where am I: Beyond Girl and Woman, 2015) 포스터. 할례를 거쳐 공동체에서 성인 여성으로 인정받았지만 평생 수술 후유증을 안고 살아야 하는 여성들과, 할례를 거부하고 사회적 낙인과 차별에 시달리는 여성을 대비시키며 여성성기훼손 이슈를 조명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스트 선언을 하고 수많은 캠페인이 쏟아져 나오던 2016년 여름 개봉했다.


UN을 비롯한 인권단체들이 감비아에 가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캠페인을 하면 사람들은 당시에는 “알겠다, 그만두겠다”고 하지만, 단체들이 떠나고 나면 원상 복귀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아기들에게도 그런 짓을 한다. 예전에는 좀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면, 지금은 출생 즉시 여아의 성기를 절제하기도 한다. 누구도 아기들의 성기를 확인해 보자고 하지는 않으니 상황을 제대로 밝혀내기가 어렵다. 여자들도 남자들도 각성해야 한다.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남자들은 무지하기 짝이 없다.


나는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과 그동안 전혀 연락하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안 든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의 배움과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싸움을 준비하기 위해서. 이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 독일에서 매일 매일, 새로 날이 밝아 올 때마다 나는 싸움이 시작되는 것을 본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한다. 사람들을 이런 문화에서 구해내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때로는 울음이 북받친다.


독일에 처음 올 때부터 나는 머릿속에서 할례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뒤셀도르프에 있는 정신과로 보내져서 지금도 받고 있는 심리치료를 그 때 시작했다. 나의 치료사 로디카 아누타(Rodika Anuta)는 나의 절친이기도 하고 무척 좋은 사람이다. 나는 우울해질 때마다 전화를 걸고, 그러면 그녀가 우리 집으로 와준다. 난민 숙소에 있을 때에는 자살 충동을 느끼곤 해서 사람들이 나를 치료사에게 데려가곤 했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여기서는 모든 게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리기도 하고 안 풀리기도 하는 기복을 못 견디고, 살 가치가 없으니 자살하는 게 낫겠다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린 아들이 내 곁에 있다. 모든 아이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하다. 어린 세대에게 내가 필요하다. 그들이 내가 겪은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어떤 여자도, 어떤 아이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게 할 수 없다. 여성성기훼손 문화를 뿌리 뽑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양한 지원이다. 사람들로부터 지원이 필요하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앞으로 나서서 함께하자고, 함께 손을 잡고 이 뿌리 깊은 전통에 맞서 싸우자고 청한다.


▶ 나는 전통이라는 이름의 여성성기훼손에 맞서 싸우자고 세상에 청한다. ⓒ일다 (일러스트: 두나)


<번역자 노트> 여성할례 대신 안전하고 포용적인 통과의례를…


이집트 카이로에서 성장한 친구 A에게 대화를 청했다. 연락하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이집트의 여성성기훼손 피해자 비율이 높아서 ‘혹시 이 친구도?’ 싶어서였다. 글 쓴다는 명분으로 친구의 상처를 들쑤시는 일이 될까 두려웠다.


이집트에서 ‘여성할례’는 도대체 얼마나 흔한가. A가 체감하는 현실이 궁금해서 지난 20여년 전부터 현재까지의 시점에서 물었다. 그 친구는 기억을 더듬더니, 10여 년 전인 2007년 대통령 영부인을 비롯한 고위 정치인들의 적극적인 캠페인으로 법적 금지가 달성된 것이 기억난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시골마을에서 아직도 널리 행해진다는 게 상식이라고.


A는 사실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털어놓았다. 후발 산업국가들에서는 도시-시골의 격차나 경제적 계층 차가 상대적으로 훨씬 커서, 저소득층의 교육수준 낮은 시골민들은 주류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엄마가 선진국 독일에서 온 백인여성이라서 자기 가족은 자동적으로 상류층에 속했고, 교육수준이 높으며 보다 서구화된 생활을 하는 이들-자신의 부모 세대는 딸들에게 할례를 더 이상 안 시켰다는 것이었다. 이제 질문은 이전 세대가 들려주는 구술사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A가 아는 한, 자신의 고모 2명은 확실한 피해자였다.


