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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자기 방어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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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자기 방어 가이드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성폭력에 대처하는 방법


※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 지도자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전 세계 여성의 35퍼센트가 성폭력을 경험한다.(2017년 11월 WHO) 한국의 19세부터 65세 미만 여성이 응답한 ‘신체 접촉을 동반한 성폭력’ 피해율은 21.3퍼센트다.(2016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 여성가족부)


성폭력 가해자는 아는 사람일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강간의 77.7퍼센트를 아는 사람이 저지른다.(같은 조사, 여성가족부)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은 더 적게 일어나지만, 신고율은 더 높다. 낯선 사람의 경우 흔히 폭력과 결합되고, 다른 범죄 과정의 일부일 수도 있다. 반면, 아는 사람 사이와 위계 관계에서는 뚜렷한 폭력이 동반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보통 다른 범죄와 결부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피해자의 저항이 현저하게 곤란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현행 강간죄 성립 조건은 비현실적이다. 그것은 오히려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했는지가 관건이 되게 만든다. 성폭력 피해자는 목숨이라도 걸어야 한단 말인가.


여성의 ‘저항’ 정도가 아니라 여성의 ‘동의’ 여부가 성폭력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즉 성폭력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데 있어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여부를 더 중점적으로 다뤄야 한다.


성폭력 자기 방어 가이드


1. 상식선에서 판단한다


상식은 일반적인 이해력과 판단력을 뜻한다. 성폭력도 폭력임을 기억하자. 앞에 한 글자가 더 붙었을 뿐이다. 우리는 나이, 성별, 인종, 장애, 학력, 재산 등에 관계없이 모두 존중받아야 하는 평등한 존재다. 그러나 위계가 있는 관계에선 상식선의 문제 제기마저 해고나 괴롭힘 등을 각오해야 하거나, 때로는 자신의 미래까지 걸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안타깝지만, 현재는 개인의 용기와 결정이 중요하다.


2. 직감을 따른다


상황이 미심쩍다면 직감을 따른다. 직감이란, 뇌가 너무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처리하느라 의식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부당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한다고 해서 남에게 해를 끼칠 일은 거의 없다.


▶ 확실한 의사표현 ⓒ스쿨오브무브먼트


3. 의사표현을 확실히 한다


관계를 의식해 무시하거나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 상대를 달래거나 돌려 말하는 것은 거의 효과가 없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상대를 봐가면서 행동한다. 간결하고 분명한 말과 제스처로, 하지 말라고 표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


때로는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순응하는 척’ 연기하는 전술적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아는 사이에서, 특히 위계를 이용하는 폭력이라면 상황이 악화되거나 반복되지 않게 초기에 차단하는 것이 낫다. 사실상 육체적 방어 테크닉보다 정신적 자세가 더 중요한 경우다.


의사표현에는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표현이 있다. 의사표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둘 다 쓰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언어적 표현 : 간단하고 분명한 표현을 사용한다. 상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 마세요.”

“그만 하세요.”

“그런 말씀 불편합니다.”

“제 몸에 손대지 마세요.”


-비언어적 표현 : 앉은 자세나 누운 자세는 불리하다. 일어선다. 발이 모여 있으면 불안정하다. 두 발을 골반이나 어깨 너비로 벌린다. 두 손을 들어서 눈에 보이는 경계를 만들고, 유사시 손을 사용할 준비를 한다. 시선은 상대 가슴팍에 두고 넓게 본다.

 

4. 도움을 구한다


우발적 범죄가 아닌 이상 모든 범죄자는 완전범죄를 추구한다. 그래서 성추행과 강간은 목격자가 없는 곳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주변에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 즉시 도움을 구한다. 단 둘이 있는 장소에 있다면, 빨리 그곳을 벗어나 도움을 구한다.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 자체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출발이 될 수 있다. 개인적인 대응보다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는 게 좋다. 성폭력상담소에 피해 내용을 상담하고 지원받는다. 강간의 경우 발생 즉시 경찰서 여성청소년과나 원스톱지원센터에 신고하고, 산부인과에 가서 피해 사실을 알리고 검사받는 것이 좋다. 사고 당시 입었던 옷은 세탁하지 않고 종이봉투에 보관한다.


▶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서 (원그림 출처: wikimedia commons)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서


차별과 불평등은 인류의 태생적 결함이 아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폭력적이어서, 또는 남성이 생물학적으로 공격적이라서 (성)폭력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불평등한 사회가 차별적인 생각과 폭력의 근원이다.


정치권력에 선의를 기대하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지만, 불과 1년여 전 우리가 촛불을 들고 경험했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대중행동에 나선다면 문제 해결의 진정한 힘을 볼 수 있다.


여성 억압과 차별을 해소하고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목표일 수 있지만, 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함께 노력해보는 수밖에 없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세월호 4주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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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산 자의 몫

<아주의 지멋대로> 세월호 4주기에


※ 지구별에 사는 인간종족입니다. 글을 그리고 그림을 씁니다. [작가 소개: 아주]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4월, 산 자의 몫 ⓒ일다 (아주의 지멋대로)



혼자 살아요? 남자친구 있어요?…모욕 면접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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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청년들, 모욕 면접을 훈련하다

[성소수자, 나도 취준生이다]① 애인 있습니까?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이라고 했다. 동시에 최악의 청년 실업률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사회가 안타까워하는 취업난은 ‘대졸자, 수도권 거주자, 비(非)장애인, 비(非)질환자, 비(非)성소수자’들의 이야기였다. 이들의 슬픔과 노력, 고통과 능력, 희망과 공정을 다뤘다. ‘그 외’ 청년들의 취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외’들은 취업 절벽에서 늘 벼랑 끝자리를 맡아왔는데도 말이다.


‘남자인 게 스펙’이라고 했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존재 자체로 가산점이 붙는 몸(성별)이 있다면, 반대로 존재 자체가 마이너스인 몸도 있다는 말이 된다. 남성에게 가산점을 주는 취업시장은, 그 외의 성에게 어떤 점수를 줄까. 사회가 규정한 남자/여자로 존재하지 않는 성에게 줄 점수는 있을까.


이들은 스펙을 ‘쟁취’할 수 없는 몸이라 했다. 마이너스 점수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가? 성소수자 청년들의 취업과 노동을 살폈다. 이들과 소위 ‘일반’ 청년들의 노동에 있어 접점과 간극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이들도 저들도 헬조선이라 불리는 사회를 살아가는 20~30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청년’이라는 이름으로만 묶일 수는 없다.


취업 키워드를 임의로 뽑았다. ‘모욕 면접’, ‘외모스펙’, ‘능력’, ‘비정규직’, ‘직장문화’. 이 키워드를 통해 성소수자들과 비성소수자들의 취업과 노동을 살피려 한다. 그렇게 찾아낸 공통분모들이 우리 시대의 청년노동에 대해 말해줄 것이라 믿는다. [기록노동자 희정]


혼자 살아요? 남자친구 있어요?


취업 면접을 보고 나온 미리는 기다리고 있던 여자친구 품에 가 안겼다.

“나, 붙어도 이 회사는 안 갈래.”


사무보조를 구한다는 중소업체였다. 부장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면접이라는 것을 봤다. 부장은 나이를 묻고, 아버지 어머니 직업, 이어 동생의 안부까지 물었다. 어디 사냐고 묻고 자취하냐고 물었다. 이 회사는 아니다. 직감했으나 자리에서 일어설 수도 없었다.


면접이라 이름 붙인 불편하고 쓸 데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면접비도 지급하지 않으면서 부장은 미리의 시간을 산 듯 굴었다. “혼자 살아요? 한창 좋을 때네.” 그리고 수순처럼 남자친구 있냐고 물었다.


이쯤 되면 미스터리 쇼퍼(Mystery Shopper; 고객을 가장하여 점원을 평가하는 사람) 식의 면접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한창 좋을 때’의 ‘꽃다운 나이’ 미리에게는 익숙한 면접용 질문이었다.


거름망 없는 면접


“최저시급 주면서 꼬치꼬치도 묻네.”


면접 이야기를 들은 미리의 친구들은 화를 냈지만, 다들 안다. 원래 최저임금 주는 자리가 더 무례하다. 야근도 많지 않고, 최저임금을 살짝 웃도는 세전 150만 원 가량의 월급. 이 정도면 나쁘지 않는 직장으로 불렸다. 요즘 세상이 그러니까. 나쁘지 않은 직장에서 나쁜 사람은 아닐 부장-과장이 나와 꼬치꼬치 묻는다. 가족 관계, 자취 여부, 애인 유무, 그러다가 외모 지적까지. ‘여자’와 관계된 것을 물어온다. 거름망이 없다.


‘남의 돈’을 받는 이가 이러한 무례함에서 자유롭기 쉽지 않다. 취업이 꽤나 힘든 세상에서는 더 했다. 거름망은 면접자들의 몫이 됐다. 스스로 거른다. 동시에 익숙해지려 한다. 규모 있는 기업에 지원할수록 ‘압박 면접’을 연습하는 일이 늘고 있다. 팀별로 모여 서로에게 무례한 질문을 던진다. 모욕을 연습한다.


취업을 볼모로 잡혀 스스로를 모욕하는 청년 ‘을’들. 이런 위계질서에서 ‘어린 여자’인 미리는 누구보다 ‘을’이었다. 미리는 병丙, 정丁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남자친구 없어요.”


▲ 민우회 웹툰 “9직X2직=18 나의 육두문자 구직라이프” 제 8화 <그 회사, 결남출이었어> 중에서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기획, 치드 그림


패싱의 노하우


따지고 보면 거짓말은 아니다. 미리의 애인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애인은 있는데 여자예요.” 하진 않는다. 부장은 놀랄 것이다. 그리고는? 미리는 생경한 시선보다도 성희롱과 폭력을 당할까 더 걱정했다.


“사무보조 일이면 중년남성들이 대부분일 테고, ‘여직원’ 뽑아서 일하는 곳인데. 제가 굳이 말을 할 이유가 하나도 없죠. 어떤 소리 들을지 뻔하니까. 나를 성적 대상화 해가지고. 여자끼리? 그런 식으로 대할 거니까.” -미리. 20대. 비(非)수도권 거주자. 바이섹슈얼(2개 이상 젠더에 로맨틱이나 성적 끌림을 느끼는 정체성), 그레이로맨틱(아주 드물게 로맨틱 끌림을 느끼는 성지향성), 현재 무직.


미리는 안전하기 위해 애인 관련 질문에 ‘패싱’했다. 여기서 패싱(passing)이란, 어떤 사람을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여기게끔 외양과 행동을 위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리에게는 남자와 여자가 짝을 이루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에서 ‘평범한’ 구성원을 연기하는 일이다. ‘일반인 코스프레’(일명 일코)와 비슷할 수도 있겠다.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일상에서 그리고 면접장에서 패싱을 한다. 자신을 숨기지 않으면 뽑힐 수 없다. 뽑혀도 잘릴 수 있다. 그러니 패싱의 노하우만 깊어간다.


미리처럼 노(no)라고 답하는 것으로 부족했던 강표는 커플반지를 샀다. 혼자 낀다. 하나는 가상의 여자친구를 위해 남겨둔다. 트랜스젠더 여성인 윤재는 긴 머리를 고수한다. 사람들은 주민등록 앞 번호가 1인 ‘그’를 이상하게 본다. 윤재는 화보 촬영이 있다는 변명을 준비한다. 트랜스젠더 남성인 지민은 치마를 입지 않는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여자’가 치마를 안 입냐. 지민은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내 체육소녀로 변신한다. 체대입시 준비했던 ‘소년’ 같은 ‘소녀’ 이미지에 자신을 숨긴다.


이들의 거짓과 침묵은 보호색으로 기능한다. 다름을 못 견디는 육식세계에서 이들은 보호색을 쓰고 자신을 숨긴다. 미리는 면접이 거듭될수록 애인 유무 질문에 익숙해지고, 다른 이들도 자신만의 노하우를 만들어간다. 마치 면접 횟수가 거듭될수록 준비한 대본을 보다 자연스럽게 읊을 수 있는, 취업준비자들처럼 말이다.


솔직하게 답할 수 있다면


미리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성소수자들은 이런 바람을 비쳤다. 솔직하게 답할 수 있다면.


“면접을 준비하는데, 그런 질문들이 올까봐 걱정이 되는 거죠. 애인, 결혼. 면접 자체만 준비하기도 바쁜데, 나는 거짓말도 따로 생각해놔야 하고. 물어보면 어쩌지, 주눅 들고. 면접은 당당하게 봐야 되잖아요.” -여진. 레즈비언, 현재 무역회사 근무


그러나 “애인 있습니까?” 라는 질문은 면접 자리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헤헤거리며 “사이가 얼마나 좋은데요” 할 면접자가 있을까. 면접은 솔직함을 요구하지 않는다. 면접장에서의 발화는 입사 동기부터 거짓이다. 면접장은 ‘어디든’ 취업되고 싶다는 간절함을 ‘이곳에’ 취업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위장시켜야 하는 곳이다.


면접에서 ‘멘탈 털리게 하는’ 대표 질문이 ‘결.남.출’이라 한다. 결혼, 남자친구, 출산 계획. 오죽 자주 물었으면 줄임말까지 나올까. 20~30대 여성은 이 질문에 반복적으로 노출된다. 질문의 무례함을 따질 여유도 없다.


사생활을 캐묻는 질문에도, 무엇을 알아보기 위해 질문했을까 추리한다. 어떤 것이 정답에 가까울지를 계산한다. 답변은 진취적이면서도 겸손하고 창의적이면서도 순종적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어떤 대답이 신입사원으로 적합하게 ‘보일’ 것인가를 생각한다.


결혼할 겁니까?


지정성별(태어남과 동시에 지정받은 생물학적 성별) 남성 면접자에게마저 이 질문은 어렵다. “애인 있습니까?” 애인이 있다고 답하면 연애하느라 취업준비는 뒷전인 사람처럼 비춰질까. 없다고 하면 인간관계에 하자가 있는 것처럼 보일까. 별스러운 걱정이 아니다. 모두가 연애를 꿈꾸고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능력을 의심 당한다.


그가 택할 수 있는 모범답안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둘의 미래를 위해 성실히 취업준비를 하고 있다” 정도다. 이때 ‘둘의 미래를 위해’라는 말을 넣는다. 자신에게 (미래의) 부양책임이 있음을 어필한다. 남녀가 결혼을 하고 남성이 생계부양자가 되는 가족모델이 일반적인 사회. ‘가정’이라는 단위를 확보한(할) 남성은 능력과 책임감을 인정받는다. 그 인정이 가산점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그러나 여성 취업자는 사정이 다르다. 취업시장이 아니라도, 여성에게 “애인 있냐?”는 굉장히 성별화된 질문이다. 없다고 답했을 시 예상되는 말들이 있다. “결혼 안 할 거야?” “선머슴 같은 애를 누가”, “그러게 좀 꾸미고 다녀”, 어떤 ‘여성’이 되라는 강요인지 빤하다. 여성스럽게 꾸미고 여성스럽게 (돌봄)노동하라.


그런데 여기는 회사다. 연애 다음은 결혼이고, 그 다음은 육아다. 회사는 육아하는 여성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결혼할 겁니까?” 이 질문은 면접 때만 아니라 연봉협상 자리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비혼(비출산) 결의를 밝힌다고 스코어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결혼(출산)할거라 답하면 가정과 일을 어떻게 양립할 거냐고 하고, 하지 않을 거라 하면 이기적이라고 한다. 어떤 대답을 해도 마이너스 점수가 기다리고 있다.


질문의 이유: 고도로 훈련된 검열


“애인 있습니까?” 질문은 이토록 힘을 가진다. 질문 하나 받았을 뿐인데 누군가(남성)는 부양책임자로서의 자리를 확인한다. 누군가(여성)는 가정에서의 출산과 육아라는 자신의 역할을 떠올리게 된다. 본래의 자리를 두고 일터로 ‘잠시’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또 누군가는 동성에게 향하는 성적지향을 감추게 된다. 감출 수 없는 이는 불려나가 한소리 듣는다. “왜 그러고 다닙니까?”


“면접가면 사람들이 남자인 줄 알아요. 그런데 이력서 보면 여자잖아요. 그러면 질문이 시작돼요. 본인 맞습니까? (…) 왜 그렇게 하고 다닙니까? 라는 거예요. 면접 보면서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성전환자 인권 실태조사 보고서(2006년 9월 성전환자 인권실태조사 기획단)


그러고 다니면 안 되는 거다. 사회는 일터로 들어가는 문턱을 높여 일러준다. 이쯤 되면 면접관들의 사생활 침해 질문이 다시 들린다. “애인 있습니까?” 왜 그딴 게 궁금한가 했다. 미리가 “여자랑 사귀어요” 라고 말하지 못하게 하는 질문. 그것은 ‘이성애 규범’에 따르겠냐는 일종의 서약 같은 물음이었다.


이성애 규범은 여자와 남자가, 남자와 여자가 맺어지는 일을 ‘정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규범은 “이성을 좋아하니?” 묻고 끝이 아니다. 이성애 규범을 따른다는 것에는 상대에게 이성으로 보일 성 역할(옷차림, 외모, 행동, 성격)을 수행한다는 옵션이 붙는다. 남/여 정체성을 가지고 일터와 가정에서 어떤 노동을 할 것인지를 함께 묻는다.


그래서 고작 애인 유무를 물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결혼 후 삶을 고민하게 된다. 여성 취업자들은 “결혼 안 할 겁니다”라고 말하지 못한다. 이성애 규범에 적합하지 않는 삶이다. 낳고 훈육시켜 기업에 보낸다. 그 모든 일이 “애인 있습니까?” 물음의 종착지인 가정에서 이뤄진다. 이 사회는 이성애 규범(으로 꾸려진 가정)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출산과 양육은 집안일이라 치부되지만, 결코 집안의 일일 수 없다.


출산은 ‘아이를 몇 낳아야 하는가’에서부터 ‘아이를 갖지 않는 애정의 형태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떤 아이를 어떻게 가져가야 하는가?’ 하는 물음과 연관된다. 물음의 답은 성적 규범, 남/녀의 역할, 결혼과 가정형태를 규정해 버린다. (“생명정치를 통해 본 성과 재생산”, 이유림, IL과 젠더포럼 & 성과재생산포럼, 2016년 6월)


그러니까 “애인 있습니까?”는 무개념 갑질 질문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의 규범을 재확인하는, 고도로 훈련된 검열이다.


“세상이 네모인데, 당신 네모입니까?”

그러니까 “당신 정상입니까?”


▲ 성소수자 노동자들과 이들의 노동권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비영리기구 <일터의 자긍심> 캐나다 캠페인. ⓒPride at Work Canada


엄친아 따라하기


회사는 “네모입니까?” 질문을 형태 바꿔 계속한다. 한 인간이 20여 년간 가정과 학교, 병원 등을 거쳐 규격화하고 규범화된다. 훈련되어 보내지는 곳이 노동시장이다. 불량품이 없어야 한다. ‘정상’이 되어야 한다. 정상이란 외모와 행동 뿐 아니라 사회가 권장하는 사고방식, 능력, 신체(건강)까지 아우른다. 그리고 일자리 경쟁이 강화될수록, 여기에 취업요건이 더 붙는다. 요즘 세상은 그걸 스펙이라 부른다.


자기계발서 흐름을 따라가 보면, 스펙 성취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노력은 자기관리를 통해 완성된다. 자기관리에는 모델이 있어야 한다. 헬스장 러닝머신 앞에 ‘몸 좋은’ 모델사진이 붙는 것처럼 말이다. 자기관리의 모델은 우리가 살아오며 지향해야 한다고 배워온 인물상이다. 의외로 그 인물은 가까이 있다. 가장 흔하게 있는 곳은 ‘엄마 친구네’일 게다.


엄친아는 타의 모범이 된다. 이성애-정상가족의 규범을 가장 잘 수행하는 대표 인물로. 그는 일단 아들이다. 성별부터 1등 시민의 자리를 차지한다. 게이 엄친아, 트랜스젠더 엄친아는 떠올릴 수 없다. 장애인, 질환자, 이주민 엄친아도, 심지어 비정규직 엄친아도 없다. ‘건강한’ 정신과 몸을 가지고 ‘정상가족’을 꾸리는 엄마 친구 아들.


우리는 그를 따라한다. (취업 과정에서) 그 행위는 면접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시작된다.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타의 모범’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성소수자들이 이력서를 쓰면서 “자신이 모범적인 이성애자 여성/남성으로서 평생을 살아왔음을 증명”(“이성애 공화국 취업백서”,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춤추는 입술> 3호, 2009년 8월)하는 패싱을 해야 하듯, 우리 또한 ‘모범적인’ 삶을 증명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짠다. 평범하면서도 반듯하게 잘 자란 ‘자소설’ 주인공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패싱은 ‘저들’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일정한 패싱을 한다. 사는 일이란, 사람들이 나를 다르다 느껴 뒤돌아보지 않고 지나가도록(pass) 하는 일의 연속이다. 목적과 욕망이 분명한 면접 자리는 대대적인 패싱의 자리일 뿐이다.


우리 모두 “애인 있냐?”는 회사의 물음에 말문이 닫힌다. 사회가 권장하는 규범적 이상에 미치지 못할 때 살아남는 방법은 나를 숨기거나 마치 그러한 냥 연기하는 게다. 그래서 미리는 애인이 없다고 한다. 우리는 자소설을 쓴다. 때로는 ‘슈퍼우먼’을 외치다 골병든다.


우리는 모두 사회를 (잘) 살아가기 위해 ‘패싱’한다. 패싱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한 성소수자와 비(非)성소수자. 금성과 화성 사이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결국 같은 태양을 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모욕 면접 인생


우리 모두가 ‘정상규범’을 연기하는 패싱 행위자라는 소리가, 성소수자들이 겪는 고통을 흔한 일로 치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순 없다. 누군가는 패싱을 ‘가면 쓰기’라 했고, 누군가는 ‘보호색’이라 불렀다. 자신의 몸에 색이든 가면이든 덧씌워야 하는 일이다.


이들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는 까닭은 분명 사회적 압력 때문이다. “말하지도 묻지도 마라”는 어떤 폭력보다 잔혹하다. 한국사회는 이들을 ‘없다’ 한다.


패싱의 실패와 거부는 실질적인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 인터뷰를 하며 어떤 이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말했다.