“고모 중 한 명은 할례 철폐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액티비스트가 됐어. 고모는 굉장히 강인하고 당당한 여성이야. 본인 말로도, 내가 받은 인상으로도 할례 당한 경험이 고모 인생의 가장 큰 변화 계기였대. 트라우마 이후의 성장(post-traumatic growth) 사례라고 할 만하지. 고모는 할례의식 때의 가장 큰 충격으로, 아픈 감각 말고도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어. 믿었던 어른들, 가족, 마을 공동체에 대한 배신감, 모두가 자기를 버렸다는 느낌.”


배신감. 어쩌면 이것이 할례 의식의 본질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개인의 안녕보다 집단의 질서 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는 것. ‘홀로 선 개인은 더없이 나약하고 집단적 힘은 거대하니, 집단에 순응하라.’ 화자 빈투의 글에도 나타나 있다. 집단의 폭압과 길들이기를 거부한 그녀의 트라우마 역시 배신감과 깊이 관련되어 보인다. 배신 사건은 상습적 불신과 거리두기로 이어졌다. 빈투는 거듭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그들’(they, them)이라고 칭했다. 자신을 덤불 속으로 끌고 들어간 우악스런 손들의 주인인 마을 여자들도, 비밀을 폭로한 부족의 배신자 아이를 나무에 묶어놓고 매질한 마을의 아버지들도 ‘그들’이다. 원가족과 친척, 늙은 남편, 학교 선생님들이 개별적으로 호명될 때도 있었지만 더 많은 경우 그냥 ‘그들’이었다. 마치 구별이 그닥 의미 없다는 듯이.


해결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현재에도 계속 그늘을 드리운다. 비디오테이프를 요구하며 망명신청을 거부한 난민청 직원들도, 보험료를 내주지 않는 복지국과 이민청도 다 ‘그들’이다. 독일에 와서도 빈투는 좀처럼 신뢰할 수 없고 환대도 베풀지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고 느낀다. 온 세상과 반목하는 지독히 외로운 한 여자의 초상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빈투는 여성 할례 철폐를 위해 싸우는 액티비스트로 자기 정체화하면서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과 아직은 같이 쓰인다. 아마도 그녀의 사무실, 여성할례 폐지를 위해 싸우는 그 단체가 문을 여는 날에야 ‘우리’의 시간이 시작될 모양이다. 꼭 그러길 바란다.


한편, 친구 A는 여성 할례 철폐를 외치는 주류 캠페인들에 대체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외의 발언도 했다. 여성 할례가 잔인한 행위인 것은 맞지만, 동시에 아주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풍습인데, 서구 사회가 주도하는 대부분의 반대 운동이 문화적 맥락에 너무 무관심하고 몰이해하다는 것이다. 아직 할례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들 성품이 극악무도해서가 아니라, ‘희생을 감수하며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에 더 가치 있는 의식’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자기들이 어릴 때 직접 겪고 본 일인데 아픈 줄 모르겠는가? 알면서도 이를 악물고 칼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자리를 지킨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할 때 서구의 인권 개념을 들며 가타부타하는 것은 사실상 효과가 없다는 게 A의 분명한 입장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오늘날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인권 개념은 유럽에서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때 걸음마를 뗀 상대적으로 젊은 ‘전통’이며, 특권적 위치에 있던 남성 엘리트들의 사고실험에서 발전해온 대단히 서구-남성중심적 개념이다. 인권은 이미 구조화된 지식이며, 따라서 권력이기도 하다. 이 지식을 발명했고 여전히 전유하고 있는 서구 사회에서, 그리고 서구 사회가 개입하는 비서구 사회에서도 ‘인권’이라는 지식과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자는 심판자의 위치에서 때로 처벌까지 내린다. 게다가 19세기만 해도 여성, 유색인종, 노동자, 장애인, 동성애자, 노예 신분은 ‘열등한 인간’ 집단으로서 인권의 수혜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지금도 인권이 모두에게 두루 보장된 사회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A가 가진 답은, 반대론자들도 여성 할례가 행해지는 문화적 맥락 속으로 들어와서 이를 대체할 만한 다른 통과의례를 함께 논의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통과의례는 어느 사회에나 있다. 기독교 문화의 세례와 첫 영성체, 산업화 사회의 졸업 시험, 운전면허. 초경과 피임약 복용 시작. 콘돔을 지갑에 휴대하기 시작하는 날. 이집트 시골 마을 공동체도 의식을 필요로 한다. 여성이 공동체의 어엿한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거치는 안전하고 포용적인, 대안 의식 있어야 한다.


이집트에서 몇 년 전에 할례 철폐를 위한 TV공익광고가 방영된 적 있다. 아버지들이 나와서 여성 할례에 반대하며, 자신들 딸에게는 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 줄거리였다. A는 지상파 채널에 나온 이 영상이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려주는 A의 두 눈이 따뜻한 기억을 회상할 때처럼 부드러워졌다.


여성 할례는 여성 자신들에 의해 행해지고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는 풍습이었다. 하지만 남성들도 엄연한 책임자였다.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는 않았지만 여성의 성과 생활을 통제하는 가부장제에서 자유와 권력을 누린 집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할례로 인한 아내, 어머니, 딸, 조카, 동생, 누나의 고통을 묵인해왔다. 그랬던 남성들이 일부라도 목소리를 낸 것은 할례 철폐 운동에 박차를 가했고, 치유의 시공간을 만들었을 것이다. 힘 있는 변화는 이처럼 안에서 온다. 그리고 언제나 사람을 통해 온다. 긴 잠에서 깨어나 싱싱한 얼굴로 새 세상을 말하는 사람들을 통해.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왜 헤어스타일 하나 내 맘대로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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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무엇도 해치지 않으니까

[Let's Talk about Sexuality] 7년 만에 긴 머리를 자르다 (물달)


※ <일다>는 여성들의 새로운 성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20인의 여성이 몸과 성과 관계에 대한 다양한 가치관과 경험을 담은 “Let's Talk about Sexuality”를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그놈의 여성스럽다는 게 뭔지…


“그럼 자를게요.”


확인하듯 미용사가 말했다. “네, 그럼요.” 나는 경쾌하게 답했다. 삼십 센티가 넘는 머리카락이 시원하게 잘려나갔다.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달고 다녔을까. 바닥에 머리카락이 수북했다. 머리를 짧게, 그것도 아주 짧게 잘라달라고 했을 때 미용사는 “괜찮겠어요?”라고 물었다. 괜찮지 않을 건 또 뭔가. 괜찮다고 하니 “아깝다”고 했다. 나도 아깝다. 그동안 긴 머리를 위해 매일 삼십 분 넘게 들인 시간, 비싼 샴푸, 빨래와 다름없이 치열했던 머리감기 노동이 나도 너무 아깝다.


7년 전만 해도 나는 귀밑을 찰랑거리는 짧은 머리를 고수했다. 그 덕에 어딜 가나 남자로 오해받았다. 한 번은 찜질방에 갔는데, 한 여자가 나를 보고 “악” 소리를 질렀다. 알고 보니 계산대에서 받은 옷이 남자 옷(?)이었다. 심지어 여자 옷은 분홍, 남자 옷은 파랑이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옷을 사러 갈 때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기분이 상했다. 어릴 적부터 ‘터프 걸’이라느니, ‘남자 같다’느니 하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지만, 칭찬인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놀리는 투면 그나마 양반이고, 대부분 말 속에 비난과 무시가 섞여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깟 머리 기르고 치마 입어서 ‘여자 노릇’ 한 번 해주면 그만이라 생각했지만, 그러자니 비난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거 같아 왠지 싫었다.


스무 살이 넘자 사람들은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날 ‘덜 자란 존재’ 취급했다. ‘동안’이라는 칭찬(?) 속에는 묘하게 ‘여성스럽지 못해서 미성숙하다’는 뉘앙스가 담겨있었다. 제 나이에 맞는 얼굴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동안’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난 불쾌했다. 마치 나이에 맞는 정상적인 외모의 기준이 있는데, 나는 거기에 한참 못 미친다는 소리로 들려서다.


한 친구는 “화장은 예의”이기 때문에 “너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화장하게 될 것”이라며, 비영리단체에서 팔 년 넘게 일한 나를 비(非)사회인, 비(非)성인 취급했다.


왜 헤어스타일 하나 내 맘대로 못할까?