“전 트루먼쇼(The Truman Show, 피터 위어 감독, 짐 캐리 주연, 1998)라 생각했어요. 순간 의심스럽더라고요. 내가 어떻게 짜 맞춰진 것처럼 삶이 고통의 연속이 될 수 있을까. 누가 조작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웃팅 당하고, 왕따 당하고. 어떤 형태로 사회에서 내가 억압받는지 계속해서 체감해야 하고.”


살기 위해 패싱해야 한다. 그런데 폭력에는 행위자가 있다. 폭력은 우리에게서 나온다. 면접장 밖으로 나가면 모두가 서로에게 면접관이 된다. “당신 정상입니까?”를 묻는다. 틀에 맞지 않으면 “왜 그러고 삽니까?” 모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듯 군다. 국가와 기업은 질문을 하는 분명한 목적이라도 있지. 도대체 우리는 왜 묻는가?


우리는 왜 서로의 삶을 ‘모욕 면접’장으로 만드는가.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기사에 등장하는 이름 중 일부는 가명입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은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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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들어온 ‘나의 페미니즘’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연재를 끝내며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칼럼 연재가 막을 내립니다.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을 공유해 준 작가와,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칼럼을 애독해주신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누마루와 뜰 ⓒ일다(김혜련)


개인적인 이야기가 정치적인 이야기


“이 글은 자기 탐험의 끝에서 ‘일상’에 도달한 이의 이야기다. 집을 가꾸고, 밥을 해먹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 평생의 방황과 추구 끝에서야 가능해진, 한 여자의 이야기다. 


삶의 의미를 ‘저 너머 나 밖에 있는 것’에서 찾지 않고, 밥 먹고 청소하고 빨래를 개고 동네를 한 바퀴 도는, 평이한 일상 자체가 삶의 의미고 자기다움이며 자기초월일 수조차 있다는 것을 몸으로 겪어가는 이야기다.”


연재를 처음 시작할 때 썼던 말이다. 이제 글을 마무리하면서 경주 남산마을에 터를 잡고 백년 된 낡은 집을 고치고 가꾸면서 살아온 지난 십년을 돌아본다. 절실하고 아름다운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동안 나는 조금 더 단순하고 고요하고 심심한 사람이 되었다. 심심해서 더욱 밀도 깊은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할까.


돌아보니 지난 십년이 오십대를 통과해 온 시간이었다. 오십대 초에 새로운 삶을 시작해서 그 삶에서 어떤 빛 같은 것을 보기까지의 시간이었다고 해야 하나. 삶의 초기부터 시작된 허기나 결핍을 해소하고, 삶을 즐기는 능력을 몸에 익히는 시간이었다고 해야 하나. 집을 가꾸고 밥을 하고 몸을 돌보고 자연을 만나면서 자신을 통합한 시간이라고 해야 하나….


▶ 글을 쓰던 방과 책상 ⓒ일다(김혜련)


이 년여 동안 이 주에 한 번씩 글을 썼다. 때로는 절실하게, 때론 신 오른 듯 저절로, 또 어떤 때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글을 쓰면서 새롭게 본 것도 있고, 막연했던 것들이 명료해지기도 했다. 대체로 정성스럽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써온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어떤 보편성을 지니고도 있다. 내 세대들이 봉착한 삶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일상의 평범함이 더 이상 평범함이 되지 못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나온 글이기도 하다. 또한 페미니즘의 역사 속에서 나온, 페미니스트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임을, 일상의 중요성을 정치화하고 이론화하기에도 시간과 여력이 모자랐던 페미니즘의 역사를 거쳐 이런 글이 나올 수 있었을 게다.


이제쯤이면 페미니즘이 말해왔던 것을 자기 삶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모든 이념과 주의, 사상은 그것이 지향하는 삶의 일상적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어야 할 게다. 나는 내 식으로 ‘나의 페미니즘’을 삶 속에서 살아낸 것이라고 할까. 그 역사성을 그리고 싶었고, 일상의 즐거움이나 깨달음을 나누고 싶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은 무엇이 다른가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가 지닌 의미를 생각한다.


요즘 일상성에 대한 관심들이 늘어났다.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일상이 억압이고 구속인 사회에서 ‘일상’이 삶의 근원적 자리라는 ‘값싼 통찰’을 언제나 일상 ‘밖’에 있던 남성들이 또 다시 유행시키고 있다. 한 순간의 솜사탕 같은 달콤함으로.


▶ 마당에서 고추 말리기 ⓒ일다(김혜련)


내 글은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자기 부정의 시간들을 지나 새롭게 다시 만난 일상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지난한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이제 일상 너머의 삶의 초월을 꿈꾸지 않는다.

일상, 그것이 궁극의 자리므로.

밥, 집, 몸, 땅, 하늘…

이 묵직하고도 경건한 언어들이여!


여자들이 쓰는 일상의 이야기가 다양하게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동안 글을 읽어 준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일다> 독자위원들이 보내준 세심한 관심과, 따뜻하고 정성스러운 댓글, 예리하고 명민한 댓글들을 통해 독자와 소통되는 느낌이 소중했다. 연재의 처음부터 끝까지 글을 읽고 편집을 해 준 조이여울 편집장의 정성에 감사한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나름 빅뉴스

“백인 페미니즘은 자기들끼리만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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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페미니즘은 자기들끼리만 얘기한다”

흑인여성 네트워크 <쏘울 시스터즈> 시에나 데이비스 인터뷰(하)


[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고 있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오만한 백인 사회에 대한 반격, 쏘울 시스터즈의 탄생


내가 시에나 데이비스를 알게 된 것은 독일 페미니즘 대중문화 잡지 미씨매거진(Missy Magazine)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서였다. 헤드라인은 “백인들은 자기들끼리만 얘기한다” (White people talk to each other)였다. 백인들이 사회를 주도하는 미국 서부 도시를 떠난 시에나는 기대와 달리 또 다른 백인 주류 사회에 살게 되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흑인 아프리카인이 다른 민족임을 모를 정도로 인종 문제에 무지한 베를린에서, 비(非)시민권자 외국인으로 살게 되면서 시에나가 찾은 돌파구는 흑인여성들끼리 편히 모일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었다. 독일에 온 초기에 우연히 참여한 공연 워크숍이 계기가 됐다. 


‘발하우스 나우니스트라세’(Ballhaus Naunystrasse)라는 연극단체에서 연 <백인 세계 속 유색인종 여성들>(Colored Women in a White World)이라는 2주짜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브라질 출신의 흑인 대표가 이주 배경이 있는 사람들에게 연극 워크숍을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흑인여성에겐 무료였다. 거기서 다른 여러 흑인여성들을 만나 아침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 매일 춤추고 노래하고 공연 연습을 하면서 수다도 많이 떨었다. 워크숍이 끝나고 나서도 서로 연락하고 지내기 위해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게 <쏘울 시스터즈>(Soul Sisters)의 시작이다. 최초 7명의 멤버가 각자 새로 흑인여성을 알게 될 때마다 초대해서 지금은 8백 명이 넘었다.


▶ 쏘울 시스터즈 친목 모임이 있던 날 찍은 기념사진.

 

시에나:“오드리 로드(Audre Lorde)라고 아세요? 액티비스트, 작가, 시인이었던 흑인 레즈비언인데 1980년대에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미국 흑인여성 문학 수업을 했어요.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흑인 학생들만 남으라고 했대요. 강의실 문을 닫더니 학생들에게 서로 이름을 다 알게 될 때까지 못 나가게 했다는 일화가 있어요. 그 분이 아프리카계 독일 사람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하는데 촉매제가 됐던 것 같아요.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기도 했죠. 동료였던 백인 독일인 페미니스트가 오드리 사진과 영상을 모아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오드리 로드의 베를린에서의 나날>(Audre lorde’s Berlin Years)도 있어요. 전 이 다큐를 독일 오기 전에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어요.”

 

이렇게 먼저 커뮤니티 조직에 힘쓴 사람들에게 영감을 받아 생긴 소울 시스터즈는 친목 모임과 문화예술 활동, 정치교육을 넘나들며 네트워크를 다져오고 있다. 영화상영회, 소풍, 식사모임에서 친구가 된 여성들은 이후에 동지가 되어 함께 슬럿(Slut) 시위를 벌이고 동료가 되어 연극 <미러 미러>(Mirror Mirror)를 함께 무대에 올렸다. 쏘울 시스터즈의 비전은 베를린에 흑인 커뮤니티를 자리 잡게 하고 온.오프라인 상에서 서로 배우고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슬럿 시위(Slut Walk): 2011년 캐나다의 한 경찰관이 ‘성폭력을 당하지 않으려면 슬럿(slut: 잡년)처럼 입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에 대해 항의하며, 여성들이 ‘헤픈’ 복장을 입고 시위를 벌였다. 피해자의 품행을 문제 삼는 성폭력 유발론에 분노한 여성들의 시위는 세계로 확산되었으며, 한국에서도 개최되었다. 


그런데 흑인이라는 범주는 사실 대단히 넓은 것이다. 유럽인이 주도한 식민침략 시대와 미국의 노예무역 등 디아스포라(이산)의 긴 역사 끝에 오늘날 흑인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앞서 말했듯, 소말리아의 흑인과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은 매우 다른 문화를 향유하는 이질적인 민족이다. 따라서 나는 단지 흑인여성이라는 것으로 정체성을 공유하는 연대가 가능한지 궁금했다. 


내 입장에서 바라보면, 베를린에 끈끈한 아시아 여성 네트워크가 있다고 상상하기 쉽지 않다. 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대륙이고 그 안에 서로 다른 민족, 피부색, 종교, 관습 등이 공존한다. 이런 차이가 한 나라 안에서 두드러져 내전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언어 차이도 있다. 우리는 중동이나 동남아시아를 우리와 비슷한 문화권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상대적으로 외모와 문화가 비슷한 극동아시아 3개국 한.중.일 내에서도 차이를 따지는 것에 더 익숙하다. 


시에나는 쏘울 시스터즈 내에 차이가 있고, 이에 따른 분리가 어느 정도 있다고 인정했다. 다만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모임에서 공식 일정이 끝나고 나면 보통 구사하는 언어나 출신 지역에 따라 사람들이 소그룹을 만들어 뒷풀이를 이어간다. 아프리카 출신 여성들끼리 통하는 데가 있고, 북미 여성들은 미국에서 유행하는 리얼리티 쇼를 화제로 이야기한다. 아프리카계 독일인들은 독일어로 수다 떤다. 약간의 분화가 일어나더라도 흑인여성 커뮤니티라는 느슨한 울타리에 같이 머물러 있다고 믿는다. 


‘흑인’ ‘여성’이라는 자기정체성도 멤버마다 다르다. 가나에서 성장한 여성은 흑인 다수 사회에서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지 않다. 어떤 이들은 자신을 여성이라 하기보다 그냥 사람으로 정의하길 선호한다. 두 가지 인종을 타고난 혼혈인들은 스스로를 온전히 흑인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흑인여성 네트워크의 정치적 의미에 동의해서 참여하기도 한다.


▶ 쏘울 시스터즈 멤버들이 직접 기획.연출.연기한 연극 <미러 미러>(Mirror, Mirror)의 한 장면. 흑인여성들의 마주한 다양한 삶의 현실을 통해 인종 정치의 화두를 던진다. ©Wagner Carvalho

 

컬러리즘(colorism), 우리 안의 차별을 직시하다 


‘흑인’이라는 포괄적인 정체성 우산 아래 모인 사람들이 느슨한 연대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쏘울 시스터즈가 작년부터 주력하는 ‘컬러리즘(colorism) 워크숍’이 바로 이를 목표로 한다. 


시에나: “처음으로 영어.독일어를 병행해 진행했던 행사였어요. 당시에 컬러리즘에 대한 소논문을 쓰고 있어서 저에게 중요한 화두였고, 우리 모임에서도 꼭 다뤄야할 개념이라 생각했지요. 컬러리즘은 한 인종이나 민족 집단 내에 존재하는 차별을 일컫는 용어예요. 흑인 커뮤니티에서는 피부 톤이나 얼굴 모양, 머리 결 같이 흑인임을 나타내는 외모 지표가 차별의 근거가 돼요. 사람들은 보통 컬러리즘을 거론하길 꺼려요. 주류 인종에 의한 차별만 다루기도 버겁고, 자기들끼리도 화합하지 못하면서 무슨 인종차별을 해결하냐는 외부의 공격을 받을까봐 우려하는 거죠. 


하지만 컬러리즘은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뚜렷한 현상이에요. 독일에 있는 아프리카계 사람들은 대부분 혼혈이니 여기서 역시 컬러리즘이 작동하고, 그 양상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두 분 다 가나 출신이고 자신은 독일에서 나고 자란 한 멤버는 짙은 피부를 갖고 있어요. 혼혈이 다수인 독일 흑인 커뮤니티에서 자기 이야기는 안 들린다고 느끼죠. 반면 흑인 혼혈들은 피부 톤이 아무리 옅어도 독일 사람으로 인정받기까지 어려움을 겪는다는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어요. 


아프리카 디아스포라에서는 농장의 노예와 가정집에 소속된 노예가 좀 다른 것으로 정의되는데, 피부 톤이 구분선이 됐어요. 엷은 톤의 흑인은 백인 주인의 강간에 의해 태어나 집안일을 하는 사람인 경우가 많았죠. 물론 학대를 겪지만 경우에 따라선 집을 벗어나 자유의 몸으로 다른 직업을 갖거나 백인 문화에 동화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어요. 짙은 피부 톤의 흑인 노예들은 반면에 농장에서 더 고된 노동을 감당해야 하고 거길 떠날 가능성이 별로 없었고요. 그런 의미에서 피부 톤이 얼마나 백인에 가깝느냐가 더 나은 자원과 기회에 대한 접근권과 연관됐고, 흑인 커뮤니티 내에서 피부 톤을 이유로 차별이 일어난 겁니다.”

▶ 컬러리즘(colorism) 워크숍에서 쓰인 슬라이드 자료 


컬러리즘 워크숍은 쏘울 시스터즈 멤버들이 그 동안 서로의 차이에 대해 느꼈던 막연한 감정들을 분명한 언어로 설명하고 납득하는 과정이었다. 각자가 어디서 왔고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말하는 것만으로 새로운 정보가 너무나 많았다. 


여성 커뮤니티인 만큼 페미니즘의 주요 개념인 상호교차성도 앞으로 더 탐구해 멤버 간 연대를 강화할 것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의미로 보는 영화”(Screenings with Meaning)라는 영화토론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여성 집단 내의 특정 정체성이나 이슈를 드러내는 영화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구성인데, 첫 번째 주제는 흑인 퀴어여성이다. 컬러리즘과 상호교차성의 관점에서 시에나는 자기 위치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을까?


시에나: “저는 미국 여권을 갖고 있고 영어가 모국어이니 분명 특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죠. 대학 학위가 있어서 그걸 발판 삼아 독일에 올 수 있었고요. 풀타임 노동을 하지 않고도 경제적으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어요. 저의 피부 톤은 아주 엷지도 짙지도 않은 중간쯤이라서 심각한 컬러리즘을 겪지 않아요. 이런 점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흑인여성은 인류문화의 ‘회전문’이라는 말 


시에나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갖고 있고 독립된 자아를 중요시하는 페미니스트이다. 그런데 내가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기까지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쓰지 않았다. 어떤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물었다. 언제 페미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냐고. 그런 결심은 한 적 없단다. 어릴 적부터 스파이스 걸스나 미녀삼총사 같은 여성들이 활약하는 미디어 콘텐츠에 열광했고 그런 여걸이 되길 꿈꿨는데도.


시에나가 가까이서 보고 자란 여성상 역시 강인하고 독립적인 존재였다. 엄마는 이혼 후 쓰리-잡을 뛰면서 아이들을 키운 싱글맘이었다. 군부대에 비정기적으로 출장을 나갔고, 청소녀 교정 쉼터에 나가면서 부동산 중개사로도 일했다.


시에나:“페미니즘에 크게 공감한 적 없었어요. 왜냐면 저한테 페미니즘은 언제나 굉장히 백인스러웠거든요. 이미 특권층이고 여러 가지 자원이나 힘을 가지고 있는 중산층 여성들이 더 가지려고 싸우는 것. 대학에 가서 인종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이론적으로 파헤쳐보면서 비로소 페미니즘을 다시 봤어요. 페미니즘 문학을 비판하는 민족지학적 관점을 통해서요. 그러면서 내가 탐착치 않아 했던 게 ‘백인 주류 페미니즘’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호손 스필러(Howthorn Spillers)가 남긴 말이 있어요. “흑인여성은 문화의 연결통로(vestibule)이다.” 한동안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vestibule’은 연결통로 중에서도 보통 큰 건물 현관을 가리키는데, 찬 공기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걸 막아주는 회전문 같은 거예요. 흑인여성이 문화적으로 이런 역할을 한다는 건 이들이 인류(humanity)과 비인류(inhumanity)사이에 통로라는 말이에요. 저 같은 사람은 여성, 인간, 그런 것들을 결정하는 일종의 통과 지점에 존재한다는 의미기도 하고요. 한마디로 문화의 바깥에 있어요. 


▶블랙 페미니즘을 담은 벨 훅스의 <Ain’t I a Woman>(Routledge, 2014)


실제로 흑인여성들이 내면화하게 되는 자기 이미지는 사회가 흔히 말하는 ‘여성스러움’과는 아주 달라요. 제 경우에도 스스로를 전형적인 여성이라 느껴본 적 없어요. 사람들이 저를 여자로 본다는 느낌도 안 들고요. 주류 페미니즘은 ‘여자는 약하다’, ‘여자는 보호를 받아야 한다’, ‘여자들은 내숭을 떤다’, ‘부드럽고 섬세하다’와 같은 생각들에 반기를 들죠. 하지만 어차피 사람들은 흑인여자를 그렇게 안 보거든요. 흑인 여자들은 힘 세고, 남자를 이겨먹고, 성욕 넘치고, 주도적이라는 게 사회통념이에요. 그래서 제가 페미니즘을 제 삶에 연결시키지 못한 겁니다. 


물론 흑인여성들도 학대나 괴롭힘, 차별을 경험해요. 우리도 가정폭력, 성폭력에 맞서고 재생산 권리를 위해서 싸워야죠. 하지만 주류 페미니즘의 근본적인 바탕은 제가 경험한 여성성과 달라요. 흑인남성의 위치가 열등한 사회 현실을 알기 때문에 남성과 동등해지고자 투쟁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고요.


기존 텍스트 비판을 통해서였지만 결국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어 기뻐요. 다만 어디에나 들어맞는(one-size-fit) 그런 페미니즘을 없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려고 해요. 지금도 스스로를 흑인 페미니스트라고 여기지만 페미니스트라는 용어 그 자체는 좀 조심스러워요. 흑인여성은 언제나 강해야만 했고 스스로를 지켜야했어요. 거리에서 쓰레기를 줍든 남의 집 청소를 하든 힘든 노동을 해왔어요. 백인여성들의 욕구와 같을 수 없는 거죠. ‘당신 애들을 돌보는 게 내 노동인데, 당신은 일을 하고 싶다는 말입니까?’


저도 미국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상호교차성의 문제를 점점 더 많이 다루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그런데 미투(#MeToo) 캠페인을 보면서 우린 물어야 해요. 헐리우드의 유명 백인 여배우가 성폭력을 당했다는 것이 유색인종 공장노동자 여성들에겐 무슨 의미인가? 전 페미니즘에 대해 항상 생각해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을 뿐이죠. 그 말은 저 말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만들어진 거니까요.” 


페미위키(femiwiki.com)가 정의하는 상호교차성이란, 한 사람의 사회 정체성을 규정하는 범주인 젠더, 인종, 사회 계급 등이 서로 겹쳐서 상호작용하는 현상이다. 그 사람의 겪는 억압, 지배구조, 차별 역시 그 복잡한 맥락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이 패러다임은 ‘교차 페미’라는 약칭과 함께 한국에서도 조금씩 논의되고 있으나 아직은 일상 언어가 아니라 이론적 개념이다. 상호교차성 관점에서 동남아 이주여성, 코피노 학생, 레즈비언, 장애여성, 빈곤층 여성을 논하는 페미니즘은 접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또, 벨 훅스와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다른 인종 정체성과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음에도, 두 사람의 텍스트가 별 구분 없이 ‘미국의 유명 페미니스트가 쓴 책’으로 읽힌다. 


‘같은 여자로서 공감한다’는 말은 듣기 좋지만, 엄연히 말해 ‘같은 여자’는 허상이다. 여자라고 다 같은 처지에 있지 않다. 강남역 살인사건, OO내 성폭력, 낙태죄 폐지, 미투 캠페인과 같은 사회 저변을 뒤흔드는 이슈에서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은 수많은 여성들에게 언어와 소속감을 제공했고 인식의 혁명을 시작하게 했다. 하지만 여성들 개인이 고유한 자기정체성을 명확히 바라보며 ‘나의 페미니즘’을 만들게 하지는 못한 것 같다. 앞으로 이 시대의 페미니즘이 더 넓고 깊게 폭발하려면, 나와 네가 선 지점에서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로 인한 차별과 소외는 없는지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 


인터뷰를 진행한 베를린의 어느 날 밤, 나는 피곤한 몸을 깨우려 콜라를 마시고 시에나에게는 와인을 한 잔 건넸다. 거울 속의 까만 얼굴을 보며 “난 한참 부족해. 안 예뻐. 여성스럽지도 않아”라고 속상해하던 소녀는 스스로 ‘흑인여성’이라는 튼튼한 갑옷을 입는 여성으로 성장했다. 대서양을 건너 홀로코스트의 나라로 왔다. 독일인들에게 제대로 된 인종 담론을 좀 키워보라 하고,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도 자나 깨나 흑인 페미니스트로 산다.


▶ <미러 미러>(Mirror, Mirror) 연극 공연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발언중인 시에나 데이비스. ©Wagner Carvalho 


시에나는 비욘세의 앨범 <레모네이드>(Lemonade, 2016)에 대한 논문을 썼다. 흑인 미국 여성이 만든 영화로는 최초로 미국 전역에 배급된 영화 <먼지의 딸들>(Daughter of the dust)(1991)과 유사한 모티브가 많이 사용된 이 음반에 비욘세는 아프리칸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흑인 조상들의 영성을 담았다. 많은 이들이 이 앨범에 찬사를 보내는 한편, ‘피부 톤이 엷은데다 금발머리를 땋고 다니는 돈 많은 흑인여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시에나는 이러한 현상을 컬러리즘 관점에서 분석했다. 