끝도 없는 이런 에피소드의 하이라이트는 이십 대 초반에 만난 남자친구다. 그는 끊임없이 ‘여자답게’ 머리를 기르라며 요구했고, 호시탐탐 ‘여성스러운’ 옷을 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짓을 하면 당장 헤어지겠다며 수도 없이 선전 포고했지만, 그는 결국 나를 속옷 가게로 끌고 갔다. 사람들이 안 보는 곳부터 바꿔가며 용기를 가지라는 남자친구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는 내가 아직 ‘덜 진화한 존재’라며, 원석은 정말 예쁜데, 가꾸지 않아서 그 미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칭찬(회유)했다. 그의 말에 속이 왈칵 뒤집혀서 난 “그럼 대체 왜 나를 만나는 거냐!”고 소리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의 소원대로 내가 여성스러워지진 않았지만,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남자들이 나를 볼 때마다 “남자같이 하고 다니는 이상한 애”라고 수군거릴 것 같았다. “예쁘지도 않은 게 착각한다고” 모욕당할까 봐, 성추행을 당해도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했다. 나는 너무 여성스럽지도, 너무 남자 같지도 않은 스타일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적당한 수준을 찾아 외모 평가에 매일 노출되지 않을 만한 딱 그만큼의 스타일, 한마디로 평범해지고 싶었다.


▶ 긴 머리카락과 여성스러움의 관계는?


머리를 기르니 남자로 오해받는 일이 사라졌다. ‘레즈비언이 아니냐’는 혐의(?)에서도 자유로웠다. 사람들이 얼마나 틀 하나로 상대를 재단하는지 알게 됐다. 긴 머리 하나로 ‘정상인’이라는 특수를 누리는 대신, 매일 빨래와 다름없는 치열한 머리감기 노동을 해야 했다. 내 머리는 숱이 많아 대충 감으면 금방 비듬이 덕지덕지 붙었다. 대야에서 머리를 빨듯이 감는 데 매일 삼십 분. 한 달에 15시간, 일 년이면 180시간, 지난 7년간 꼬박 두 달을 화장실 대야에 머리를 처박고 보낸 거나 다름없다.


여름이면 더 고역이었다. 매년 8월, 땀띠 나는 긴 머리를 자르겠다고 벼르고 별렀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여자친구와 사귀는 지금, 머리까지 자르면 자동 커밍아웃이 아닐까 걱정이 됐다. 엄마는 가장 예쁠 때 왜 아줌마처럼 짧은 머리를 하냐며, 머리를 자르면 죽어버리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머리 짧을수록 티 쪼가리 입으면 안 되는 거 알지?”하는 친구의 말에는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여성 코너’에서 옷을 사는 것 이상의 어떤 노력을 해야 ‘여성스러움’에 도달할 수 있는 걸까. 아, 내 성염색체는 나 모르게 내 머리와 옷 스타일까지 미리 정해둔 걸까?


아닌 척 모른 척 무관심한 척 사랑을 숨기다


내 성염색체가 정해둔 게 또 하나 있었으니, 그건 연애 상대였다. 중학교 때 반 친구가 물었다. “너 수업 시간에 왜 나 쳐다봐?” 나는 “내가 언제?” 하며 얼버무렸다. 여중에서 동성애는 암암리에 존재했지만,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곧 왕따를 의미했다. 간혹 나를 좋아한다며 고백하는 동성 친구들이 있었지만, 난 두려움에 휩싸여 “그건 남자랑 여자끼리 하는 말”이라고 답했다. 당연히 고백은 꿈도 못 꿨다. 짝사랑은 내 전문 분야가 되었고 아닌 척, 모르는 척, 관심 없는 척, 나는 사랑을 숨기는 방법을 배웠다.


이십대 중반부터 기른 긴 머리는 나름의 ‘위장술’이었다. 가능하다면 난 평범해 보이고 싶었다. 단 1초라도 누군가로부터 ‘저 사람 좀 봐’ 하는 눈빛을 받으면 며칠은 바늘로 콕콕 심장을 찔리는 듯했다. 연애 5년 차인 난 아직도 여자친구가 길거리에서 “자기야, 저것 좀 봐.”하며 부르면 누가 쳐다보지 않는지부터 살핀다. “아무도 우리 신경 안 써.” 늘 고개를 빼 주변을 살피는 나를 그녀는 ‘미어캣’이라고 부른다.


“우리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건 어떨까?” 그녀는 언젠가부터 나를 ‘자기’라고 부른다. 나는 서로를 동일시하는 ‘자기’보다는 고유한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다며 거창한 이유를 댔지만, 바라는 건 따로 있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그저 친한 친구 사이로 봐주는 거.


“나 근처인데 잠깐 들릴게.”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그녀에게 이런 문자가 오면, 난 혼란스럽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내겐 자동 커밍아웃이기 때문이다. 늘 솔직하지 못한 게 탈이다. 나는 그녀가 연락한 시간보다 빨리 왔다고, 또는 늦게 왔다고 짜증을 낸다. 사실은 그녀를 숨기고 싶었던 내 마음을 들킬까 되레 화내는 거다.


이런 나와 달리 그녀는 거리낌이 없다. 엄마하고 밥 먹다가 “나 OO이랑 사귀어”라고 커밍아웃했던 그녀다. 그 장면이 상상이 가지 않아 나는 “엄마가 정말 받아들인 거 맞아?” 하고 묻는다. 그녀는 “그럼~ 자기랑 먹으라고 반찬도 싸주던데?” 하며 무심하게 말한다. 얼마 전에 “퀴어 퍼레이드 나갔냐?” 라며 화내던 엄마의 전화는 뭐냐고 묻고 싶지만, 난 일상의 평온을 지키기로 한다.


“여자야, 남자야?”


FTM(Female-to-Male)인 트랜스젠더 친구는 이런 수군거림에 익숙하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친구가 여자일지 남자일지 내기를 걸고는 직접 와서 물어보기도 한단다. 대부분 가슴을 유심히 쳐다보고 돌아선다고.


젠더 ‘패싱’(Passing, 자신의 생물학적 정체성을 숨기고 겉으로 보여지는 젠더로 위장하는 것, 원래 흑인과 백인 사이 태어난 혼혈인들이 백인 행세를 하는 것에서 유래한 말)이 되냐, 아니냐는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구할 때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나서 응급실에 실려 가는데 ‘아래가 없는데 위에도 없네?’ 이러면 어쩌지?” (그는 가슴 절제 수술만 했다.) 그의 이런 농담을 나는 격렬하게 공감한다.


나도 집에서 강도, 강간, 살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 그 자체도 두렵지만, 사생활이 까발려질 것이 더 두렵다. 생명이 위급할지도 모르는 사고 앞에서도 정체가 탄로 날까 걱정한다. 누군가는 “그깟 정체 까발려진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냐?” 라고 말할지 모른다. 나는 일단 엄마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진다. 자식 잘못 키워 고개 못 들고 다닌다고 난리 날 게 분명하다. ‘정상’으로 돌려놓겠다고 발 벗고라도 나서면?


할 맘도 없지만 정치는 다했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사람들이 뒤에서 ‘섹스는 어떻게 하냐’며 낄낄댈까 무섭다. 행여나 일할 때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수만 가지 걱정이 떠오르는 데 1초도 걸리지 않는다. 실제가 어떠하든 내가 먼저 알아서 위축된다. 그래서 애인이 “아무도 우리 신경 안 써.” 라고 말하면 난 “내가 신경 쓰잖아.” 라고 답한다.


▶ 나는 언제까지 미어캣처럼 주변을 경계하면서 살아야 할까?


‘비밀연애’를 비밀에 부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이십 대, 처음 내가 남자도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난 봉인이 풀린 듯 애정 표현을 했다. 당당히 고개를 들고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내’가 애인과 당당히 손을 잡고, 뽀뽀를 하다니. 그것도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이성애의 특권을 만끽했다. 누군가는 남부끄러워하는 모텔 가는 일도 나는 자랑스러웠다. 여기 보세요, 이렇게 우리가 사랑하고 있답니다. 심지어 그것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요! 당연히 거짓말을 할 필요도, 사실을 얼버무려 말할 필요도 없었다. 4년 전 내 마음의 빗장을 풀어버린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 나이 서른에서야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났고 영화 속에서만 보던 ‘동성연애’가 시작되었다.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그녀와 밤새 통화하고 하루 종일 문자를 주고받는 나를 발견했다. ‘나랑 그녀 빼고 사람들만 모르면 되지 않을까? 그럼 이 달콤한 행복을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라며 나 자신을 어르고 달랬다. ‘사귀자는 말만 안 하고 연애 비슷한 것만 해보면 안 될까?’ 이런 비겁한 생각도 들었지만, 책임감이 강한 내 성격상 용납이 안 됐다. 사귐과 동시에 그녀와 나의 ‘비밀연애’가 시작됐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그 비밀은 반 토막 났다. 애인이 버젓이 있는데도 ‘넌 연애 안 하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 서러워 친구들에게 애인이 있다고 말해버렸다. 이어지는 질문에 난 최대한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직업과 사는 곳을 다 곧이곧대로 말했다. 그녀의 성별만 쏙 빼놓고. 그날 이후 친구들이 “남친은 잘 지내?” 할 때마다 뜨끔했지만, 그냥 “잘 지내”라고 했다. 잘 지내는 건 사실이니까. ‘연하남’을 만난다고 능력 있다며 놀릴 때도 헤헤 웃고 말았다.