학사 졸업 논문은 흑인 펑크문화 온라인 커뮤니티인 ‘아프로펑크’(Afropunk)에 대한 것이었다. 음악 커뮤니티로 시작해 대안문화예술 플랫폼으로 성장한 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어떻게 실질적인 사회 변화에까지 영향을 줬는지를 ‘뉴미디어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틀에서 탐구했다. 곧 시작할 석사 논문은 쏘울 시스터즈 활동을 돌아보고 전망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시에나 데이비스가 추천하는 블랙 페미니즘 책들 


-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 옥타비아 버틀러 <킨>(비채, 2016)

- Bell Hooks <Ain’t I a Woman: Black Women and Feminism> (Routledge, 2014)

- Janet Mock <Redifining Realness: My Path to Womanhood, Identity, Love & So Much More> (Atria Books, 2014)

- May Ayim <Showing our Colors, Afro-German Women Speak Out> (Th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1991)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여성과학자들, 과학계 성차별과 성희롱에 맞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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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았던 ‘여성의 과학’

걸스로봇의 AAAS 살롱에서 알게 된 과학이야기①



‘19.3% vs 80.7%’ 무슨 비율일까? 무엇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앞의 비율이 여성이고 뒤가 남성이겠구나, 하고 감이 오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에서 매년 조사하여 발표하고 있는 ‘여성과학기술 인력 현황’(2016년)에 따르면, 저 비율은 과학기술연구개발 인력으로 고용된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다.


자연공학계열 내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현저히 낮다. 이런 현실이 이제는 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더 많은 여성들이 이공계 분야에 진출하도록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돕는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 있다. ‘걸스로봇’(Girls’ Robot)이라는 소셜 벤처다.(참고 기사: ‘공학’에서 ‘로봇’하는 ‘여성’들이 말하다 http://ildaro.com/7957)


2015년 설립된 이후 인재양성 프로그램과 이공계 여성들을 위한 행사 및 세미나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던 ‘걸스로봇’. 이번엔 AAAS(전미과학진흥협회) 연례회의에 참가하여 그곳에서 듣고 배운 정보를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렇게 걸스로봇의 ‘AAAS 살롱’은 지난 3월 31일(토) 낮 2시, 서울 구글 캠퍼스에서 열렸다.


▶ 걸스로봇 AAAS 살롱의 시작을 알리는 이진주 대표  ⓒ일다


‘사기꾼 신드롬’을 겪는 여성들


먼저 마이크를 잡은 이진주 대표는 ‘걸스로봇을 왜 만들게 되었는지, 지금까지의 과정은 어땠는지’ 이야기하면서 여전히 과학기술 분야에서 여성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고 지적했다.


3월 카카오에서 개최한 인공지능(AI) 주제로 한 강연에서, 외부 전문가로 초청된 사람이 모두 남성이었던 점(조승연 작가, 김태훈 칼럼니스트, 김경일 교수, 김영하 소설가)과, CBS TV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4월에 진행 예정인 블록체인 주제의 강연자 모두가 남성인 점을 꼬집으며 “이런 선택, 너무 게으르지 않나요?” 물음을 던졌다.


‘부를 수 있는 여성 전문가가 없는데 어쩌란 말이냐’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과학이나 기술을 떠올렸을 때, 여성의 이미지와 잘 연결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왜 없을까?’ 생각해보아야 한다.


▶ 걸스로봇 장윤원 씨가 발표한 ‘사기꾼 신드롬’ 체크리스트  ⓒ일다


“사기꾼 신드롬(Imposter syndrome)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나요?” 걸스로봇 멤버인 장윤원 씨는 <여성의 과학>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시작하면서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내가 이런 자리에 있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고, 그래서 불안하고 쫓겨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걸 사기꾼 신드롬”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장윤원 씨는 AAAS(전미과학진흥협회)에서 열린 ‘나의 목소리를 구축하고 내 안에 내재된 사기꾼 신드롬에서 벗어나기’(Cultivating Your Voice and Banishing Your Inner Impostor)라는 제목의 STEM 분야 여성들을 위한 워크숍(Workshop for Women in STEM) 내용을 소개했다. (※STEM: 과학 Science, 기술 Technology, 공학 Engineering, 수학 Mathematics)


과학자들이 모이는 연례 회의에서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한 워크숍’을 연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한다. 장윤원 씨는 워크숍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했는데, 먼저 발표자가 ‘나는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다,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등의 체크리스트에 해당되는 사람이 있으면 일어나 보라’고 했을 때, 그 방에 있는 모든 여성들이 일어났다는 것.


어떤 분이 발표자에게, ‘사기꾼 신드롬’을 겪는 남성과 여성의 비율에 대한 데이터가 있냐고 질문을 했을 때 발표자가 답변했다는 내용은 더욱 흥미롭다. ‘익명으로 조사가 진행되고 젠더 표시를 안 하기 때문에 데이터는 없다. 하지만 경험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내가 이런 워크숍을 열었을 때 오는 사람은 다 여성이다. 남성들이 가끔 오는데 그 사람들은 퀴어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저도 의문이 들더라구요. 왜 이런 워크숍에 오는 건 다 여성이거나 퀴어일까요?” 장윤원 씨는 “그런 고민을 가지고 AAAS의 다양한 세션을 들었고, 두 개의 세션에서 답이 될 수 있는 힌트를 얻었다”고 밝히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공계 교육 진입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벽


장윤원 씨가 첫 번째 힌트를 얻은 건,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례를 들을 수 있었던 ‘흑인 교육 시설의 STEM 분야의 여성들: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미국’(Women in STEM at Historically Black Institutions: South Africa and the United States) 세션이다. 발표에 따르면 “남아공은 ‘아파르트헤이트’라고 하는 인종분리 정책으로 몇 십 년 간 백인과 흑인(이때의 흑인은 백인이 아닌 유색 인종을 통칭)이 철저히 분리되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학교도 일반학교와 흑인학교로 나눠져 있었다.”


▶ 남아공의 성별 및 인종 별 과학자 수에 관해 설명하는 장윤원씨 ⓒ일다


“남아공에서 어느 정도 유명하다고 알려진 과학자 중 93명이 백인남성, 10명이 흑인남성 그리고 단 4명만이 흑인여성”이라고 말한 장윤원씨는 “최근 흑인 학생들이 대학 등록금 면제 시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1994년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고 아파르트헤이트는 사라졌고 이제 제도적으로 흑인 학생들도 ‘일반학교(백인학교)’에 갈 수 있지만, 그들에게 그 등록금은 너무 비싸서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시위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제도가 마련되었다고 하더라도 일종의 문화적 코드, 경제적 계층성이 있어서 여전히 흑인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환경”이라는 거다. “이 지점이 바로 우리가 생각해 볼 지점”인 것 같다며, 장윤원 씨는 “제도적인 차별은 사라졌지만 그것이 문화적 코드로 남아서 여전히 누군가를 배제하고 차별하고 있진 않은지에 대한 생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 현재 이공계 대학의 문은 여성에게도 열려 있고 그걸 막는 제도는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부터 ‘수학, 과학은 남자들이 하는 것이고 여자 애들은 수학 머리가 없어서’ 식의 말을 들으며 자란다. 여성들의 이공계 진입은 차단되어 있지 않지만 ‘결국 (남자에 비해) 안 될 텐데’, ‘역시 (여자라서) 못하는 구나’ 라는 높고 낮은 벽들을 뛰어 넘어야만 한다.


여성과학자들, 과학계 성차별과 성희롱을 겪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를 지닌 많은 여성들이 이공계 진입에 성공하고 있다. 이진주 대표는 AAAS(전미과학진흥협회)를 설명하면서 “현재 AAAS 회장은 여성이고, 전직 회장도 여성, 차기 회장도 여성이다. 그리고 현재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회장도 여성”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맥 어리(Meg Urry) 교수도 그런 많은 장벽을 뚫고 예일대 천문대 물리학과 학과장과 미국천문학협회 회장 등 화려한 경력을 쌓은 여성과학자다.


“뛰어난 과학자인 맥 어리 교수가 올해 협회에서 발표한 건, 자신의 논문이나 연구 결과가 아니라 <성희롱: 그것은 무슨 의미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Sexual Harassment: What It Means and What We Can Do About It) 세션”이라고 얘기한 장윤원 씨의 말에서 두 번째 힌트가 풀리기 시작했다.


장윤원 씨는 “세션이 아침부터 시작되었는데, 언론 매체를 통해서 볼 수 있던 유명한 여성 과학자와 교수들이 그 자리에 다 있어서 놀랐다”면서, “더 놀랐던 점은 그렇게 대단하고 유명한 과학자가 ‘대학원 시절 나의 교수님은 나에게 신이었다’고 발표를 시작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맥 어리 교수는 현장실습을 나간 연구자들이 겪는 성폭력 비율 그래프를 설명했는데, 눈여겨봐야 할 점은 남성 연구자들의 가해자는 동료인 반면 여성 연구자들의 가해자는 상사, 즉 교수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맥 어리 교수도 여성들이 성폭력을 경험하는 상황이 얼마나 위계적인 상황에서 발생하는지를 분명히 짚었다. 피해여성은 성폭력이 성폭력인지 몰라서 넘기거나 어쩔 수 없이 참는데, 참으면 참을수록 자신을 자책하게 되고, 나중에 알아차리는 경우에는 이미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덧붙였다.


맥 어리 교수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 중에 핵심인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건 연구 부정행위와 같으니 규칙을 만들어서 용납하지 말라”는 것과 “성폭력을 방관하지 말라”는 것.


▶ 현장실습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어떻게 해야 할까. 맥 어리 교수가 말한 조언 두 가지


맥 어리 교수의 조언을 전하며 장윤원 씨는 “미국에서는 연구 지원을 받던 연구자가 성폭력을 저질렀을 경우, 펀딩 기관에 곧바로 보고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은 연구 결격 사항이기 때문”이라는 중요한 시사점도 전달했다.


여성 과학자/기술자는 ‘정말’ 없을까


참여자들의 그룹토론 시간에 어느 남성 개발자가 요즘 자신도 의문이 드는 게 있다며 이런 말을 했다. “동료 중에 여성 개발자가 있는데, 개발자 모임이나 세미나 같은데 가면 다른 남성 개발자들이 ‘여기 왜 왔냐, 누구 따라서 왔냐’고 묻거나 심지어 ‘남자친구 따라서 왔냐’며 개발자 취급을 안 해준다는 거다. 그게 짜증나니까 결국 안 가게 되고. 그러니까 여성이 안 오는 건데 거기 모인 사람들은 ‘역시 개발자 중엔 여성이 없어’ 라는 말을 하는 거다.”


자, 그럼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과학기술 분야에서 생각나는 여성과학자가 없다면 그 이유는 무얼까? 아니, 정말 없을까?’ 사기꾼 신드롬을 겪으며 문화적 차별과 배제에 맞서고 성폭력 위헙에 노출되면서까지 과학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뛰어난 연구 성과를 만들어 온 여성 과학자들의 존재를 몰랐거나 무시해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스컬리 이펙트’(Scully Effect)라는 말이 있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되었고 2016년부터 다시 방영 중인 미국 드라마 시리즈 ‘엑스 파일’(The X-Files)의 주인공이자 의사/과학자로 나오는 다나 스컬리에 영향을 받아, 여성들의 STEM 진출이 늘어난 효과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 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 스컬리는 TV 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미 수많은 스컬리들이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게으르게도’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다.


걸스로봇의 말대로 이제 그런 게으름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들이 말하는 과학은 흥미롭고 색다르다는 사실, 그걸 비밀로 묻어 두기엔 스컬리가 될 수 있는 소녀들이 너무 많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보이지 않았던 ‘퀴어의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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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았던 ‘퀴어의 과학’

걸스로봇의 AAAS 살롱에서 알게 된 과학이야기②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지난 기사 ‘여성의 과학’ 편에 이어 이번에도 숫자로 시작해보려고 한다. ‘92.6%, 87.1%, 81%, 44.4%’ 이 숫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에 따르면 저 숫자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하여 평소 누군가에게 욕을 듣거나 위협이나 폭행을 당하는 등 범죄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는지 묻는 항목’에서 ‘매우 그렇다’ 혹은 ‘그렇다’라고 답한 성수자, 여성, 장애인, 이주민의 비율이다.


해당 문항 외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이유로 비난을 받을까봐 두려움을 느끼는지’, ‘온라인에서 혐오표현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답한 응답자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건 성소수자였다.


▶ 걸스로봇이 전미과학진흥협회에 참여하기 위해 모금을 진행한 스토리펀딩- AAAS 여자들 ‘과학과 젠더렌즈’ 페이지


걸스로봇이 AAAS(전미과학진흥협회)에 참가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스토리펀딩을 진행 했을 때, AAAS와 여성과학자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를 8편 연재했다. 그런데 ‘6화 퀴어를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게시물에만 유독 댓글이 많았다. 대다수는 혐오표현으로 채워진 댓글이었다.


이렇듯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 ‘지옥으로 가라’는 혐오와 맞서야 하고, 드러내지 않으면 ‘성소수자 없는 청정구역’ 같은 말을 들으며 울분을 삼켜야 하는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현실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서로 다른 취향, 지향, 재능을 갖고 태어난 여성들이 어떠한 사회적 편견이나 압력 없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비슷한 능력을 가진 다른 이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으며 하고 싶은 일을 오래도록 즐기면서 사는 세상을 꿈꾼다’는 걸스로봇은, 그렇기 때문에 이진주 대표의 말처럼 “아마도 국내에서 최초로 논의되는 ‘퀴어의 과학’”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다.


과학자들이 ‘차별’에 관해 논의하는 이유


걸스로봇이 AAAS(전미과학진흥협회) 연례회의에 참가하여 그곳에서 듣고 배운 정보를 공유한 자리 ‘AAAS 살롱’에서, 특히 눈길을 끈 발제는 ‘퀴어의 과학’이었다. 자신을 트랜스 여성(MaletoFemale Transgender)이라고 소개한 송아 씨가 발표를 맡았는데, 송아 씨는 자신이 겪었던 차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트랜지션(Transition) 동안 회사를 다니면서 겪은 차별과 무시, 그리고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트랜지션을 시작한다 - 회사를 못 다닌다/돈을 못 번다 - 트랜지션에 어려움을 겪는다’의 과정을 공유하기도 했다.


▶ 2018년 AAAS의 세션 검색에서 ‘LGBT’로 검색했을 때 결과로 나온 것 중 일부


과연 ‘차별 당했다’고 말하는 게 과학이랑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갸우뚱할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이번 AAAS(전미과학진흥협회)에서 LGBTQ 관련 세션을 찾아보니 ‘STEM 분야의 LGBTQ+를 위한 안전한 환경 만들기’, ‘STEM 분야의 퀴어: LGBTQ+ 정체성과 경험에 대한 연구’, ‘물리학 내 LGBT+ 환경과 사회에게 권하는 권고사항’ 등이 논의됐다. (※STEM: 과학 Science, 기술 Technology, 공학 Engineering, 수학 Mathematics)


세션에 대한 설명엔, 퀴어인 STEM 전문가들이 퀴어가 아닌(non-queer) 자신의 동료들과 얼마나 다른 환경 속에 있고, 그 이유는 왜인지, 그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는지, ‘이성애중심주의’와 ‘호모포비아’, ‘트랜스포비아’에 어떻게 대처하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 것인지 등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나와 있다.


과학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왜 이런 세션과 논의가 진행되는지 말하기 위해선, 먼저 앨런 튜링(Alan Turing)을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앨런 튜링은 최초의 컴퓨터를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컴퓨터공학과 인공지능 연구의 아버지라 불린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의 암호 체계를 해독함으로써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공헌을 했다. 하지만 이후 동성애자인 것이 발각되면서 당시 영국 법에 의해 범죄자가 된다. 정부를 위해 일하던 것에서 쫓겨나고 연구에 제한을 받게 된다. 감옥에 가는 대신 화학적 거세를 선택했던 그는 결국 1954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앨런 튜링은 역사에 남을 뛰어난 능력을 가졌음에도,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이 범죄로 간주되는 안전하지 않은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연구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환경은 실질적으로 그의 삶에 위협이 되었다.


퀴어인 과학자가 경험하는 환경


▶ LGBTQ+ 과학자들이 자신의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공개했는지에 관한 그래프.  ⓒJeremy Yoder, Allison Mattheis, “Coming out: the experience of LGBT+ people in STEM”


지금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STEM 분야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생물학자 제레미 요더와 교육학자 앨리슨 매티스가 2016년에 발표한 "STEM 분야의 퀴어"(Queer in STEM: Workplace Experiences Reported in a National Survey of LGBTQA Individuals in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Careers) 논문에 따르면, 많은 과학자들이 가족과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한 것에 비해 동료에게는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직장 내 커밍아웃 정도에 따라 느끼는 편안함과 불편함 정도. ⓒ2016 American Physical Society


가족, 친구만 아는 걸로 충분하지 않냐고? 전미물리학협회에서 2016년에 발표한 “물리학 내 LGBT 환경”(LGBT Climate in Physics: Building an Inclusive Community) 자료는 물리학계에서 일하는 LGBTQ+ 인구의 직장 내 ‘오픈 정도’와 ‘편안함/불편함’을 비교하고 있다. 모든 혹은 대부분의 동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힌 경우 약 70%가 편안하다고 답했지만,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거나 몇몇의 동료만 아는 경우에는 약 70%가 직장 생활에 불편함을 느낀다고 답했다.


그리고 커밍아웃을 했든 안 했든, 약 40%가 직장에서 ‘성희롱, 언어희롱, 혐오발언, 스터디 그룹 및 소셜 활동에서 왕따 당하기, LGBT 정형화하기, 의도적으로 젠더 잘못 부르기 등’의 배제를 목격하고, 약 20%가 그걸 직접 경험한다고 밝혔다.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 그리고 이런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연구를 진행하는 협회가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많은 퀴어 과학자들이 ‘과학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인지하기 때문이다.


더 많은 퀴어가 과학자가 될 수 있는 환경을


세계적인 과학잡지이자 AAAS가 발행하는 <사이언스>(Science)의 3월 14일자 기사, “STEM이 남성 LGBQ 학부생을 잃고 있다”(STEM is losing male LGBQ undergrads)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몇 가지 있다.


<사이언스>는 브라이스 휴(Bryce Hughes)가 발표한 논문 “STEM에서 커밍아웃하기”(Coming out in STEM: Factors affecting retention of sexual minority STEM students) 결과를 분석했다. “이성애자인 학생과 LGBQ(*트랜스젠더는 이 조사에서 제외)의 STEM 학부생들이 그 전공을 계속 지속하는가를 비교해봤을 때 각각 71%과 64%가 나온 점”을 지적했다. 즉 LGBQ 학생들이 중간에 포기하거나 그만두는 비율이 높다는 거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이언스>에서 언급한 건 미시건 주립대학의 크리스틴 렌(Kristen Renn) 교수의 연구 결과인 “퀴어 학생들이 종종 전공을 바꾸는 이유는 ‘그들의 자신들이 속해있는 커뮤니티나 지역에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겪었던 부정의를 해결하고자, 과학 대신 교육이나 사회 복지 등으로 방향을 바꾸는 걸 택한다”는 것.


퀴어 학생들의 선택이니까 차별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왜 ‘부정의를 해결해야 함’에 사명을 느끼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차별의 결과로 STEM을 지속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브라이스 휴의 연구 결과를 조금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남성 LGBQ가 STEM을 떠나는 경우가 이성애자 남성보다 17% 높았고 흥미롭게도 여성 LGBQ는 이성애자 여성보다 18% 낮았다.


<사이언스>는 이 결과에 대해 미시건 주립대학의 에린 체흐(Erin Cech)의 “STEM에서는 ‘여성성’을 평가 절하하는 분위기가 있고, 이성애자 남성이 (그리고 종종 레즈비언들도) 겪지 않는 차별을 게이 남성들이 겪는다”라는 말을 인용한다. 여성과학자들이 겪는 차별을 떠올려 보면 STEM 분야에서 ‘여성성’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분석이 충분히 납득된다. 그리고 이런 결과는 STEM 분야의 뿌리 깊은, 여성성을 포함한 여성에 대한 차별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다시 한 번 고민하게 한다.


‘모두의 과학’이 되도록


이제 ‘과학적 근거’들을 확인했으니 왜 과학계가 차별을 이야기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걸스로봇의 ‘AAAS 살롱’에서 ‘퀴어의 과학’ 발제를 맡은 송아 씨가 왜 자신이 겪었던 차별 사례를 이야기해야 했는지도 말이다.


▶ ‘퀴어의 과학’ 발제를 진행 중인 송아 씨.  ⓒ일다


자신의 성정체성이나 성적 지향과 상관없이 누구나 과학을 즐기고 참여할 수 있도록, 또 과학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살롱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퀴어의 과학’을 이야기했다. 송아 씨는 발제 마지막에 “우리 안에서 합의점을 찾고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것과, 안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할 일로 꼽으며 “행동으로 나서달라” 부탁했다.


걸스로봇 ‘AAAS 살롱’의 또 다른 주제였던 ‘대중의 과학’ 발제를 진행한 윤세린 씨는 문화적 맥락을 고려한 과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며 사례를 들었다. “푸에르토리코 학교에서는 식물의 씨앗이 바람에 잘 날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고 알려줄 때 헬리콥터 프로펠러처럼 생겨서 잘 날아가는 단풍나무 씨앗을 예시로 들면 아이들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한다. 평생 그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대신 푸에르토리코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프리카 튤립 씨앗으로 설명하면 쉽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 미국 STEM 내 퀴어들이 만든 단체 NOGLSTP의 퍼레이드 모습. ⓒNational Organization of Gay and Lesbian Scientists and Technical Professionals (출처: NOGLSTP 페이스북)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과학은 과연 어떤 기준에 맞춰져 있었을까?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성이 아닌 사람들도 쉽게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을까? 과학이 사실을 근거로 한 정직한 답을 추구한다면, 이제 그 기준은 좀 더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렇기에 ‘여성의 과학’, ‘퀴어의 과학’이라는 말은 과학을 나누는 게 아니라 넓히는 과정일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정보와 이야기를 담은 이번 AAAS 살롱을 통해 걸스로봇은 우리가 몰랐던 과학을 보여주고 많은 이들에게 그 과학을 함께 만들어 나가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국적은 중요치 않다, 우린 안전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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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로마니 여자가 겪은 유럽역사는 다르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라드밀라 아닉②


독일에서 망명신청자(asylum-seeker) 신분으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이 연재는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에서 발행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세 번째 에세이 “유럽인들은 ‘그들의 유럽’에 우리를 원치 않는다”(The Europeans don‘t like us in “their” Europe)의 주인공은 ‘집시’라 불리는 로마니 민족인 라드밀라 아닉(Radmilla Anic)으로, 세르비아에서 자립을 원하는 여성들을 돕는 사회복지단체를 이끈 인물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자유로웠던 시절은 가고, 끔찍한 전쟁의 트라우마가…


내가 독일로 온 것은 1990년대 티토 정권 때 독일에 여행자로 와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여동생의 딸이 27년째 독일에 살고 있기도 하다. 1990년대에 우리는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었다. 티토는 이를 금지하지 않았고, 로마니(Roma, Romani; 흔히 ‘집시’라고 불리는 민족)들에게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누구도 노숙자로 살거나 배고프거나 목마르지 않았다. 모두들 여권, 우릴 어디로든 데려갔던 빨간 여권을 갖고 있었다.


티토 정부에서의 좋은 시절. 인도의 인디라 간디(Indira Gandhi) 혈통이고 롬킨자(Romkinja; 세르비아-크로아티아어로 로마니 여성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한 우리는 티토와 관계가 좋았고 서로 자주 소통했다. 티토는 슬로베니아 사람이었지만 진정한 유고슬라비아인이었기에 개의치 않았고, 로마니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공산주의 정권이었지만 우리는 잘 살았다. 요즘도 그 때와 같은 여권을 갖고 있다. 한동안 파란색이었다가 다시 빨강이 됐다. 지금도 여권으로 여행을 다닐 순 있지만 그 때가 더 나았다. 비자가 필요 없었다. 티토 덕분에 그런 장벽이 없었다. 최근 들어서야 비자 의무 규정이 폐지되어 사람들이 유럽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세르비아가 속했던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주석을 지낸 정치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는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내 민족, 종교, 언어 갈등을 해소하고자 ‘형제애와 통합 정책’(brotherhood and unity)을 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배제하고, 소수민족에게도 혜택을 충분히 제공하려 했다. 로마니 민족 정체성이 강한 화자가 유고슬라비아 공화국과 티토에게만은 아직까지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소련의 스탈린과 갈등을 빚고, 매카시즘으로 인해 미국과의 소원해지는 와중에도 비동맹주의 외교를 고수했다. 냉전시대 제3세계, 자유진영, 공산진영을 넘나는 실용주의 외교를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쟁은 끔찍한 시기였다. 우리 모두 공황장애와 공포를 겪었다. 정말 정말 힘들었다. 얼마나 많은 유럽 국가들이 슬로베니아를 폭격했는지 모르겠다. 로마니들에게 이 시기는 특히 힘들었다. 아이들은 모두들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 둘 중 하나는 갖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나도 아팠다. 심장병이 있는데, 그 때 겪은 폭탄이니 가스 때문에 시작됐다. 사람들이 다리를 전부 폭격했는데, 제대로 치우지도 않았다. 나는 고혈압과 스트레스, 공포증 때문에 매일 심장약을 먹는다. 오늘까지도 그 때의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지금은 경찰이 찾아와서 나를 독일에서 추방시키는 것에 대한 공포로 바뀌었다. 지금도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것이다. 안심할 수가 없다.


※ 화자가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1992~1999년 다발적으로 있었던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6개국이 소속) 모두에 영향을 끼쳤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 이탈을 선언한 후, 이를 저지한다는 목적으로 영토 전쟁이 시작됐다가 점차 민족주의 대결로 치달았다. 이 중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 정부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보스니아, 코소보에서 벌인 보스니아 전쟁(1992년 4월~1995년 12월)이 가장 참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차별적인 도시 폭격과 인종 청소, 집단 강간과 학살이 자행됐다.


강제수용소를 연상시키는 난민 임시숙소에서 살며


나는 지금 난민 임시숙소에 살고 있는데 상황이 무척 열악하다. 남자나 여자나 다 같은 화장실을 쓴다. 아랍인들 쿠르드족을 비롯해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데, 난 그들을 다 좋아하니까 상관은 없다. 내 말은 같은 샤워실에서 씻고 시설을 다 나눠쓴다는 것이다. 위생적이지 않다. 최근에는 지독한 알러지도 생겼다.


또 다른 문제는 저마다 상황이 다른데도 여자 세 명을 한 방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몸이 아플 수도 있다. 다른 한 사람은 감염 때문에 막 병원에 다녀왔을 수도 있다. 거기서는 잠을 잘 못 잔다. 제대로 요리를 하거나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없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방귀를 뀌거나 기침을 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럴 수도 있고. 이런 생활은 쉽지가 않다. 수용소나 마찬가지다.


독일인들은 1941-1945년 2차 세계대전 시절, 그 때 했던 대로 하고 있다. 독일인들이 세르비아에서 로마니들을 잡아다 강제노역을 시켰던 것은 누구나 안다. 이미 벌였던 짓이다. 그 때 사람들을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었다. 옛날 히틀러 때 말이다. 세상을 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 스탈린그라드처럼 갈 데까지 갔다. 오늘날에는 전쟁이 없는 것뿐이다. 수용소가 싫으면 본인이 나가면 된다. 그게 오늘날의 방식이다. 예전에는 마음대로 떠날 수가 없었던 반면.


※ 나치 정권이 벌인 홀로코스트는 흔히 유대인 학살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 유럽에 살던 여러 소수 민족들 역시 ‘열등한 민족’으로 몰려 고통당했다. 특히 오스트리아에 거주하던 로마니들이 대거 강제 수용소로 잡혀갔고, 노역과 생체실험에 동원되었다. 25만~150만 명 가량의 로마니 인구가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로마니어 ‘Porajmos’라는 단어가 따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내 남편은 1941~1945년 독일 수용소에 있었다. 그가 북헨발트(Buchenwald)에 있었는지 다카우(Dachau)에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남편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이 잘 살았다. 지금도 독일은 난민들이 제 발로 독일을 떠나게 만들려고 수용소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로마니들은 튼튼해서 이 모든 걸 견딜 수 있다. 두 번째로 망명 신청을 하면 바로 감옥에 보낸다는 새로운 법이 통과된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는 끈질기고 강한 로마니들이라서 버틸 수 있다. 그들이 우릴 잡아간다 해도 살아남는다. 로마니들이나 할 수 있지 세르비아 사람들 같으면 못한다. 제 발로 떠날 것이다.


▶나치 정권이 벌인 홀로코스트로 인해 고통 당한 로마니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책 <공통된 슬픔>(Shared Sorrows: A Gypsy Family Remembers the Holocaust) Toby Sonneman, University Of Hertfordshire Press, 2002


혼자서 국경을 넘은 여성들이 희망을 잃지 않기를


나는 여기 혼자 왔다. 남편은 이미 죽고 없다. 나처럼 혼자인 모든 여자들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보호자가 없고 스스로 여자라는 자의식이 있는 이들. 이런 여자들은 항상 고독하고, 내가 그랬듯이 주변에 사람이 없나 둘러보지만 대개 아무도 없다. 다행히 내 주변에는 나의 권리를 위해 행진해주고, 지지와 보호를 자처한 독일 사람들이 있다. 독일 당국에서 나를 쫒아내려고 하면 나서서 보호해주고 체류권을 달라 목소리 낼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안다. 바로 그와 같이 여성들은 자기 권리와 인권을 위해 싸워야한다. 외롭게 홀로 오는 여자들을 돕기 위해 힘을 조직하는 작업이 모든 곳에서 벌어져야한다. 국적은 중요치 않다. 이게 내 생각이다.


자신의 상황을 증명할 서류 없이 온 사람들을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다. 나 역시 망명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오는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로마니 여성 대부분이 망명이 뭔지 모른다. 망명하겠다고 오는데 막상 어디로 가야할지, 자신이 어디로 보내질지 전혀 모른다. 오자마자 집을 구하고 좋은 조건에서 살게 될 거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어떤 재난이 뒤따르는지 모른다. 나이든 세대들은 내일 어디서 자게 될 지 모르는 이런 생활에 익숙하지만 요즘 세대들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잘 해내기 어렵다.


나는 긍정적으로 일이 잘 풀리길 기대해본다. 내가 앞날을 알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내 별자리는 황소자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전진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생일인 5월 15일에 체류권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나는 5가 5번이나 나오는 날 태어났다. 1955년 5월 15일 생. 우리는 결코 희망을 져 버려선 안 된다. 모든 로마니 여성들, 특히 나처럼 혼자 온 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세르비아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여기 남아서 내 권리를 얻을 것이다.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끈질긴 사람이니 절대 집에는 안 돌아간다. 다른 나라로 보내져 감옥에 갈 각오도 되어있다. 황소라면 이 모든 것을 견디고 계속 걸어갈 수 있다.


아직도 로마니 여성조직 관련 문서들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단체를 다시 열라”고 권한다. 나는 “못해요. 체류권이 없어서”라고 말한다. 체류권이 나오면 나는 어디든지 갈 것이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가 누구든, 내가 거기 있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니 민족의 삶과 역사,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2017년 6월 베를린에서 유럽 로마 문화예술위원회(The Roma Institute for Arts and Culture (ERIAC) 발족식이 열렸다. ⓒFranti?ek Bikar (Romea.cz)


[번역자 노트] 한 여성이 온몸으로 겪은 역사는 틀리지 않다


‘집시’에 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디즈니 애니매이션 <노트르담의 꼽추>에 나오는 에스메랄다에 대한 것이다. 화면 속 에스메랄다는 맨발에 탬버린을 쥐고 아름답게 춤추고 노래하는 여성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아름다운 에스메랄다는 자꾸만 위태롭게 쫓겼다. 말을 탄 높은 사람이든, ‘못생긴 꼽추’나 ‘푸줏간 백정’이든, 그녀를 원한다고 말하는 사내들의 눈빛과 말씨에는 모욕과 멸시도 같이 들어있었다. 멋진 춤을 선보이면 마을 사람들은 넋을 잃고 보다가도 ‘집시 계집애’라며 욕설을 내뱉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다른 공주들과 달리 에스메랄드는 섣불리 동경해선 안 될 사람 같았다.


디즈니 세대가 기억하고 있는 이 이야기는 사실, 15세기 파리의 사회상을 그린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de Paris)을 각색한 것이다. ‘집시’나 장애인(꼽추)에 대한 당대 지배계층, 종교계, 대중의 혐오와 편견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매력적인 집시소녀 ‘라 에스메랄다’는 결백하고 순수함에도 부당하게 죽임당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출신은 원래 집시가 아니라 집시 무리가 훔쳐가 기른 아이로 나온다. 거리를 떠돌며 가무로 번 푼 둔으로 겨우 연명하고, 선량하지만 무식하며, 사내들 아무나 탐내고 가지려하는 값싼 몸으로 묘사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가 아는 집시도 15세기 이미지에서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 사람들은 ‘떠도는 삶의 애환이 담긴 집시음악’을 즐겨듣고, 사진전이나 TV다큐멘터리를 통해 이들의 생활을 운치 있고 낭만적이라고 소비하지만, 막상 로마니들이 자기 동네에 정착하려고 하면 온갖 법규를 들이대며 불법으로 만든다. 세금을 내지 않고 복지혜택을 받는다고 매도한다. 애환을 승화한 예술은 반기지만 그 애환을 덜어줄 생각은 않는 것이 시민권과 주소지를 가진 유럽인들이었다.


라드밀라의 이야기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은 그녀의 투철한 민족의식이다. 로마니라는 이유만으로 부패한 경찰과 지역 마피아의 음해와 공격에 시달렸지만, 로마니로서의 자부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대물림되어 온 박해 경험은 그녀를 매사에 철저히 민족중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정형화된 학교 교육과는 전혀 다른 역사관을 갖게 만들었다. 격동의 유럽 현대를 살아온 60대 초반 여성이 풀어놓는 유럽사는 유고슬라비아 공화국의 사회주의 시대와 잔혹한 내전, 나치에 의한 인종 학살을 관통해 21세기 유럽연합과 난민 위기로 이어진다.


아무리 그래도 히틀러와 스탈린을 동급으로 놓거나 홀로코스트 강제수용소와 난민임시숙소를 연결 짓느냐고 기함할 독자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집시’ 여인이 온 몸으로 겪은 역사를 감히 틀리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서구권에서 소외되어온 동유럽, 그 중에서도 가장 무시당한 민족인 그녀의 공동체에게는 전체주의 정권 독재자로서 민중을 짓밟은 히틀러나 스탈린이 서로 가깝고, 로마니의 고통을 알아봤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자 티토와 민주당 출신 타딕 대통령이 모두 은인이다. 같은 난민이어도, 유럽에서 뒷 배경이 없는 로마니들이 더 불리한 대우를 받는다는 피해의식도 어쩔 수 없다.


얼마 전에 나는 바덴 뷔템부르크(Baden-Wurttemberg)주 소속 어느 군청의 난민 지원 부서에서 일하는 독일인 여성을 만났다. 그 사람의 주된 업무는 관할군으로 할당되어온 난민들에게 집을 찾아주는 것이라고 했다. 임대 매물로 나온 주택 물량이 턱없이 모자라기 때문에 거절의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담당자로 얼굴이 알려지자, 사무실 뿐 아니라 출퇴근길에서도 쫒아오면서 집 구해 달라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대면 업무를 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불만과 분노가 시스템을 향한 것임을 알면서도 소화하기 어려울 때도 많다고 했다.


그녀에게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다. 외국인청을 드나드는 나 역시, 담당 공무원에게 기대했던 친절과 마음 씀을 받지 못하면 그 개인에게 온통 분노가 쏠리곤 하므로. 행정체계 위, 아래에서 모두 효율성과 성과, 감정노동을 요구받는 그녀의 입장을 되도록 잊어버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한편, 그녀에게 들은 여러 지역사회 난민 현황 중 희망적인 소식도 있었다. 독일 내 난민, 망명자 인구가 늘다보니 제도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당사자들 간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그나마 보완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망명신청자들이 근래에는 그 네트워크를 통해 통역사를 구해오고, 관청에서 미처 모르는 주택 정보, 민간 프로그램을 알아오기도 한다고 했다. 여성 조직도 속속 생겼다. 결혼생활에서 학대와 불화에 시달리던 무슬림 여성들이 독일이라는 새로운 문화 속에서 이혼을 감행하고, 쉼터와 같은 여성들의 보금자리가 북적인다. 라드밀라와 같은 여성 리더, 자국에서 잔뼈 굵은 여성 액티비스트들이 다시 한 번 기지개를 켜고 있나 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하리타(정세연)-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내 삶에 회의를 느끼던 중 만난 ‘비전화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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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삶을 살아내는 힘”

[도시에서 자급자족 실험기] 봄을 발견하다


※ 필자 이민영님이 목공을 배우고 적정기술을 익히며, 동료들과 함께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도시를 꿈꾸면서 일상을 제작해나가는 과정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매해 봄이면 뉴스는 벚꽃 개화 시기를 등고선처럼 그린 지도를 띄우고, 산수유와 매화가 만개한 어느 남쪽 지역으로 놀러 온 관광객의 인터뷰를 싣는다. 내게도 봄이란 늘 그런 것이었다. 점퍼가 버거워 한결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나서야 깨닫는, ‘어느새’ 그리고 ‘나도 모르게’라는 말이 자연스레 앞에 따라붙는 그런 시기.


하지만 작년 봄 만큼은 하나의 또렷한 장면으로 각인되어 있다. 한 그루의 목련나무가 우뚝한 중정(中庭)으로 말이다. 해가 지나가는 길목 따라 하얗게 꽃이 피고, 그 나무 아래 놓인 원목 의자에 앉아 있노라면 머리 위로 스스럼없이 뚝뚝 떨어지던 목련. 떨어진 목련을 주워 입에 대고 볼을 부풀리며 바람을 넣던 사람들. 여태껏 그 어느 봄도 이토록 분명한 인상으로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2017년 봄은 그렇게 내게 조금 특별했다.


▶ 비전화제작자 1기들과 함께, 목련이 있는 중정(中庭)에서, 서울혁신파크  ⓒ비전화공방 서울


1년 전, 나의 일상에 억울함이 차올랐다


쑥스러워 엄벙덤벙 소개하자니 실상 남들과 별 다를 것이 없고, 상세하게 말하자니 낯 뜨거워지는 나는, 보통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아무나 쉽게 누릴 수 없는 평범한 일과를 누리던 30대 초반의 직장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만 7년가량 꼬박꼬박 통장에 급여를 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근로계약뿐만 아니라 주택담보대출, 혼인신고 등 각종 서류에 서명을 하는 방식으로 차곡차곡 사회가 원하는 어른이 되어가는 그런 사람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난 운이 참 좋았다. 헬조선이라는 탐탁지 않은 별명이 붙었지만 OECD에도 가입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입에 풀칠하기를 걱정하며 살지는 않았다. 고등교육을 받고 중위 연봉을 받으며, 애써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서울에서 편도 한 시간 걸어 출퇴근하는 엄청난 재수와 심폐지구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복원된 하천을 따라 수백 번 출퇴근하면서도 내에 찾아드는 오리 떼나 어린이집 팻말만 꽂혀있을 뿐, 공공근로하는 어르신들이 주로 가꾸는 천변의 텃밭에 대한 기억거리는 딱히 없다. 별 것 아닐 수 있는 봄에 대한 그리고 여름, 가을, 겨울에 대한 추억. 언제부턴가 손에 잡히지도 말로 표현할 줄도 모르는 그런 모호한 것들이 애타게 간절해졌다.


점심식사 할 때쯤부터 저리기 시작해 공식 근무가 끝날 시각 즈음에는 마우스를 클릭할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나는, 한참 팔을 주물러야 겨우 잠이 드는데 기분 나쁜 저릿함으로 자꾸 잠을 깨는 날이 잦아지면서부터였던가. 먹고 살기가 참 힘들다는데 꼬박꼬박 월급 받는 주제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는데 하고 싶은 일은 잊어버렸다’는 억울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투정부리기엔 뭔지 모르게, 누구에게인지 모르게 미안했다. 모니터 아래 쌓여있는 초콜릿 봉지 개수만큼 쌓여가는 기획서와 보고서, 행사들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정말 그들에게 도움은 된 건가 자문하는 날만큼 자답을 회피하는 날이 늘어갔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시기이건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기엔 지쳐 있던 그 시절, 나는 하루를 온전히 살고 있다는 충만함이 절실했다.


내 삶에 질문을 던지던 중 만난 ‘비전화공방’


이제는 정말 쉬어야겠다, 더 이상 버틸 이유를 부스러기도 찾지 못할 즈음, 우연히 하나의 공고를 보았다. “바라는 삶을 살아내는 과정에 함께 해요.” 바라는 삶이라는 게 도대체 뭐지? 이 애매한 표현에 끌릴 만큼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가?


▶ 비전화제작자 1기 모집 포스터 중에서. 비전화(非電化)는 전기와 화학물질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의 방식을 뜻한다. ⓒ비전화공방 서울


“바라는 삶을 살아내기 위한 힘, 자립에서 시작합니다.

 내 삶에 필요한 기술들을 스스로 만들 수 있을까요?

 지향하는 가치가 실제 내 일상에 녹아있나요?

 생각을 경험하고 구현하며 함께 풀어내는 사람들이 곁에 있나요?“


그럼에도 이 질문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깜빡이는 모니터 속에 파일 소유자로만 살고 있는 내가 볏짚으로 채운 스트로베일하우스와 햇빛달빛 냉장고, 빵이 노릇노릇 돌 가마를 만들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졌다. 언젠가는 한 번쯤 하고 막연하게 꿈꾸던 동경을 현재로 당겨올 수 있다고 착각한 그 순간, 나는 이미 ‘비전화공방 서울’의 1기 비전화(非電化)제작자로 태세가 바뀌었다. 그렇게 바로 지원서를 쓰고, 정말 1년 간 비전화제작자로 살게 되었다.


일상이 바뀌니 표정도 바뀌다


휴직하면 아침에는 뒷산을 오르내리고 오전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오후에는 낮잠 좀 자야지, 하던 꽤나 진지했던 계획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대신 아침에는 체조로 몸을 푼 뒤 컨테이너에서 각도절단기와 테이블톱을 꺼내고, 스무 명이 점심에 먹을 국을 남지 않게 준비하려면 이 솥의 어디까지 물을 부어야 적절할지 고민하며, 오후에는 공사장 헬멧을 쓰고 주머니 가득 못을 채워 비계 위에 올라 망치로 서까래를 박는 날들이 시작되었다.


어느 날은 해 뜨기 전부터 배춧잎 속을 뒤져가며 28점박이무당벌레 애벌레를 잡고, 어떤 날은 부엌 위 태양광 발전기와 연결된 축전지가 방전돼 분쇄기를 사용해야 하는 오늘의 요리를 포기할 것인가 다른 방안을 시급히 찾아볼 것인가 궁량해야 했다.


▶ 즐거운 한 때. ⓒ비전화공방 서울


역시나 운이 좋았다. 대도시에서 비전화(非電化, 전기와 화학물질이 없는) 삶을 실험해보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 운이 좋았다고 말할 도리밖에 없다. 그렇게 1년 뒤, 다시 회갈색의 목련 꽃눈이 부풀어 오르는 시기를 맞았다. 그래서 너는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찾았냐고, 바라는 삶을 살아내는 힘을 얻었냐고 사람들이 묻는다. 이렇게 답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한 그루의 목련을 보았다고. 그 목련 아래에서 도시락을 펼쳐놓고 왁자지껄하게 웃는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서 웃고 있는 나를 보았다고.