알고 보니 거짓말은 옳고 그름을 떠나 정말 힘든 일이었다! 우선 뛰어난 기억력이 필요했다. 처음 친구가 애인의 나이를 물었을 때 난 당황해서 “동갑이야.” 라고 말했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연하남(?)을 향한 과한 관심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놓고는 다음에 만났을 때 “나보다 세 살 어리다”고 말했다. 기억력 좋은 친구가 “동갑이라며?” 하기 전까지 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 뒤로는 말할 때마다 멘붕이었다. 내가 또 뭘 잘못 말하는 건 아닐까. 애인의 성별이 드러나는 키, 몸무게를 실수로라도 말할까 봐 각별히 신경 썼다. 이건 정말이지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이런 건 곤란 축에도 못 꼈다.


‘사진 보자!’ 한 마디면 모든 노력이 허사였다. 무지 못생겼다고도 해보고 애인 사진이 없다고도 했지만 의심만 샀다. 내가 생각해도 궁색한 변명이었다. 요즘 세상에 애인 사진 한 장 없는 사람이 어딨는가! 급기야 친구가 ‘여자 아니냐?’ 라고 했을 때, 내 표정을 보진 못했지만 이미 들킨 거나 다름없었다. 이 지경에 오니 무얼 지키기 위해 그녀를 숨겨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대체 사랑이 거짓말보다 나쁠 게 뭔가?


▶ 사랑이 나쁠 게 뭔가?


사랑을 숨기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머리를 짧게, 그것도 아주 짧게 자르고 싶다고 말했을 때 여친은 의외로 고심했다. “둘 다 머리 짧으면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그녀를 나는 눈만 껌뻑이며 쳐다봤다. 길거리에서의 작은 스킨십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던 내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며 다독이던 그녀가 아닌가. 웃음이 터졌다. “너도 그런 걱정하는구나.” 막상 내뱉고 나니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졌다. 의심하라지. 의심이 다 뭐야, 사실인걸.


머리를 자르게 한 결정타는 FTM(Female-to-Male)인 친구의 말이었다. “여자화장실 갈 때마다 사람들이 놀라잖아요. 그럼 미안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분 좋은 거예요. 날 남자로 봐주는 거잖아요.”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누구에게나 기분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그럼 나는 왜 기분이 나빴을까? 내가 여자라서? 아니, 난 내가 성별이 모호한 이상한 존재로 보이는 게 싫었다. 화장실에서 사람들이 놀랄 때마다 가까운 사람들도 사실 그런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신경 쓰였다. 그래서 정작 내가 무얼 원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와의 대화 이후 칠 년 만에 긴 머리를 잘랐다. 남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느라 머리 길이 하나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나를 벗어나고 싶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무슨 상관인가.


내친김에 친구들을 만나 십삼 년만의 커밍아웃을 했다. “남친은 잘 지내?” 라는 말에 “여자야” 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그 뜻을 바로 이해했다. “그래서 남자도 사귈 수 있다는 거지?” 라고 확인하는 친구 말에 뜨끔했다. 커밍아웃하면서 내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도 만날 수 있는 범성애자, 즉 이성애자/정상인이기도 한 거지. 그런 말을 하고 싶던, 그러니까 어떻게든 정상성의 끄트머리라도 붙잡고 싶던, 그 최후의 선 안에 어떻게든 발 디디며 살고 싶던 내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았다. 아! 이 욕망도 머리카락처럼 잘라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커밍아웃은 생각보다 싱거웠다. 한 친구는 날 걱정하며 속상해했고, 한 친구는 말해줘서 고맙다 했다. 변한 관계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제야 나로 숨 쉬는 것만 같았다.


연애 초기에는 그녀로 인해 내 삶을 망치는 게 아닐까 두렵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누구인가?’ 싶을 만큼 나는 달라져 있었다. 삼십 년을 숨겨온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난 느낌, 그 이질감이 두려웠다. 대나무숲이 있다면 가서 ‘내가 여자랑 껴안고, 뽀뽀한다!’ 라고 외치고 싶었다. 무섭고, 이상하고, 두려운 데도 행복했다. 사람들이 사랑을 숨기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사랑은 무엇도 해치지 않으니까.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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