그리고 당신의 손을 잡고 그 목련 앞에 데려가 조잘거리려 한다. 내가 보냈던 일상을, 내가 꿈꾸는 삶을.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미투, 타임즈업 운동…‘동일임금’ 요구로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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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타임즈업 운동…‘여성노동’ 이슈로 이어져

타임즈업(Time’s up) 이후 더 큰 변화를 촉구하는 여성들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미투(#MeToo)가 사회 곳곳의 성폭력을 폭로하며,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모여 타임즈업(Time’s up)이라는 재단이 결성된 지 약 4개월이 흘렀다. (관련 기사: 여성들이여, 세상을 바꿀 시간이 되었다! http://ildaro.com/8093)미국 사회는 얼마나 바뀌었을까?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건 사실이 아니다. 변화는 순식간에 ‘딱’하고 일어나는 게 아니니까.


3월 4일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투로 인해 직장 내 성희롱 이슈가 부각된 이후, 남성들이 여성인 동료와 일하기가 어려워졌다’고 말한 비율이 51%나 된다. ‘별로 차이가 없다’고 답한 36%와 ‘더 좋아졌다’고 말한 12%에 비해 높은 비율을 보였다. 한국에서 미투 고발이 이어지자 남성들 사이에 ‘펜스 룰’(Pence Rule; 여성과의 대면을 피하는 것)이 유행한 것처럼, 미국에서도 직장 내 성희롱 문제에 직면하기보다는 ‘예전보다 살기 불편해졌다’며 불평하는 이들이 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장 내 성희롱 이슈 중 현재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중복 응답)으로는 ‘성희롱 가해자가 처벌받지 않는 것’(50%)과, ‘피해자의 말을 믿지 않는 것’(46%)이 꼽혔다. 미국인들 다수가 직장 내 성희롱 가해자가 처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투(#MeToo) 운동을 통해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에 대한 처분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 하비 와인스틴(Harvey Weinstein)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이긴 하지만 성폭력 혐의로 재판을 받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미투(#MeToo) 이전인 2014년, 다수의 피해여성들의 폭로로 성폭행 전력이 알려진 미국 코미디의 대부 빌 코스비(Bill Cosby)의 재판도 아직 진행 중이다. 작년 여름 진행된 재판은 심리무효로 끝났고, 이후 빌 코스비의 변호인단은 피해여성들을 ‘돈을 노린 사기꾼’라고 칭하는 등 피해자를 공격하기 바빴다. 11일 다시 재판이 열렸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미투 이후 크게 바뀐 것은 없는가? 그건 아니다.


광고업계, 언론계, 실리콘밸리에서도 여성들 조직화


3월 12일, 2백여 명의 광고업계 여성들이 “자매들이여, 우리도 안다”로 시작하는 성명서와 함께 ‘타임즈업 애드버타이징’(Time’s Up Advertising)의 발족을 알렸다. 성명에서는 “광고업계 여성인 우리들은, 이곳이 우리가 이끌고 싶은 업계가 되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바꿀 힘이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이어 “우린 당신들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재능을 보고 있습니다. 어떤 불평등이 있는지 보고 있습니다. 우린 모두를 위해서 힘과 목소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라며, 앞서 성평등을 위한 행동에 나섰던 동료들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3월 13일엔 전현직 여성언론인들이 ‘프레스 포워드’(Press Forward)를 만들고 타임즈업과 파트너로 활동하겠다고 알렸다. 이들은 미국 언론, 특히 뉴스업계의 성차별과 성희롱 문제를 해결하고 여성언론인들이 안전한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 여성투자가들이 만든 단체 ‘올 레이즈’(All Raise) 홈페이지


이뿐만 아니다. 4월 3일, 포브스(Forbes)에서 매년 선정하는 최고의 투자가 리스트(Midas List)에서 작년 97위를 차지한 에일린 리(Aileen Lee)는 ‘올 레이즈’(All Raise)의 발족을 알렸다. ‘남초’라 불리는 실리콘밸리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치고 있는 34명의 여성투자가들이 모여 성평등을 위한 비영리단체를 설립한 것이다.


에일린은 발족을 알리는 글에서, 작년 수잔 파울러(Susan Fowler)가 폭로한 우버(Uber)에서 발생한 성추행 사건과 실리콘밸리에서 일어난 성추행을 비롯한 불평등한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아는 여성투자가들에게 이메일을 보낸 사실을 이야기했다.


“제 생각에 우리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 실리콘밸리의 ‘여성 부재’와 젠더 파워가 한 쪽으로 쏠린 현상은 옳지 않아요. 변화를 이끌 창구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 함께 모여서 업계를 좀 더 빠르게 변화시킬 방법을 찾기 위한 브레인스토밍을 하지 않을래요?”


에일린은 메일 발송 후 48시간도 되지 않아 모든 이들에게서 회신을 받았고, 그렇게 첫 모임이 시작되었다고 밝혔다. 몇 번의 만남 이후 여성투자가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고 ‘올 레이즈’가 만들어졌다.


더 많은 여성이 보여지는 사회를 만들자


미투(#MeToo)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여성들의 연대체들은 ‘직장 내 성희롱과 성폭력을 해결하고 피해자를 지원한다’는 목적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이 외치는 것들이 있다. 첫 번째는 ‘여성의 가시화’다. 지금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눈에 보여야 한다는 주장이다.


‘올 레이즈’는 ‘미국 기반의 벤처 투자사의 결정권자 9%만이 여성’이며 ‘2017년 미국 벤처 자금 중 단 15%만이 여성창업자가 있는 팀에게 간 점’을 지적했고, 5년 안에 그 비율을 각각 9%에서 18%로, 15%에서 25%로 늘린다는 구체적 목표를 제시했다. ‘타임즈업 애드버타이징’의 목표 중 하나도 광고업계 내 더 많은 여성인재를 키우고 이끌겠다는 것이다.


▶ 현재 미국 정부와 의회 내 여성의 수. ⓒ2018 Center for American Women and Politics


또한 6일 AP통신 기사에 따르면, 이번 미국 하원 의원에 출마하겠다고 등록한 여성의 수가 309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이 점 또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전까지 최고 기록은 298명으로 2012년의 집계였고, 2014년과 2016년엔 그 숫자에 훨씬 못 미쳤다. (참고로 현재 미국 하원 의원 총 435명 중 여성은 83명으로 19.1% 비율이다.) 많은 여성들이 정치 진입을 하고자 하는 이유를, AP통신은 트럼프 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분석했다. 올해 미국 ‘여성 행진’의 주요 의제 또한 ‘투표를 위한 힘’(Power to the poll)이었다.


▶ ‘우리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여성이다’라는 문구의 ‘여성 행진’ 홍보물 ⓒ2018 Women’s March


성추행 사건이 알려졌음에도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와, 이후 수많은 미투(#MeToo)를 지켜보았던 여성들이 ‘우리들의 메시지를 직접적인 정치 참여로도 보여주고 투표로도 보여주겠다, 또 그래야 한다’며 서로의 참여를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가시화가 중요한가에 대한 답은 분명한다. 여성이 보여지는 것 그 자체로 전달되는 사회적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큰 자금을 움직이는 광고업계에서 여성을 보는 것,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실리콘밸리에서 여성을 보는 것, 국가를 움직이는 정치에서 여성의 모습을 보는 것이 주는 메시지는 ‘여성들이여, 성공하자’는 것만이 아니다. ‘소녀도 야망을 가질 수 있고, 여성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조금 앞서 달리고 있었던 여성들이 ‘이제 혼자 질주하지 않겠다, 함께 달리자’고 선언하는 것이 지금 꾸려진 여성연대체들의 움직임이다.


동일가치 노동엔 동일임금을!


두 번째 요구는 오랫동안 여성들이 외쳐왔던 것이기도 하다. 동일한 가치를 가지는 노동에는 동일한 임금을 달라는 것.


타임즈업을 설립한 멤버들의 다수를 차지하는 할리우드 여성 배우들은 공식 석상에서 전에도 몇 번이나 이 주제를 대중들에게 전하기도 했다.


2015년 패트리샤 아퀘트(Patricia Arquette)는 아카데미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소감으로 “우린 이제 동등한 임금을 받을 때가 되었어요. 미국 여성들에게 동일한 권리가 주어지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소니 픽쳐스의 이메일이 해킹당한 사건으로 인해 제니퍼 로렌스(Jennifer Lawrence)가 같은 영화에 출연한 남성 배우보다 낮은 임금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을 때, 제니퍼 로렌스는 적극적으로 불만을 표현했다.


“소니가 해킹 당한 일로, 남성 성기 달린 행운아들이 저보다 얼마큼 더 받는지 알게 되었을 때 전 소니에 화가 나지 않았어요. 제 자신에게 화가 났어요. 제가 협상에서 일찍 포기해버렸다는 점에 대해서 말이죠.” (제니퍼 로렌스가 쓴 에세이 중에서)


그렇게 불만을 토로하며 변화를 촉구하던 여성들이 이제 조금 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작년 12월, 미국의 E! 네트워크(E! Network) 앵커였던 캣 새들러(Catt Sadler)는 자신이 남성 앵커 연봉의 반 정도밖에 받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회사를 그만 뒀다. 그리고 퇴사 이유가 불평등한 임금 때문이라는 걸 명확하게 밝혔다.


동료들도 적극적으로 그의 행동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지난 골든 글로브 시상식 레드 카펫 행사에서, 배우들은 E! 네트워크 리포터와의 인터뷰를 진행하며 “전 E! 네트워크가 여성 앵커에게 남성 앵커들이 받는 만큼의 임금을 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정말 충격 받았어요”라고 비판했고, “캣이 그립다, 그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근 미국 케이블방송국 HBO는 타임즈업 창단 멤버이자 해당 방송국에서 방송 중인 <빅 리틀 라이즈>(Big Little Lies)의 제작자 겸 배우인 리즈 위더스푼(Reese Witherspoon)의 적극적인 노력과 의견 개진을 수용하여, 현재 제작 중인 프로그램들의 임금 현황을 조사하고 불평등 유무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임금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적극적으로 움직이겠다는 계획을 THR과의 인터뷰에서 제시했다.


여성들의 이런 목소리와 행동의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애플, 인텔, 어도비, 스타벅스 같은 대기업들도 임금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도비의 경우 이미 2016년에 남성이 1달러를 받을 때 여성이 0.99달러를 받는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그 차이마저 2017년엔 없앴다.


하나가 아닌 ‘다양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자


미투(#MeToo)와 함께 변화를 위한 목소리 세 번째는 ‘다양성’이다. 여성의 가시화,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특정한 여성 집단만 고려하고 있지 않다. 미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되었던 ‘백인 페미니즘’에 머물지 않으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타임즈 업 애드버타이징’은 변화에 대한 의무를 느끼는 책임감 있는 여성들이 모인 곳이다. 그리고 이건 백인여성만을 위한 게 아니다. 유색인종 여성과 남성, LGBTQ의 재능을 위한 것이다.” -창립 멤버 하이드 가드너(Heide Gardner)의 AD위크 인터뷰 중에서


▶ 여성 행진에서 만든 홍보물로, 흑인 13명 중 1명이 범죄자로 판결 받아 투표를 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2018 Women’s March


올해 ‘여성 행진’에서 투표의 중요성을 말할 때도 ‘여성들이여 투표하라, 여성의 권리를 신경 쓰는 후보를 선택하자’고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투표를 할 수 없는 이주민, 투표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왜 그들이 범죄자가 되었는지, 유독 흑인의 비율이 높은 환경에 대한 논의를 포함)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 동일한 임금을 받게 되면 여성들이 그 임금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표. ⓒ2018 ultraviolet


동일임금 이슈도 마찬가지다. ‘여성’이 얼마나 불평등한 임금을 받는지 이야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종별로 그 차이가 어떠한지 알리며 유색인종 여성들이 겪는 불평등을 더 많은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도록 알리고 있다.


여기에도 행동으로 변화를 이끌어 낸 사례가 있다. 아카데미 수상 경력이 있는 흑인여성 배우인 옥타비아 스펜서(Octavia Spencer)는 올해 초, 타임즈업 멤버이자 백인여성 배우인 제시카 차스테인(Jessica Chastain)의 도움으로 원래 받기로 한 임금의 5배로 계약한 사실을 밝혔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하는 영화가 있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옥타비아는 흑인여성 배우가 어느 정도의 임금을 받는지 말했고, 제시카는 그렇게 불평등한지 몰랐다면서 “이번 영화에서는 당신도 나와 같은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얘기했다는 것. 그리고 둘은 같이 임금 협상에 들어갔다.


▶ 옥타비아 스펜서가 제시카 차스테인의 도움으로 임금 협상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트윗. (출처: 옥타비아 스펜서의 트위터)


이 일로 대중들은 여성과 남성 간에만 임금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백인여성과 흑인여성 간에도 큰 간극이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더 중요한 건, 그러한 차별은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강철문이 아니라 함께 두드리면 평등을 향한 문을 열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예민한 여자들’이 만들어낼 변화를 기대하라


우리 사회에서도 미투는 계속되고 있다. ‘이제 여성직원과는 회식도 못 하겠다’, ‘성희롱으로 받아들이니까 무슨 말을 못 하겠다’, ‘같이 일하기 불편하다’는 말들이 심심찮게 들린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구속영장은 두 번이나 기각되었다. 기업들이 관행적으로 지속해 온 불평등한 채용 과정이 알려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변화는 분명 일어나고 있다. 그저 어린 존재로만 여겨지던 고등학생들도 이제 성폭력과 불평등에 대해 저항하는 사회적 목소리를 낸다. 느리지만 치열하게, 그리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화가 목격되고 있다.


미투(#MeToo)는 계속되어야 한다. 여성들에겐 아직 전달해야 하는 목소리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성폭력을 끝내기 위해서는 성차별과 불평등에 대해 더 많은 문제 제기가 나와야 한다. 여성들을 가시화하기 위해 정치 할당제,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한국에도 그냥 ‘여성’만 있는 게 아니다. 이주여성, 탈북여성, 성소수자 여성, 장애여성,십대여성 등 같지만 또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도 듣고 말해야 한다.


여성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괜한 일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그걸 폭로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변화를 기대하시라.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잔근육 기르기

페미니스트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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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처음 접하게 된 신입생들에게 길잡이를…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 기획단을 만나다(상)



벚꽃 날리는 봄날의 대학은 새로운 얼굴들로 북적거린다. 매년 반복되는 풍경이지만 미투(#MeToo) 운동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 페미니즘 열기가 뜨거운 2018년, 이 시기에 대학 생활을 시작한 신입생들에게 대학이라는 공간은 조금 특별할지 모른다. 특히 페미니스트 신입생이라면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는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가 3월 31일, 4월 1일 양일간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열렸다.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강의와 ‘모두를 위한 월경권 워크샵’ 등 프로그램을 담은 캠프를 준비한 건 연세대, 동국대, 서울대, 성균관대, 한양대 총여학생회 및 여성주의 학회와 소모임들로 이루어진 기획단이다.


▶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 <페미니스트가 떴다!> 포스터. (캠프 기획단 &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 주최)


과연 어떤 페미니스트들이 신입생 페미니스트들을 위해 이런 행사를 준비했을까,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대학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걸까 궁금해졌다. 지난 16일 홍대 근처 한 카페에서 이번 캠프 기획단으로 활동한 연세대학교 총여학생회 이수빈씨, 동국대학교 총여학생회 윤원정씨, 성균관대학교 여성주의 소모임 ‘나은’의 퍼포린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는 어떻게, 왜 기획하게 되었나요?


이수빈(연세대 총여학생회):“처음엔 우리 학교 총여학생회 정책으로 시작을 했어요. 기획 단계에서 논의를 하다가 ‘이제는 대학끼리 연대도 조금 더 활발해졌으면 좋겠다, 그런 연대가 신입생으로 대학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이뤄지면 더 의미있을 것 같다’는 의견들이 나오게 됐어요. 공동기획단을 모으려고 단톡방(수도권 대학 총여학생회, 페미니스트 동아리, 소모임 활동가가 모여 있음)에 제안서를 올렸는데, 다들 참여하겠다고 응해주었어요.”


퍼포린(성균관대 여성주의 소모임 ‘나은’):“제안서를 받았을 때가 1월쯤이었는데, 사실 그 때 제가 주변에 농담처럼 ‘2018년 목표는 탈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다닐 때였어요. 취준생이어서 이제 취업 준비해야 하니까, 그런 투정을 부리고 다니는 시점이었죠. 제안서 처음 봤을 땐 ‘난 안 해야지’ 생각했는데 친구가 자기가 다 할 테니 같이 하자고 해서 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또 재미있더라구요.(웃음)”


윤원정(동국대 총여학생회): “우리 총여학생회도 연세대랑 비슷한 걸 논의하고 있었어요. 신입생들 상대로 학기 초부터 ‘무언가를 빵’하고 보여주면 학내 분위기가 잡힐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이 있었거든요. 캠프가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건, 신입생들이 ‘내가 혼자가 아니고 나 같은 사람들,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확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외부에서 ‘너 페미니즘 그런 거 해?’ 이런 질문 많이 받을 텐데 겁낼 필요 없다는 걸 이야기해 주고 싶었어요.”


이수빈: “맞아요. 그런 임파워링이 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라는 프로그램을 넣은 거고요.” 


▶ <페미니스트가 떴다!> 캠프에서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이정주 크리에이티브 다양성 센터 대표 강의 중.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


-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를 알려주는 강의를 주요하게 프로그램에 넣은 이유를 설명해주세요.


이수빈: “사실 저 스스로 ‘우리(페미니스트)에게 역사가 있나?’ 그런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그냥 삽질이 아닐까?’ 창세기 쓴다고 표현할 정도로요.(웃음) (페미니즘 운동) 역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새로웠고 신기했고 그렇기 때문에 또 약간 거리감 느껴지기도 했어요. 그래서 캠프에서 우리에게 역사가 없는 게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윤원정: “여성의 역사는 늘 지워졌잖아요. 그래서 페미니즘을 접하면, 마치 내가 이 고민을 처음 하는 사람 같고, 또 뭔가를 해도 다음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0’에서 다시 시작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그 역사를 알기 힘들고, 그래서 지식적인 측면에서도 임파워링 측면에서도 운동의 역사를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재미있을 것 같았고요.”


이수빈: “근데 사실 고민을 많이 했어요. 우리는 역사를 알아가는 게 재미있을 것 같은데(동의하며 다 같이 웃음), ‘우리에겐 너무 필요한데 신입생 참가자도 그렇게 느낄까?’ 라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윤원정: “그래서 강사님이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강사 초빙에 중요한 조건이었어요.(웃음)”


-페미니즘 운동에서는 영페미(1990년대 중후반), 영영페미(현재)라는 용어가 자주 사용되고 있는데요, 세대 간에 단절을 많이 느끼나요?


윤원정: “최근에 느꼈어요. 인터넷 상에서 정제되지 않은 정보를 주로 접하는 분들, 저는 어쩌면 그 분들이 ‘영영페미’를 대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도 SNS 상에서 기혼여성 관련된 비난이랄까 비판이 일었는데, 그런 논란들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지난 페미니즘 운동 역사를 알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이수빈: “가끔 오랫동안 페미니즘 활동이나 연구를 한 선생님들을 만나면, 우릴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우리가 뭐 특별한 게 있나 싶은데도 계속 궁금해하는 거예요.(웃음) 그분들은 SNS 상에서 빠르게 진행되는 담론들을 듣고 싶어하시는데, 트위터나 페북 그런 걸 직접 하기는 어려우실 수 있잖아요. 그래서 소통이 쉽지 않지만, 서로를 비슷하게 궁금해 하는구나 싶어요. 저의 경우에는, 총여학생회가 그래도 공식 기구니까 (윗 세대와) 다양한 접촉이 있는 편이에요. 그런데 이런 기구가 없는 학교도 많고, 그런 게 없으면 누군가와 연결되기 어렵죠. 저도 소모임 할 땐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2,3 학번 위인 선배 정도였어요.


무엇보다 최근 몇 년 간은 페미니즘 이슈가 워낙 많았고, 그때 그때 나오는 이슈에 대응하기 바빠서 당장의 일 처리가 우선이었어요. 2015년 이후의 소위 영영페미니스트들에겐 기존에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지금 당장이 너무 급했으니까요. 지금 당장의 내 문제에 분노하고 그걸 해결하느라,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나?’ 그런 걸 찾아볼 여유가 없었던 거죠. 결과적으로는 단절이 생기거나 느껴질 수밖에 없지 않았나 싶어요.”


퍼포린:“전 세대 간 단절보다 페미니스트들 간의 단절을 느끼고 있어요. 윗세대와 특별히 단절된 게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도 다른 점이 많은 것 같아요. 특히 그걸 제가 많이 느끼는데요, 우리 학교는 수원에 있거든요. 다른 학교 친구들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랑 분위기가 다르더라고요. 예를 들어, 소모임에서 대자보를 붙이면 ‘여성주의래, 그걸 뭐 하려고 읽고 있어, 그냥 찢어버려!’ 이러는데요. 숙명여대 경우에는 퀴어 관련 대자보가 붙으면 일종의 ‘안티 퀴어’ 내용의 반박 대자보가 붙는다고 하더라고요. 그냥 찢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래도 반박을 한다는 얘길 듣고, 대학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우린 전업 활동가가 아니니까. 먹고 살 거, 학점, 이런 거 다 챙겨야 하는데… 그래서 멀리까지 외부 모임에 나가서 참여하고 소통하는 게 힘든 거죠. 학업 병행으로 인한 시간 부족도 있고.”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 <페미니스트가 떴다!> 현장.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


-일각에선 요즘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에 관심은 가지지만 활동은 안 하려고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이수빈: “제가 그 이야기 많이 하거든요. 친구들이 계속 페미니즘 활동 할 거냐고 물어보면 ‘돈 주면 하지’ 말해요. 친구들은 ‘돈 주면 활동가를 한다고? 그거 말도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하죠. 하지만 돈 걱정 안하면서 살 순 없잖아요. 저는 캠프 준비하면서도 사실 돈 걱정이 제일 컸어요. 총여학생회 활동하면서도 예산 확보하러 다니는 게 일이에요. ‘돈 주세요’ 하면서.(웃음) 개인적으로는 총여학생회 활동이 페미니스트로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축복이라고 생각해요.”


퍼포린: “총여학생회가 없는 학교도 많아요. 우리 학교도 2013년에 학생 투표로 총여를 없애는 걸로 결정이 났거든요. 활동을 할 수도 없는 거죠.”


윤원정:“그런데 누군가는 그 역할을 또 해오고 있어요. 얼마 전에 대학 대담회 자리에 갔을 때 ‘성대문과대여성위원회’ 분이 오셨는데 거의 총여학생회 일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총여가 하는 일들이 여전히 꼭 필요한 일이고, 그래서 누군가가 그 일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권한은 없는 거죠.”


퍼포린: “사실 우린 어릴 때부터 ‘입신양명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고 자랐잖아요. 그냥 학교에서 시키는 거 열심히 하고 공부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교육이요. 전 취업이 잘 된다고 하는 학과에 다니는데, 취업률이 높다고 하는 만큼 공부도 많이 시켜요. 그래서 실질적으로 시간이 없죠. 학과 공부하면 ‘보통’ 사람들이 가는 길인 안정적인 직장과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데, 그걸 포기하고 나의 신념을 따를 수 있을까? 전 그렇게 하기 힘들 것 같아요.”


윤원정: “활동가라는 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업으로 삼을 수 있는 직업인지 모르겠어요. 전 사실 학점 관리도 안 하고 있어서 좋은 곳에 취업하긴 글렀거든요.(웃음) 그렇지만 저의 행복을 위해서 일정 정도의 자원은 있어야 하잖아요. 그것만 충족되면 되는데, 하지만 과연 활동가를 했을 때 그걸 맞출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어요.”


대학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것과, 활동가가 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도 듣게 되었다. “나서는 게 미덕인 아닌 세상”을 살다 보니 “나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활동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는 거였다.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서 다시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나대면 정말 죽이려고 드니까요.”


“누가 집에 쫓아오거나 뒤통수를 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요. 한동안은 그게 너무 무서웠는데 이제 포기했어요. 제가 죽으면 광화문에서 집회 해 주겠지(웃음), 그런 생각이에요.”


담배를 핀다고 욕을 먹기도 하고, 학교 주변에서 페미니즘 소모임 이야기를 꺼냈다거나 대자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어딘가에 인상착의가 서술된 글이 올라오거나, 사진이 찍혀서 대학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얼평(외모 지적) 당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닌 되어버린 그들.


“그래서 (페미니즘 캠프로) 신입생의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웃음)”


때론 학교에 가는 것이 무섭고, 솔직히 비난과 공격을 받으면 상처받기 때문에 스스로의 정신건강이 걱정된다고 하면서도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을 위해 캠프를 기획한 이들이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로워졌다. 다음 기사에서 이번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 후일담과, 현재 뜨거운 감자인 미투(#Metoo)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편에 이어집니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대학 페미니즘의 내일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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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페미니즘, 우리에게도 역사가 있다!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 기획단을 만나다(하)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사회와 다른 특성이 있는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페미니스트로 사는 이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 기획단으로 활동한 이수빈(연세대 총여), 윤원정(동국대 총여), 퍼포린(성균관대 여성주의 소모임 ‘나은’) 세 사람에게 학내 페미니즘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았다.


-에타(에브리타임이라는 시간표 앱. 대학 별 커뮤니티 익명게시판이 활성화되어 있어서 많은 대학생들이 이용함)에서 여성혐오 분위기가 만연하다는 얘길 많이 들었는데요. 요즘 대학 분위기는 어떤가요, 긍정적인 변화를 느끼나요?


이수빈(연세대 총여학생회):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있었어요. 1년 내내 집회하러 다녔던 기억이 나요. 그 일 이후로 학교 내 페미니즘 소모임이나 학회도 많이 생겼어요. 총여학생회 인원도 그 때는 5~6명이었는데 지금은 20명 정도거든요. 그런 변화들이 와 닿긴 해요. 페미니즘과 그 가치를 말하는 사람은 항상 있었지만,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조금 더 늘어난 것 같아요. 제가 총여 안에 있어서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만, 우리에게 집행력이 생긴 것 같아요. 저의 임무는 이걸 다음 학번에게 잘 전달하는 거라고 생각하고요.”


윤원정(동국대 총여학생회):“전체적인 여론을 분석하긴 힘들지만, 확실히 페미니즘이라는 주제 자체가 빼놓을 수 없는 주제가 된 것 같긴 해요. 2014년 이후 2년 동안 총여학생회가 없었다가 2017년에 다시 생기게 된 것도 그렇고요. 물론 페미니즘이 학생회에서 의제로 채택되진 못했지만요.”


퍼포린(성균관대 여성주의 소모임 ‘나은’): “저도 페미니즘 공동체에서 활동하다 보니 감각이 대중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조금씩 변화는 있는 것 같아요. 제가 1학년 때도 여성주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땐 다들 그 모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완전히 무관심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학내에 다른 소모임이나 사회운동 관련된 곳은 사람이 안 들어오는데, 페미니즘 모임만 사람이 엄청 많아요. 그리고 우리가 욕을 먹고 있다는 것도, 그만큼 관심이 늘어났다는 거죠.”


윤원정: “2014년 총여 집행부는 무관심과 싸웠는데, 지금은 공격과 싸운다, 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퍼포린: “이제 총학생회 선거운동에서도 성평등 정책이 나오긴 하더라구요. 그 정책들이 아직은 별 것 아닌 수준이긴 하지만, 성평등이 논의가 되긴 한다는 거죠.”


이수빈: “우리가 제시하는 정책이나 논의를 학교에서도 이해 못하는 경우들이 많아요. 설명을 계속 해줘야 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 논의 수준이 점점 낮아지기도 하고요. 그런 걸 겪다보면 분위기가 좀 양극화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요.”


▶강간을 예방하는 7가지 방법 대자보 (출처: 성균관대학교 페미니즘 소모임 ‘나은’)


퍼포린: “학교에서 우리 소모임이 유명해 진 사건이 있는데요. ‘강간을 예방하는 방법’이라는 대자보 덕분이거든요. 엄청 많은 공격을 받았어요. 뭐랄까, 이 주제로 강 하나를 두고 극명하게 나뉜 거죠. 한 쪽에는 이 대자보 자체에 화내는 사람들이 있고, 그 건너편에는 왜 화를 내는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제 친구는 ‘그리고 그 강 위에는 표류하는 진보 마초들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어요.(다같이 웃음)”


-대학 내 미투(#MeToo)도 요즘 이슈인데, 할 일도 많고 고민도 많을 것 같아요.


퍼포린: “가끔 문의 들어오는 게 있는데 사실 우린 그냥 소모임이고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학교 내에 공론장도 없고요.”


윤원정: “얼마 전에 대학 내 미투 관련 대담회가 있었어요. 학생운동으로서 권력과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페미니즘 과제로 어떻게 끌고 나갈 것인지 등이 논의되었는데요. 참가자들 사이에 서로 다른 지점들을 많이 확인했어요. 아직 해야 하는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수빈: “최근에 언론사들로부터 연세대 총여는 미투 관련해서 뭐 안 하냐 이런 문의를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사실 우리는 계속 하고 있었고, 29대째 해오고 있는데 말이죠. 전 미투 운동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운동으로 발현시켜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죠. 그리고 사건 공론화를 위해서 총여를 찾아오는 성폭력 피해자들과 어떻게 사건을 논의하고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많아요.”


윤원정: “성폭력을 공론화하는 방법이 공동체적 해결을 하는 데에 있어서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또 피해자의 조력자/지지자 역할에서 사건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그러면서 미투 운동을 어떻게 지속시킬지에 대해서도요.”


이수빈: “학교 내에 성평등 상담센터에 상담사 선생님이 두 명 있는데 요즘 엄청 바쁘시거든요. 학교에 인력을 충원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충원도 안 되고. 그래서 센터에 사건 접수를 했다가 진행이 느리니까 총여로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전문가가 아니니까 할 수 없는 부분도 있죠. 사건 해결이 잘 안 되는 경우 비판을 받게되기도 하고요.”


윤원정: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려다가 실수가 있다든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결국 총여학생회 존폐 논란이 일어날 거라는 예상이 되니까, 그런 부분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있어요.”


▶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 <페미니스트가 떴다!> 참가자들.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


-다들 바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열심히 준비해서 페미니즘 캠프를 진행한 거네요. 캠프 이야기를 해볼까요, 참가자들 반응은 어땠나요?


이수빈: “행사 총괄을 하다 보니 참가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진 않았어요. 그게 좀 아쉽긴 해요. 그런데 확실히 느낀 건 ‘이 사람들에게 대화할 곳이 정말 너무 필요했구나’라는 점이었어요. 밥 먹을 시간이라고 안내를 해야 하는데, 그걸 주저하게 만들 정도로 너무 열심히 대화를 계속하는 거예요. 전 뒤에서 식권 들고 ‘빨리 밥 먹으러 가야 되는데.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이러면서 떨고 있고(웃음).”


퍼포린: “전 기획단이면서 참가자의 일원으로 참여했어요. 하나 기억에 남는 게, 우리 소모임 이름이 ‘나은’인데요. 학교나 학교 주변에서 그 단어를 이야기하면 또 내 인상착의 올라가고 사진 찍힐까봐 가칭으로 부르거든요. 근데 캠프에서 무의식중에 그 이름을 쓰고 있는 거예요. 여기서는 ‘나은’이라고 말해도 된다는 게, 저한테는 좀 신선한 경험이었어요.”


윤원정:  “기획했던 것보다 인원이 적었지만, 딱 적절했던 것 같아요. 강연도 예상보다 너무 좋았고, 준비한 게 잘 진행되었어요. 참가한 분들과 저의 다른 부분들을 알게 되는 자리이기도 했어요. 페미니즘 활동한지 오래 되진 않았지만 여튼 전 지금 학내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고, 이제 막 학교에 들어온 사람과의 차이를 느꼈죠. 공학 다니는 저와 여대 다니는 사람과의 차이도 느꼈어요. 확실히 우리가 각자 서 있는 지형이 많이 다르다는 걸 확인하는 자리였어요. 그래서 후속 모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제 차이를 확인했으니 교집합을 찾아가야겠죠.”


-참가자들 사이에서 느낀 차이는 어떤 것들인가요?


윤원정: “시작하는 지점이 다른 거 같아요. 여대에서는 대체적으로 여성학 강의가 잘 진행되고 있는데, 우리 학교는 여성학 강의가 뭔지 몰라요. 아니, 여성학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작년에 학교 측에 여성학 강의가 하나도 없으니까 신설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여성학 강의가 있다는 거예요. 뭐냐고 물었더니 취준생 대상의 여성 리더쉽, 그런 수업이랑 대학생들을 위한 예비부모 교육, 그걸 여성학 수업이라고 알려주더라고요. 그뿐 아니라 어떤 똑같은 일이 발생해도 여성의 경험에 대한 공감대를 보면 여대가 100이라고 했을 때, 공학은 50 정도인 것 같아요.


신입생들과 느낀 차이는, 전 소속된 단체가 있고 페미 캠프 기획단으로 참여했잖아요. 그 자리가 사적인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막 내키는대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어요. 그러니까 ‘한남’이라든가 그런 단어를 쓰기도 좀 조심스럽고. 그런데 신입생 참가자 분들은 그런 이야기를 가감 없이 하더라고요.(웃음)”


퍼포린: “저 ‘남리남리’(여리여리하다는 말을 남성에 빗대어 쓰는 신조어)라는 말 처음 들었어요.(웃음) 그리고 강의 끝나고 질문 시간에도 다들 질문하려고 손 들고 그래서 조금 놀랐어요.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또 기분 좋은 경험이기도 했죠.”


▶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를 준비한 기획단의 단체명. 내년에는 더 많은 참여가 있기를. (2018 신입생 페미니즘 캠프 페이스북)


-페미니즘 캠프 후속 모임 이야기도 잠시 나왔었는데,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나요?


이수빈: “우리 총여가 일단 일을 벌였기 때문에(웃음) 후속 행사까지는 해 보려고 해요. 대학 내 페미니스트 연대체 단톡방이 작년인가 재작년에 생겼는데, 주로 공지/홍보용으로 쓰이고 있거든요. 전 이왕 이렇게 뭉쳤으니 이런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싶고, 같이 무언가를 해 보고 싶어요. 우리 학교 문제는 곧 다른 학교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큰 연대체가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캠프 이름에도 1회라는 걸 넣고 싶었어요. 1회라고 해 놓으면 내년에 또 누군가 할 생각을 하지 않을까? 맨땅에 헤딩이 아니라, 이어서 하는 거죠. 계속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알게 된 사람끼리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고요.”


퍼포린: “캠프에서 학교별 페미니즘 소모임, 학회, 동아리 등을 소개하기도 했었거든요. 어떤 참가자 분이 자기 학교엔 없는 것 같다고 해서, 같이 열심히 검색해 하나 찾아내기도 했어요.(웃음) 꼭 우리 모임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각자 페미니즘 모임을 찾는 것도 일종의 후속 모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이번 캠프 참가자들과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퍼포린: “기성세대라고 불리는 분들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가는 길이 아예 새로운 길이 아니라 닦인 길이니까, 가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수빈: “사회가 페미니스트에게 어떤 낙인들을 찍어왔고, 페미니스트들이 그에 지지 않고 어떤 운동을 해왔는지, 그런 역사가 있으니까 두려워 할 것 없다는 걸 참가자들이 느꼈다면 기쁠 것 같아요.”


윤원정:  “어디에 질문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그게 명확해지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새롭게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 분들에게도 캠프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길잡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페이스펙’ 순위에서 밀려나는 ‘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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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펙’ 순위에서 밀려나는 ‘몸’들

[성소수자, 나도 취준生이다]② 외모도 스펙인 사회


성소수자 청년들의 취업과 노동을 이야기하려 한다. 소위 ‘일반’ 청년들의 노동에 있어 접점과 간극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모두 헬조선이라 불리는 사회를 살아가는 20~30대지만, ‘청년’이라는 이름으로만 묶일 수는 없다. 취업 키워드를 통해 성소수자들과 비성소수자들의 삶을 살폈다. 그렇게 찾아낸 공통분모들이 우리 시대의 청년노동에 대해 말해줄 것이라 믿는다. [기록노동자 희정]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성형 부추기는 블라인드 면접


“나이 40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그 연령대가 더 낮아졌다. 면접장에 서면 깨닫게 된다.


“치아 교정도 안 하고 뭐 했습니까?” 면접관의 질타. 당장이라도 평가서에 ‘자기 관리 부족’이라 쓸 기세다. “살 빼고 다시 면접 볼 생각 없습니까?” 이 말은 면접자에게 굶음이라는 절제와 러닝머신 위에서의 끈기를 떠올리게 한다.


▲ 외모가 스펙인 사회 ⓒ일러스트레이터 정은


얼굴(몸)은 자기 관리의 문제가 됐다. 책임져야 한다. 학벌, 성적, 기타 스펙을 지워 공정하게 선별하겠다던 ‘블라인드 면접’은 우습게도 외모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공채 시기만 되면 블라인드 면접을 빌미로 성형광고가 쏟아져 나온다. ‘표정성형’마저 있다.


외모는 이제 스펙이 됐다. 신조어도 나왔다. 페이스펙. 성형과 다이어트가 필수 9종 스펙에 입성한 것이 벌써 몇 해 전이다. 새로울 것도 없다. 예쁘지 않으면? 취업의 기회가 줄어든다. 자격증을 덜 따고, 학점이 좋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외모 지적과 성별


수차례 면접 이야기를 들은 터라 나도 기대하는 바가 생겼다. 외모 평가는 면접에서 필수 요소인가 싶었다. 그래서 트랜스젠더인 나이스에게 면접에 관해 물을 때 약간 기대를 했다. 겉으로 보기에 나이스는 그저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였다. 성전환 호르몬 투여를 중단했다. 생활비를 버는 것이 더 급한 문제였다. 사장들도 남자로 알고 뽑았다. 그래도 가는 몸과 ‘남자치고’ 다소 긴 샤기컷 머리가 사장님들을 언짢게 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스의 이야기는 예상과 달랐다. 피어싱 지적 정도가 끝이었다. 사회가 남자 외모에게 더 관대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런데 성별 전환이 주는 외모 혼란에서도, 남성으로 성별 표현이 될 경우에는 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했다.


“요즘 남자애들은 계집애 같이 꾸민단 말이야.” 이런 대화를 나눌 법한 사장님들은 대세가 된 ‘예쁜’ 남자를 인정한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 수두룩하다. ‘여자보다 더 예쁜 남자’인 아이돌 스타가 무대를 뛰어다닌다. 그러나 ‘남자보다 잘생긴 여자’는 낯설다. 브라운관도 이들을 담지 않는다.(걸그룹 f(x) 엠버에 쏟아진 비난을 떠올려보라. 내용은 너무나 한결같다. “남자냐?”)


어떤 트랜스젠더는 살기 편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살기 편한 트랜스젠더는 없다. 어차피 남녀 유별한 세상에서 “좁디좁은 패싱(passing, 어떤 사람을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여기게끔 외양과 행동을 위장하는 것)의 기준을 만족시켜도 바깥 사회에서 듣는 찬사는 기껏해야 멋진 여자, 예쁜 남자다.”(트랜스젠더의 이해, 이드, 2016 제8회 LGBTI인권포럼) 그것도 ‘멋지고 예쁠’ 때 이야기다.


그런 측면에서 트랜스젠더인 나이스보다 레즈비언 미리가 직장에서 듣는 외모 지적이 더 많다. 통념상 ‘귀여운’ 얼굴의 미리가 받는 지적보다 ‘안 꾸미는’ 비성소수자 여성이 듣는 외모평가가 더 가혹할 때도 있다.


그리고 트랜스젠더 남성 지민이 있다. 일터에서는 ‘여직원’이다. 외모 지적을 받나요? 묻자 지민은 크게 끄덕였다. “입사 초반에는 거의 필수 질문이에요.” 사람들이 보기에 지민은 ‘보이쉬’하다. 짧은 머리를 하고 바지만 입는다. 날씬하지도 않고 화장도 안 한다. 면접관들이 ‘자기 관리 부족’이라 평가하고 싶어 근질근질할 상이다. “왜 치마 안 입니?” 사람들은 묻는다. 그러나 지민이 체대 입시생이었다는 걸 밝히고 나면 다소 자유로워진다.


운동하는 여자는 이 사회에서 ‘보편’이라 부르는 여성과는 다르게 취급된다. 여성에게 주어질 수 없다고 믿는 힘과 운동신경을 가진 ‘체육소녀’들은 전형적인 ‘여성’에서 벗어남을 허락받는다. 논쟁의 중심에 선 정수기 물통마저, 지민이 들면 사람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고 참견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진 건 아니다. 다른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연애는 안 해? 그래도 연애는 해야지.”


여자는…, 남자처럼…


▲ ‘여자는 자고로’, ‘남자는 남자답게’ 적합한 용모가 있다고 한다. ⓒ일러스트레이터 정은


여자는 치마도 입고, 꾸미고, 연애도 해야 한다. 그 ‘여자’의 실체는, 안경에 대한 용모규정에서 잘 드러난다. 극장 알바부터 은행 직원까지 다양한 서비스직에서 안경 쓴 여자에 대한 규제가 있다. 남성의 안경에는 관대하다. 여자직원에게는 안경 외에도 립스틱, 피부톤, 스타킹색 등 외모 통제가 끊이지 않는다.


명확한 이유도 없다.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진행하는 내부 가이드 라인이란다. “여자가 더 화려하게 보여야 하기에”라며 얼버무린다. 그러나 브라운관 너머 안경 쓴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면 답이 나온다. 전문직 남성과 못생긴 여자. 지적 능력은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적 특성이 아니다.


반면, 남자인 현진은 대학시절 알바부터 정규채용까지 번번이 탈락해 왔다. 강사나 관리직 자리는 현진을 특히나 반기지 않았다. ‘인서울’ 대졸자에 신체 건강한 비성소수자 남성이다. 그러나 키가 작고 왜소하다. 그의 몸은 사회적 남성과 맞지 않았다. ‘책임감 있고 강하고 리더십 있다’는 남성의 이미지는 단단한 골격과 근육으로 기대된다. 그래서 왜소한 체격의 현진에게 일을 주지 않는다. 특히 (남자처럼) 가르치고 (남자처럼) 지시하는 역할을 맡기지 않는다.


‘여자는’, ‘남자처럼’ 각자에게 적합한 용모가 있다고 했다. 그 용모를 관리하고 노력하여 면접장에 가져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면접장에 들어설 수 없는 용모가 존재한다.


마늘의 용모단정


마늘은 용모단정하다. 화장을 하고 긴 머리를 하나로 깔끔하게 묶는다. 중요한 날이라면 정장 치마도 입어줄 마음이 있다. 그러나 마늘의 꾸밈은 ‘용모단정’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주민등록번호가 ‘1’로 시작하는 마늘에게는 다른 ‘관리’가 요구된다.


트랜스젠더, 젠더퀴어(여성과 남성으로 나누는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성정체성) 등으로 명명되는 이들은 태어날 때 사회가(정확히는 의사가) 지정한 성별로 살 수 없다. ‘여자니까’ ‘남자답게’로 살지 않는다. 이들을 본 면접관은 당혹해 한다. 그리고는 끝. 탈락이다.


‘탈락’을 면해보겠다고 마늘은 미용실 의자에 앉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계속 길러온 머리다. 평소에는 치마를 입고 화장을 했다.(마늘은 이 행위를 ‘여성이 된다’고 하지 않고, ‘사회가 권하는 여성의 모습을 연기한다’고 했다.) 그 모습으로는 면접에 통과할 가능성이 없다. 어쨌건 서류상 남자였다. 미용실에 갔다. 머리를 자르려 했다.


그러나 자르지 못했다. “머리를 오랫동안 기른 상태라서, 제 외형이나 스타일이 정체성의 일부로 자리 잡았단 생각이 들거든요.” 그깟 머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시간만큼 머리도 같이 길었다. 헤어디자이너는 단발을 권했다. “그게 손님에게 더 어울려요.”


마늘이 구하고자 한 것은 뭐 그리 잘난 기업 정직원 자리도 아니었다. 급작스러운 독립-아마 원인은 성 정체성에 따른 부모와의 불화로 추측되는-으로 인해 일자리가 필요했다. 카페, 음식점 서빙 같은 아르바이트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이 그저 주어지는 법은 없다. 알바 사장도, 면접관도 주민등록 숫자 ‘1’에게 묻는다. “남자가 왜?”


단발머리가 된 마늘은 ‘일반 직장’을 포기하고 콜센터를 찾았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목소리로만 사람을 대하는 직업. 용모단정 같은 것은 고용조건에 들어가지 않을 직장이다. 면접 때도 별스러운 질문이 오가지 않았다. 콜센터는 마늘의 소위 ‘여성스러운’ 제스처도, 성별 판독이나 남녀 구분이 애매한 음성도 신경 쓰지 않았다.


“면접장에서는 목소리 듣고 인사말 정도 시켜보는 거? 면접 때는 머리는 길렀지만 별로 (여성처럼) 안 꾸미고 갔거든요. 왜 길렀냐고 물어보기에 모발 기증을 하려고 한다. 일단 뽑혀야 하니까 착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교육 기간에는 화장한 채로 갔죠.” -마늘, 20대, 비수도권 거주자, 젠더퀴어, 퀘스쳐너리(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확립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은 경우를 부르는 말), 현재 학생


마늘은 그렇게 콜센터에 취직했다. 너무도 정해진 수순으로 움직여 나는 ‘왜’를 묻지 못했다. 그래서 마늘이 물어왔다.


“왜 내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묻지 않나요?”


지하 속 공평


누구도 마늘과 같은 이들이 왜 그곳에서 일하는가 묻지 않는다. 세상은 마늘의 존재를 모른 척한다. 일을 구해 먹고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도 망각한다. 그러나 이 잔인한 세계에도 ‘공평’은 있다. 세상의 관심 밖인 것은 마늘만이 아니었다. 세상은 콜센터에서 수화기를 붙잡고 있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관심이 없다.


마늘은 이 일을 두고 “말만 또박또박 하면 되는 일”이라 칭했다. 진입장벽이 낮다. 그래서일까, 콜센터는 주로 육아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이 ‘보조’적이고 ‘푼돈’이고 ‘양육비’ 정도인 돈을 벌기 위해 선택하는 대표 직종이다.(그 푼돈이 없으면 가계가 휘청거린다는 것은 암묵적 비밀이다.)


1980년대 이후로 대규모 여성 취업장이 된 서비스 업종. 그러나 기혼여성들에게는 여기도 좁은 문일 뿐이다. 나이가 걸리고 외모가 걸린다. ‘피부화장, 붉은 립스틱, 눈썹 정리, 커피색 스타킹, 2-3cm 구두굽, 렌즈 착용’을 직원에게 요구하는 회사(CGV 규정)가 용모를 고용 잣대로 두지 않을 리 없다.


▲ CGV의 여성알바 채용 외모 규정에 항의하는 알바노조 피켓팅. ⓒ알바노조


외모가 자연스럽게 ‘업무수행 자질’로 요구되는 지상(地上)의 서비스업을 피해, 기혼여성들은 지하세계를 찾게 된다. “누가 날 써주겠어.” 여성들의 자조에는 단절된 경력, 부족한 일자리, 육아로 인해 빠듯한 시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용인 받지 못하는 ‘외모’가 포함된다.


십여 년이 흘러, 이들에게 어머님 이모님 고모님 호칭이 따라붙는 그런 나이가 되면, 사회는 그제야 ‘아름다운’ 외모의 굴레에서 그들을 놓아준다. 더는 이들에게 ‘날씬한, 하얀, 가는, 말랑한, 부드러운’ 촉감과 외양을 원하지 않는다. 그녀들도 “내가 여자라고?” 하며 깔깔 웃어젖힌다. 그런 의미로 ‘여성다운’ 외모에서 자유롭다. 아쉽게도 해방은 아니다. 다른 것을 내놓으라 한다. 후덕한 모성의 상징인 살집이 허용된 여자 나이엔 돌봄노동이 적합하다고 한다. ‘모성을 가진 여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저임금 보상이 따른다.


마치 중력의 힘이 작용하듯 ‘그녀’들을 잡아당긴다. 저임금 노동이 미끄럼틀 아래서 이들을 기다린다. 외양을 보지 않는 저임금 서비스업계. 그 지하세계 중간 즈음에 콜센터가 있다. 아직 ‘여성다운’ ‘고운’ 목소리를 지닌 나이대의 여성들이 온다. 그곳에 성별 규범(남자는 남자답게)이라는 중력에서 떨어져 나온 마늘이 문을 두드린다.


지하세계의 다채로움


내게는 저임금과 감정노동의 끝판왕으로 여겨지던 콜센터. 그러나 마늘은 다른 평가를 내놓았다. 면접조차 허용하지 않은 지상보다 콜센터 지하세계에 숨 쉴 틈이 더 많다고 했다. “외부에서 평가가 진행되기에 능력과 성과를 공정하게 인정받는 곳”이라 했다. 외부 평가란 고객이 하는 상담원 친절 평가를 가리킨다.


고객은 마늘의 성별을 모른다. 마늘의 외형을 모른다. “저는 전화 받을 때는 목소리가 한 톤 더 올라가거든요. 고객들도 다 여자인 줄 알고 아가씨, 하고요” 수화기 너머의 고객은 오직 자신을 대응하는 방식으로만 평가를 내놓는다.


돌이켜보면 서비스 노동자에 대한 실시간 고객평가가 도입될 때, 노동조합 등이 얼마나 반발했는가. 일하는 사람을 옥죄는 상시적인 평가는 비판받을 만하다. 그러나 겉모습을 두고 색안경 낀 평가를 수시로 당해온 마늘 입장에서 수화기 너머 고객평가는 공정함의 상징, 블라인드 테스트와 다를 바 없다.


마늘이 느끼는 공정함은 직장 내 인권에서 기인한 게 아니다. 앞서 마늘은 “말만 또박 하면 되는 직장”이라 했다. 회사가 직원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다. 기대하는 것은 저임금과 콜 수를 견뎌낼 사람뿐이다. 원래 기계에 칠해진 ‘색’은 중요하지 않다. 꼭 같은 색일 필요도 없다. 기계는 움직이는 것이 가장 큰 미덕이다.


이 점을 마늘도 모르지 않는다. 마늘의 목소리를 다른 동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물었다. “남의 콜을 들을 만큼 다들 여유롭지 않아요.” 바쁠 때는 하루에 200콜도 받는다. 마치 허들을 뛰는 것 같다고 했다. 마늘의 익명성은 노동 강도로부터 지켜진다.


그럼에도 사람과 대면하지 않는 노동, 그에 따른 업무평가를 마늘이 ‘공정하다’ 느낀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다르다’는 것이 평가절하로 이어지는 사회에서, 마늘은 다름이 가려지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았다고 느꼈다.


다름의 가벼움


여성학자 정희진은 “몸 때문에 차별 받는 사람들에게 몸은 중립지대가 아니다”(<낯선 시선>, 2017)라고 했다. 마늘에게 몸은 중립지대일 수가 없다. 마늘은 다르다. 보기부터 다르다. 몸이 가려지자 차별이 일정 사라졌다 느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가?


우리가 ‘단정하고 친절한 서비스직에 적합한 여성’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그 여성과 ‘우리’는 같은가? 그 여성처럼 고르고 하얀 치아를 살짝 보이며 웃고 있는가. 우윳빛 가는 목과 둥근 어깨를 가지고 있는가. 마르고 곧게 뻗은 다리를 가지고 있는가. 맑은 피부에 자연스러우면서도 화사한 화장을 하고 있는가.


사회는 ‘그 여성’을 기준으로 해서 우리의 스펙을 평가한다. 우리는 그 여성과 다르지 않기 위해 러닝머신 위에서 뛰고 수술대 위에 눕는다. 노력(?)은 결과로 돌아온다. 여성노동자의 단정성이 고객만족에 영향을 미친다. 외모가 임금에 영향을 미친다는 숱한 조사결과가 무수하다. 평균 이하인 경우 불이익을 받는다는 결과도 함께.


마늘의 다름을 두고 평가절하 하는 세상은, ‘우리의 다름’을 두고도 마찬가지이다. 상벌이 있다. 평균 이하일 경우 알다시피, 세상 살기 피곤하다. 그런데 평균은 어디쯤일까. 우리가 이상적인 그 여성을 좇아 달리는 사이, 이상과 정상(평균)의 구별은 모호해져 버렸다. 미용체중이 어느새 정상체중으로 자리 잡았듯 말이다.


어느새 우리는 ‘정상’ 기준 안에 드는 것조차 버거워진다. ‘보통 여성’이 되는 일에 힘이 부친다. <거부당한 몸>의 저자 수전 웬델은 이를 두고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체 사이즈가 아닌 몸” 또한 문화적 의미로 구성된 “장애”라고 했다. 우리는 전전긍긍한다. “몸이 우리를 배신할까봐, 살이 찌거나, 주름이 지거나, 너무 빨리 노화되거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무심해지게 만들까봐”(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우리의 몸이 ‘정상’이 아닐까봐.


그러니 우리가 마늘의 처지를 생경하게 보는 일은 우습다. ‘정상’이 아니라고 평가절하 당하는 이는 마늘만이 아니었다. 마늘에게 머리를 자르라고 강요하는 취업시장은 우리도 가만두지 않는다. 콧대와 치아와 턱선, 이제는 표정까지 내버려두지 않는다.


중력에 던지는 물음표


‘규범적 미’라는 중력은 같은 행성에 사는 마늘과 ‘우리’를 무겁게 누른다. 성소수자 자살률과 거식증 여성 발병률은 중력의 동시대성을 말해준다. 중력은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붙는 ‘여자보다 더 예쁜’이라는 수식어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회가 마지못해 ‘성별전환’을 인정하는 대상은 미의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트랜스젠더 뿐이다. 예뻐야 용서받는다.


마늘은 예뻐지려는 이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이질감을 주거나 괴리감을 주는 옷을 선호해요. 내가 이렇게 하고 있으면, 너 내가 어떻게 보여? 헷갈리지?” 그리고 내 성별을 정의내리기 “어렵지?”


마늘은 지구에 살면서 ‘중력’을 거부한다. 머리 자르기를 거부한다. 화장을 한다. 그렇다고 사회가 허락한 ‘여자’가 되지도 않는다. ‘예쁜 여자’도 ‘정상 남자’도 되지 않겠다고 한다. 그의 존재는 “모든 인간은 인간이기 전에, 남성과 여성이어야 하는 젠더 사회”(정희진,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2017)를 당황케 한다.


마늘의 외모는 이 세계에서 스펙이 될 수 없다. 세상이 요구하는 표준에 들지 않는다. 스펙이 될 수 없는 몸은 의외로 무수히 많다. 우리 사회는 ‘정상(남성)’의 몸을 우위에 두고, 그 아래 ‘미치지 못하는’ 몸들을 줄 세운다. 수많은 몸들(인종, 장애, 질환 등을 겪는 몸)이 능력 밖의 것이라 치부된다. 이들의 몸은 점수가 될 수 없다. 질문이 된다.


마늘의 몸은 존재 자체가 물음표다. 그것은 지금까지 여성들이 ‘몸’에 던져온 많은 질문들과 궤를 같이 한다. 꾸밈노동을 거부하고, 코르셋을 벗고, 여자들은 많은 질문을 해왔다. 고정화된 외양과 성별 분업을 의심하고 의문했다. 저 헛된 중력을 향해 말이다. 우리는 지금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 기사에 등장하는 이름 중 일부는 가명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타인과 나 보호하기, 조력자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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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나를 보호하는 방법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주요 원칙과 조력자 되기


※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 지도자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첫째, 폭력 상황에서 나를 지키려면 공격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밖에 없을까?

둘째, 자신을 보호하는 것도 버거운데 타인을 돕는 게 가능할까?


위 두 가지 질문이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첫째,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가족과 생활하는 사람들.

둘째, 직업적으로 폭력을 접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자해와 타해 등 도전행동 때문에 그동안 사회서비스에서 배제되어 온 최중증 발달장애인들을 지원하는 사회복지사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복합적인 처지에 있다. 많은 사회서비스 직종이 그렇듯 이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다수가 여성이다.


일하는 현장에서는 뺨을 수십 대 맞거나, 머리를 물리거나, 발차기를 당하거나, 메다 꽂히거나, 떠밀려 넘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장애에서 오는 도전행동이기 때문에 공격 징후, 일종의 공격 신호 같은 게 아예 없거나 매우 약하다. 즉 미리 알아차리는 것이 아주 어렵다.


이 기사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해와 타해 성향을 보이는 최중증 발달장애인들을 보호하면서도 아울러 자신을 보호하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 장애인들, 방문자들까지 다치지 않게 도와야 하는 실무자들을 위한 8주간의 수업 경험을 정리한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내가 가진 지식을 나눌 수 있어 행복했다. 그리고 이 글이 비슷한 상황을 겪는 이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 최중증 발달장애인과 만나는 사회복지사들을 위한 8주간의 수업 ⓒ노틀담복지관


공격자와 방어자, 그리고 제삼자 보호하기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들은 폭력상황에서 공격자, 방어자, 제삼자까지 모두 최대한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 다음은 이런 특별한 조건에 알맞은 주요 원칙이다.


1. 예방 먼저


일반적인 경우보다 공격 징후를 감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흥분하거나, 특정인을 뚫어지게 바라보거나, 손이 가슴 위로 얼굴 가까이 올라오거나,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오거나, 걷거나 서는 움직임 범위 이상으로 발을 움직인다면 경계한다. 손을 들어 사용할 준비를 한다.


2. 힘 싸움이 되지 않게


힘 싸움이 되면, 상황이 빠르게 격화된다. 흥분하면 순간 힘이 세지기도 하고, 뇌의 조절작용이 손상된 경우 체격과 관계없이 쥐는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할 수 있다. 상대의 힘이 촉발되지 않도록 낯설고 신속하게 행동해야 한다.


3. 엉키지 않는다.


상대가 발로 차도 닿지 않을 정도로 떨어지면 좋다. 그러나 보호할 사람들이 있어서 멀리 떨어질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럴 때는 적어도 서로 엉키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거나 특히, 각도 상으로 멀어지는 게 중요하다.


4. 언어 테크닉


예방하고, 힘 싸움을 하지 않고, 아프게 하지 않고, 엉키지 않으면, 공격자는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반드시 상대가 해야 할 일을 짧고 쉽게 말해줘야 한다.


5. 확인하고 종료한다.


공격자를 물리적으로 무력화시킨 게 아니라 진정시키거나 설득시킨 것이다. 따라서 상황을 종료하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더는 공격할 의도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첫 번째 공격을 해결했다고 바로 경계를 풀거나 뒤돌아서는 안 된다.


▶ 공격자를 보호하면서 문제 해결하기  ⓒ노틀담복지관


위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위한 ‘조력자 되기’


조력자가 되는 방법에는 위험상황에 처한 사람을 봤을 때 알리기, 도움 요청, 사후에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사후 조치를 함께 논의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


직접 개입해 돕는 방법도 있다. 이것은 셀프 디펜스와는 차이가 있다. 셀프 디펜스는 당사자인 내 안전이 가장 중요한 판단 요소다. 그러나 타인을 보호하는 조력자가 된다는 것은 당사자가 아닌 내가 위험해지는 것을 감수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런 선택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는 경험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타인을 돕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어떤 교육과 훈련도 받지 않았지만, 용감하게 다른 사람들을 도운 이야기들을 들었다.


타인을 보호하는 조력자가 될 때는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1. 공격받기 전


아직 공격받지 않았으나 일촉즉발의 상황이다. 공격자와 공격의 표적이 된 사람 사이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보호할 사람을 안전하게 당기거나 밀어서 그 사이로 들어갈 수 있다. 서두르지 말고 안정된 자세를 취하며 개입한다. 두 손을 앞에 들고 위에서 소개한 주요 원칙을 따른다.


▶ 실무자를 위한 교육 중에서. 공격이 심각한 경우 3인 이상이 개입해야 한다. ⓒ노틀담복지관


2. 공격받고 있는 경우


①공격받는 사람에게 할 일: 안심시킨다. 언어 테크닉을 사용하면서 흥분하지 않고 가만히 있게 한다. 어떤 공격인지 확인한 다음, 공격을 풀고 둘 사이를 분리한 후 안정시킨다.


②공격하는 사람에게 할 일: 진정시킨다. 잘못된 행동임을 알리고 언어테크닉을 사용해 공격을 멈출 것을 지시한다. 분리한 후 안정시키고 이동시킨다.


③상황이 심각한 경우: 3인 이상이 개입해야 한다. 공격자를 제지하기 위해 안전하게 잡거나 여럿이 싸안아서 움직임을 제한하고 진정시킨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소중한 사람 보호하기(제삼자 방어 테크닉) 영상으로 보기 https://bit.ly/2HhhHcZ

“성별이 스펙이냐” 채용성차별 현황 밝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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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이 스펙이냐” 채용성차별 현황 속속들이 밝혀라!

금융권 성차별 고용에 항의, 재발방지 촉구하는 기자회견



지난 2일, 영국의 주요 언론들은 의회의 여성의원들이 모여 성별 임금 격차(gender pay gap)을 해소하기 위해 힘을 합쳐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이 움직임을 이끈 영국 노동당의 스텔라 크리시(Stella Creasy)는 보수당과 자유당의 여성의원들도 참여한 초당적인 모임에서 페이미투(#PayMeToo) 온라인 캠페인을 시작하겠다고 알렸다. 영국의 공공기관 중 90%가 남성에게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지급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의 움직임이다.


미국에서도 미투(#MeToo)에 이어 영화산업, 광고업계, 언론계, 실리콘밸리 등 각 분야에서 여성의 부재(不在)와 직장 내 성차별에 대응하기 위해 여성들이 결속하고 있다. (관련 기사: 미투, 타임즈업 운동…‘여성노동’ 이슈로 이어져 http://ildaro.com/8180)


국내서도 기업들의 채용 성차별에 항의하며 공정한 채용, 공정한 임금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


▶ 을지로입구 KEB하나은행 앞에서 열린 채용성차별 철폐 기자회견. ⓒ일다(박주연 기자)


최근 KB국민은행이 2015년 상하반기와 2016년 하반기 대졸 신입 공채에서 남성 지원자의 점수를 임의로 올려준 일로, 인사팀장이 검찰에 기소(남녀고용평등법 위반)된 사실이 알려졌다. 4월 2일에는 금융감독원이 ‘2013년 하나은행 채용비리 검사 잠정결과’를 발표하며, 하나은행이 ‘사전에’ 남녀 4대 1의 비율로 차등해 채용한 정황이 드러났다고 보고했다. 합격점수를 남녀 다르게 적용해 여성들을 서류전형 단계에서부터 떨어뜨린 것이다.


금융권의 채용 성차별 비리가 알려진 후, 여성/노동/인권 단체들과 모임들이 ‘채용성차별 철폐 공동행동’을 결성해 24일(화) 오전 11시 을지로입구역 KEB하나은행과 KB국민은행 앞에서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자라서 떨어졌다’ 성별이 스펙인 사회


하나은행 앞 기자회견에서 진행을 맡은 한국여성노동자회 정하나 활동가는 이날 아침 한겨레신문 기사를 인용하며, 채용 성차별 문제를 방관하는 정부를 질책했다. 보도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이 금융기관 성차별 채용실태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해보겠다며 고용노동부에 협조를 요청했는데 김영주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지금까지 금융기관의 채용비리 등은 관행이었는데, 과거 사례까지 들추면 크게 혼란스러울 것”이라는 게 이유다.(“금융기관 혼란 우려돼 채용비리 전수조사 거절”, 한겨레신문 2018년 4월 24일자)


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의 주수정 활동가는 “우리 단체가 2013년에 만들어졌고, 요즘 청년실업 문제 관련해서 저희를 불러주시는 곳들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여성청년’ 문제가 있다고 말하면 여성청년이 그냥 청년과 뭐가 다르냐, 왜 여성청년을 분리해서 말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렇게 묻는 분들게 팩트를 알려드리겠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여기 있는 하나은행은 여성 지원자의 커트라인 점수를 남성에 비해 48점이나 높였고, 저기 있는 국민은행은 남성 지원자 100명의 점수를 올려줬습니다. 이래도 ‘여성청년’ 이야기를 할 필요 없습니까? 많은 기업들이 채용 성차별과 관련해서 조마조마하고 있을 것입니다. 남자 먼저 뽑으시죠? 압박 면접이라는 핑계로 여성들에게는 남자친구 있느냐, 결혼하고 출산하면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시죠? 요새는 성폭력 당하면 미투 할 거냐고 물어보시죠?”


▶ 을지로입구 KEB하나은행 앞에서 열린 채용성차별 철폐 기자회견 피켓 문구. ⓒ일다(박주연 기자)


청년유니온의 김영민 사무처장은 “많은 청년들이 이력서를 50개, 100개 쓰고도 왜 떨어졌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지금 채용시장의 상황”이라며, “내가 여성이라서 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청년들이 느끼는 허탈감은 상상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더우기 “채용 과정의 불공정함이 청탁의 수준을 넘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에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발언했다.


또 “이런 부정이 기업의 묵인 없이 인사 담당자 개인의 행위로 가능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며, 채용 비리가 드러날 때마다 개인의 잘못 혹은 실수라고 무마하려 드는 기업들의 행태를 꼬집었다.


서울여성노동자회 손영주 회장은 “금융권 기업들의 채용비리에 분노한다. 기업들은 ‘조정’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조정이 아니라 ‘조작’이다”라고 외쳤다.


손영주 회장은 무엇보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실질적으로 처벌받는 기업은 거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고용노동부에서 ‘오래된 관행’이라는 이유로 손을 대지 않으면 어느 정부 부처가 이 일을 담당하고 처리하겠냐” 라고 비판했다. 이어 “담당자 한두 명을 처벌하는 방식의 꼬리 자르기가 아니라 전반적인 문제, 관행으로 지속되어 온 이 문제를 철저히 조사”할 것을 정부에 당부했다.


▶ KB국민은행 앞 창문 외부에 100개의 피켓 붙이기 퍼포먼스중인 기자회견 참가자들. ⓒ일다(박주연 기자)


성차별 채용, 이제는 뿌리 뽑아야 한다!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KB국민은행 앞으로 이동한 후, 발언을 이어나갔다. 정의당 박인숙 여성위원장은 “미투(#MeToo)는 성차별 구조에 의해서 벌어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페이미투! 제대로 고용하고 제대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함께 투쟁하자”고 제안했다.


민중당 장지화 공동대표는 “부모의 재산만 스펙이 되는 줄 알았는데 성별도 스펙이 되는 지몰랐다. 이렇게 채용 성차별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여성청년에게 꿈을 키우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사회는) 저출산 운운하며 결혼하라, 임신하라고 한다”고 지적했다.


‘채용성차별 철폐 공동행동’은 기자회견문을 낭독하며 금융권의 뿌리 깊은 성차별을 지적하는 한편, 정부와 기업 측에 세 가지 변화를 요구했다.


첫째, 정부는 기업의 채용 과정 중 성차별 현황을 명명백백히 조사하여 제대로 실태 파악하라: 성차별적 면접 질문이나 점수 조작 등 사회에 만연한 채용 성차별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그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채용과 모집에 있어 현행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하는 사업장을 처벌하고, 엄정한 시정조치를 위해 법과 제도를 강화하라: 남녀고용평등법 제7조 1항 “사업주는 근로자를 모집하거나 채용할 때 남녀를 차별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된 ‘채용 성차별 금지 조항’의 처벌 규정은 벌금 500만원에 불과하다. 채용에서부터 성평등 노동 가치가 실현되도록 법과 제도를 강화할 것을 요구한다.


셋째, 기업은 채용의 전 과정과 결과를 투명하게 공개하라: 채용의 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매년 신규 채용 성비를 공개해, 채용 성차별을 시정하고 있는지 기업은 사회적인 검증을 받아야 한다.


▶ KB국민은행 명동점 창문에 붙은 피켓 문구들. ⓒ일다(박주연 기자)

 

이번 기자회견을 주최한 ‘채용성차별 철폐 공동행동’에 함께하고 있는 단위는 약 60개 단체로, 한국여성노동자회,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인권/노동단체들과 알바노조, 청년유니온, 페미당당, 페미몬스터즈, 불꽃페미액션 등이 함께했다. 여기에 고려대, 국민대, 동국대, 성균관대, 이화여대, 인천대, 중앙대, 한국외국어대 등 각 대학 총여학생회와 여성주의 교지, 페미니즘 학회와 동아리 등 취업을 앞두고 있는 학생들의 참여가 유독 돋보였다.


여성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채용 불평등과 임금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절망에 대해 이제 정부와 기업은 책임 있는 변화로 답해야 한다. 부조리한 성차별 고용 비리를 깨야 한다는 목소리는 더 높아질 전망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차를 마시는 시간 I

난 왜 아들과 ‘성적 대화’를 하지 않아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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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왜 아들과 ‘성적 대화’를 하지 않아온 걸까

『페미니스트 엄마와 초딩 아들의 성적 대화』 서평


※ 필자 김양지영 님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성교육을 하기에 난감한 어른들


<페미니스트 엄마와 초딩 아들의 성적 대화>(김서화 지음, 미디어일다, 2018) 출간 소식을 듣고, 응당 이 책의 서평은 내가 쓰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난 초등학교 6학년 남자 아이를 가진, 아들 엄마이고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엄마가 여성학자라서 집에서 매일 ‘여자~여자~’한다며 친구들에게 내 흉을 보기도 했더랬다. 아들이 내가 ‘여자~여자~’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난 일상적으로 페미니즘을 실천하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며, ‘아차’ 했다. 나는 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이야기들 속에 ‘성적 대화’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들의 몽정 때도 난 배우자에게 얘기했다. “아빠가 아들에게 잘 얘기해주라고.” 왠지 아들의 성과 관련한 문제는 같은 남자인 배우자가 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배우자는 아들에게 남자가 되었으며 뒤처리를 잘해야 하고 청결에도 신경을 써야한다는 식의 얘기를 한 걸로 안다. 사실 나도 그 정도 수준으로밖에 조언해줄 게 없었다. 그래도 그 정도 이야기한 건 많이 진화한 결과다. 아이가 어릴 때 배우자에게 같은 남자로서 아이 성교육에 신경 쓰고 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을 때, 배우자는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성교육이란 걸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어 무엇을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몰랐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배우자의 반응. “할 게 뭐 있어?”

▶ 김서화 지음, 양육자를 위한 초등남아 성교육서 <페미니스트 엄마와 초딩 아들의 성적 대화> (미디어일다, 2018)


지금 초등학생 아이를 둔 부모 세대에게 성교육은 생식교육, 정절교육, 보건교육이었다. 그나마 남성들은 포르노 등을 통한 비공식적인 정보들을 알아서들 수집하며 그걸 성(性)이라고 배우고 알았던 세대들이다. 자신 또한 성이 뭔지 잘 모르는, 포르노에서 알려주는 다양한 체위, 여성들의 반응 등이 성의 전부라고 알고 있는 세대들이다. 자신 또한 섹스 파트너와 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못하고, 비공식적인 성적 지식을 성관계 속에서 일방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이러한 세대들에게 아들 성교육은 너무나 생소한 게다. 때가 되면 알아서 정보가 있을 테고, 그런 걸 잘 터득하면 되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고 아빠들보다 엄마들이 낫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엄마들은 생식교육과 정절교육 위주로 교육을 받았다. 정작 성관계가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한참 후에, 출산 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도 한참 후에 비공식적인 정보망을 통해 알았다. 여성들에게 성은 모르면 모를수록 좋은 것, 소소익선이었기에 조신한 여성이라면 성에 무관심하고 모른 척해야 했다. 이러한 여성이 나중에 섹스를 할 때 과연 그녀는 성관계에서 자신의 욕구를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의 성적 욕구를 성관계 속에서 잘 풀어내고 있을까.


그래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의 성적 호기심을 마주할 용기도 없고, 무엇이 폭력적 행위인지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책임감도 없는 것 같다.”


아들 성교육을 미뤄온 나


‘난 왜 아들과 성적 대화를 하지 않아온 걸까?’ 초6인 아들은 매일 매일이 다르게 부쩍 성장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매일 매일 뿜어져 나오는 성장호르몬과 성호르몬. 그 시기 아이들에게 뿜어져 나오는 성장기의 냄새가 성교육이 필요한 때라는 걸 보여주고 있는데. 나름 나의 변명이라고 한다면, 초6인 아이가 내개 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것. 저자가 말한 것처럼, 사실 난 아들의 성교육을 미뤄온 것 같다.


내가 아들의 성교육을 미룬 건, 아마도 그 성교육의 내용에 있는 듯하다. 아들에게 필요한 성교육이란, 2차 성징이 나타나는 시기에 바로 적정 때가 되면 어떻게 성적 욕구를 잘 풀어낼 수 있을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나도 아이의 성교육에 대한 고민을 아예 안한 건 아니다. 저자가 말한 것처럼 아이가 성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어린 시기에는 관심을 갖고 아이에게 낯선 사람을 조심시키고 어린이집 성교육과 연속선상에서 일명 ‘안돼요, 난 소중하니까’ 식의 교육을 시켰더랬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입학 후, 선생님들과 주변지인들에게 성교육을 언제쯤 해야 하는지 묻고 고민도 했다. 그런데 대개의 답변은 아직 아이들이 뭘 모를 때라 교육효과가 낮으니 초등학교 고학년쯤에 하는 게 적절할 거라는 거였다.


문제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나서는 학교에서 이뤄지는 성교육을 너무 믿은 나머지, ‘기본적인 것은 배웠겠지’ 지레짐작하며 아이와 일상에서 성적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은 여자아이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성교육과 성폭력 예방교육이 강조되는 시기에 성교육 공백기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페미니스트 엄마와 초딩 아들의 성적 대화>에 실린 삽화 ⓒ일다(일러스트레이터: 두나)


초등학생 남자아이, 성교육 공백기


난 책과 강의에서 남성들이 그들만의 네트워크 안에서 어떻게 성과 관련한 정보를 공유하며 여성을 대상화시키고 그들만의 성적 판타지들을 만들어나가는지 비판했다. 요즘 포르노를 처음 접하는 시기가 일반적으로 초등학교 고학년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난 아들에게 초미의 관심사일 성에 대해서 집에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공교육에 맡겨두고 있었다. 정말 저자의 말처럼, 공교육을 크게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이상하게 그 부분에서는 믿고 있었다.


저자는 초등학교 고학년인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성교육이 필요한 때라고 말한다. “초등학생 때야말로 남아들이 가장 많은 성적 정보를 접하고 배우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시기에 스마트폰과 인터넷과 친해지고, 유튜브를 사랑하게 되며, 동네 형아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TV사용법도 완벽하게 숙지한다. 그런데도 양육자들의 의도된 무관심에 의해 이들은 성교육에서 방치된다.”


물론 양육자로서 변이라면, 의도한 무관심은 아니고 ‘성교육’이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고 어떠해야 하는지 몰라서라는 게 맞을 것 같다. 한국사회에서 아들의 성교육은 성적 욕구를 어떻게 건강하게 다룰 것인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저 아들의 성교육은 남자로서 커져가는 성적 욕구와 연결되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페미니스트이지만 아들 가진 엄마로서 성교육이나 성폭력 예방교육과 관련해 딸을 둔 엄마보다 관심과 고민이 덜했다는 걸 인정한다. 한국사회에서 성폭력의 주요한 대상은 여성이고, 나 역시 여자로서 그러한 경험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딸을 둔 지인들이 딸 키우는 불안을 토로할 때 공감은 했지만 그걸 내 아들의 문제와 연결시키지 못했다.


바로 저자가 현재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이 갖는 한계라고 지적하는 부분이다. 성교육은 주요한 대상을 여성으로 삼고 어떻게 하면 성폭력 피해자가 되지 않을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게다가 성교육은 성별화되어 있다. 남아에게는 성교육이 성적 욕구에 대한 것이지만 여아에게 성교육은 생식교육, 정절교육, 보건교육, 성폭력 예방교육으로 그 어디에도 성적 욕구는 없다.


▶ <페미니스트 엄마와 초딩 아들의 성적 대화>에 실린 삽화 ⓒ일다(일러스트레이터: 두나)


성교육과 페미니즘의 결합, 권력에 대해 말하기


그래서 저자는 성교육에 페미니즘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본다. 성교육의 내용은 무엇이어야 하며 성교육을 통해 우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페미니즘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자연스럽다는 성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아울러 성과 관련한 관습과 인식과 행동에 대해 지적인 연습과 일상적 훈련을 하도록 만든다.”


일례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성교육이 왜 성별화되는지, 남성에게는 성이 즐거움으로 경험되지만 여성에게는 성이 불안과 수치스러움으로 경험되는 이유를 페미니즘은 묻게 한다. 우리 사회 남녀에게 다르게 적용되는 이중적인 성문화. 그 연속선상에서 남녀에게 다르게 경험되는 성. 바로 그것들을 질문하게 한다.


또한 저자는 성교육에 페미니즘을 결합시키는 것, 그것은 바로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어떻게 차별이 되는지, 바로 그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힘, 권력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성폭력을 가능하게 만든 문화와 가치관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성교육은 그저 아들에게 현재의 관습과 가치관을 따르고 그에 복종하되 다만 좀 더  젠틀해지라고 가르치는 정도에 그칠 게 뻔하다.”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문화와 가치관, 바로 그것을 만들어내는 게 권력이다. 아이들은 성과 관련해 작동하는 권력이 무엇인지, 권력이 있다고 마음대로 해도 되는지, 그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남녀에게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앎의 과정은 젠더 감수성을 키워나가는 과정으로, 성평등한 관점을 갖는 것과 맞닿아 있다.


엄마와 아들도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야 한다


그럼 성교육과 페미니즘을 어떻게 결합시켜낼까? 저자는 어떻게 일상에서 아들과 성과 관련해 대화하며 권력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도 제시한다. 바로 내가 여자로서 겪어온 성적 경험들을 일상에서 아들과 나누기. 저자에게 아들과의 성적 대화는 엄마와 아들이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과정이다. “엄마와 아들도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야 한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얘기해야 그게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는 길이다. 결국 내가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들에게 사람을 제대로 만나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내가 아들과 어떠한 이야기들을 해왔나 돌아보면, 어쩌면 아들이 내게 성과 관련해 이야기하지 않는 게 당연한 게 아닐까 싶다. 사실 난 아들에게 내가 여성으로서 살면서 경험한 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물론 책이나 강의에서는 자주 내 경험들을 이야기한다. 아이는 내가 커 온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해 자주 얘기해달라고 조른다. 난 내 성장기 이야기를 하면서 한 번도 내가 각종 성추행에 노출되었던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러한 성적 경험들이 내가 언제든지 성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알게 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성적 대상이 되지 않을까를 생각하며 살았던,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말이다. 난 내가 겪었던 성적 경험들이 아이에게 들려주기에 부적절한 얘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지금 아이에게 하지 않으면 아들은 누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을까?


아이는 성장하고 있고 조금 있으면 나랑 더 이상 긴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할텐데. 내가 그 이야기를 지금하지 않으면 언제 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성과 관련한 엄마의 이야기를 지금 듣지 않은 아들은 언제 그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을까. 성별화된 사회 속에서 얼마나 성별에 따라 경험이 다른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남성중심적인, 남자라면 살기 편한 한국 사회에서 아들은 젠더 감수성을 어지간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키우기 어려울 것 같다. 아이가 여성들의 성적 경험을 듣지 않고, 한국 사회에 작동하는 젠더 위계를 모르고 성장하면 그냥 보통의 가부장적인 남자가 되지 않을까? 저자가 제안한 대로 엄마가 여성으로서 살고 있는 경험을 대화의 소재로 삼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 바로 아이의 젠더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난 아이가 아직 초6이라 얼마간의 시간이 있는 것 같다. 저자가 책 속에서 제안하고 있는 추천도서 목록들을 보며 내가 읽을 것과 아들에게 권해줄 것을 체크해뒀다. 저자가 추천한 것처럼 아이 방 책장 한켠에 성교육 책들을 꽂아두고 읽을 수 있게 해보리라. 그리고 그 책들을 나도 같이 보며 아이와 성적 대화를 자연스럽게 풀어가 봐야겠다. 음~ 조금씩, 천천히.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뫼비우스의 띠로 얽힌 성접대, 성폭력, 성매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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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접대와 ‘권력형 성폭력’은 별개가 아니다

정책토론회 “뫼비우스의 띠로 얽힌 성접대, 성폭력, 성매매”



“성접대와 권력형 성폭력의 문제는 ‘권력’을 이용하여 성적 행위의 제공을 유인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유형의 범죄이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장임다혜 연구원은 24일(화)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주관한 정책토론회 <뫼비우스의 띠로 얽힌 성접대, 성폭력, 성매매-미투 운동 속에서 본 침묵의 카르텔>에 참여해 이렇게 말했다. “뇌물로서의 성(Sexual Acts) 제공과 법제도적 해결 방안”에 대한 발제를 하며, 성접대와 권력형 성폭력의 연관성을 설명한 것이다.


‘故장자연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자는 숨겨진 채 피해자의 이름으로만 호명되는 사건에 대해, 지난 2일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가 재조사 사전조사 대상으로 선정했다. 이어 24일 검찰과거사위원회는 김학의 전 법무차관이 ‘성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사건에 대해 대검찰청에 재조사를 권고했다. 이번 정책토론회는 ‘성접대/성상납’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에서 열린 것이었다.


성접대, 성폭력에 대한 대중의 인식 차이


정책토론회의 이름인 <뫼비우스의 띠로 얽힌 성접대, 성폭력, 성매매>에 나오는 성접대, 성폭력, 성매매라는 용어에 대해 대중들은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


▶ 다음소프트 권미경 이사가 발표한 성폭행, 성매매 이슈와 그에 따른 대중들의 언급 추이


다음소프트 권미경 이사는 2011년 1월부터 2018년 3월까지 7년 간 트위터에서 약 170억 건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주요 이슈가 발생하는 시기마다 성폭력, 성매매, 성접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언급량이 늘어나는 추이”가 있다는 걸 보여주며, “성폭력, 성매매, 성접대와 관련된 연관어를 살펴보면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데이터 분석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성폭행)의 경우 성범죄, 피해자, 가해자, 성희롱, 범죄 등이 연관어였고, 성접대/성상납의 경우에는 고위층, 경영자, 간부, 감독, 연예인, 술접대, 스캔들 등이, 성매매의 경우에는 인신매매, 불법, 동남아, 업소, 인권이 주로 언급되었다.


이중 성폭력(성폭행)과 성접대/성상납을 비교해 보면, 성폭력은 확실히 범죄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성접대는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접대와 직장 내 성희롱은 다르다?


권미경 이사가 발표한 결과에서 성접대/성상납 관련 연관어로 고위층, 경영자, 간부, 감독, 연예인, 술접대, 스캔들 등이 나온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문화예술계, 특히 연예계는 성접대와 관련해 오랫동안 의혹과 문제 제기가 있어온 곳이다. 그런데 토론회에서는 연예계가 특별해서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주우 사무국장은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실시한 여성연기자 실태조사(2009년)에 따르면 여성연기자 50% 이상이 술 시중 요구 및 방송관계자 등에 대한 성접대 제의를 받은 경험이 있는 것으로 발표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크게 이슈화되거나 알려지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일들이 여성연기자들의 생계(일)를 담보로 하고 있으며, 명목 상 ‘이득’을 얻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현재 미투 운동으로 발화된 많은 직장 내 성희롱/성폭행 피해자들이 지금까지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성폭력 가해자가 직장 상사이거나 자신의 생계(일)에 영향을 미치는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 피해자들은 인사고과나 업무에 불이익을 받게되거나 직장에서 오히려 본인이 왕따를 당하는 등의 괴롭힘을 당할까봐 피해 사실을 밝히지 못하고 참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연구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표한 ‘여성연예인 인권침해 실태조사’ 자료 중


주우 사무국장은 “연기자들은 ‘선택되어야 하는 입장’에 있고 언제라도 배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위계에 의한 성폭력과 접대가 일상화되어 왔다”며, “특히 일부 연출자들은 접대와 성접대를 요구하며 그것이 실행되지 않았을 때엔 ‘이유 없는 반복 촬영, 배역 축소 등’의 각종 괴롭힘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걸 얻어내기 위해 압박한다”고 말했다.


이는 피해자가 성을 담보로 생계(일)와 직결된 압박을 받는 상황임에도, 성접대 혹은 성상납이라는 개념은 마치 성을 제공한 이(피해자)가 ‘주체성’을 가지고 행위에 참여한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낳고 있는 게 아닌지, 즉 성폭력을 교묘히 숨기기 위한 말이 아닌지 의문을 던지는 지적이었다.


성접대, 성폭력, 성매매…법은 제대로 다루고 있나


그렇다면 성접대를 법에서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장임다혜 연구원의 설명에 따르면, 현행 법률 중에서 적용하여 처벌할 수 있는 항목은 형법상 뇌물죄,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 그리고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이다. 하지만 각각의 법률은 성접대의 성격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


장임다혜 연구원은 해당 성접대가 ‘재산상 이익’으로 인정되어야만 뇌물죄를 적용할 수 있다며, 법의 허점을 지적했다. “성매매 비용이나 유흥비용이 있는 경우엔 형법 및 특별법상 뇌물 및 부정청탁의 금품으로 인정하여 성적 행위를 ‘제공한 자’와 ‘받은 자’를 처벌할 수 있지만, 성적 행위를 제공 받은 자가 그 성행위로 이익을 얻은 경우가 아닌 경우에는 뇌물죄 처벌이 어렵다.”


이어 “이런 성접대 구도는 성적 행위의 상대방이 된 여성들을 ‘이득’을 얻는 자들로 설정하고, 강압이 행사되는 경우에만 ‘피해자’로 인정하는 성매매 처벌 구도를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최근 드러나고 있는 권력형 성폭력의 경우에도 법에서는 “폭행 및 협박, 강력한 지배 관계가 입증되어야만 성폭력 피해를 인정”하기 때문에 ‘권력형 성폭력’의 실태를 법이 잘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임다혜 연구원은 이처럼 성접대와 권력형 성폭력을 입증하는 과정의 어려움에 유사성이 있다고도 밝혔다.


나아가 “성접대는 성적 행위를 제공 받은, 권력을 가진 자의 부정부패나 단순한 분노로 바라봐야 할 것이 아니라 ‘성’을 수단화하는 문제, 타인의 신체와 성을 이용하는 행위를 폭력으로 정의하는 논의로 끌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 4월 24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주관한 2018년 제1차 성매매방지 정책토론회 ‘뫼비우스의 띠로 얽힌 성접대, 성폭력, 

성매매-미투 운동 속에서 본 침묵의 카르텔’  ⓒ일다(박주연)



권력이 ‘분산’돼도 성접대 요구는 계속되고 있다


이번 정책토론회에서는 성접대와 성매매, 성폭력은 권력을 가진 특정한 인물(괴물)이 저지르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해당 인물에게만 분노를 쏟아내면 안 되며 구조와 문화를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이어졌다.


주우 사무국장은 “외주제작 방송프로그램 편성에 관한 법률(방송법 제72조, 방송법 시행령 제58조)이 제정되기 전에는 연출자에게 모든 권한, 즉 작가 및 스텝 선정과 주/조연 선정 결정 권한이 있어서 문제였는데, 이후에는 그 권한이 연출자, 작가, 제작자, 캐스팅 디렉터 등으로 분산되어 (성접대가) 오히려 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했다.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서 (성)접대가 일어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권력이 분산된 후에도 권력을 나눠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성)접대를 요구한다는 것.


헤럴드경제 서병기 선임기자도 “권력이 한 사람에게 쏠려 있지 않고 분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견제와 균형이 되지 않고 서로 침묵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서병기 선입기자는 ‘연예계의 갑질 구도와 권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며, “권력을 공유하며 침묵하는 이 사회의 문제는 어떤 개인의 인식 변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번 정책토론회는 정말 뫼비우스의 띠처럼 엮여 있는 성접대, 성폭력, 성매매를 한 선상에 놓고 생각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타인의 신체와 성을 자신의 만족이나 권력의 표식으로 이용하고 요구하는 이들에 대한 처벌도 물론 필요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를 짚어주는 자리였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제 힘이 빠졌다고 하는 미투 운동’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누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권력이 쓰이고 있는지, 그로 인해 ‘무엇’이 침묵되고 있는지, 지금 보이지 않거나 교묘히 다른 말로 포장되고 있는 성범죄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논의가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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